‘왜’를 멈추고 인정하기 - 영화 <센티멘탈 밸류>와 <엄마의 시간>
*결말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오는 일이 혼자만의 연례 행사로 자리잡은지 어느덧 4년째다. 올해는 10편의 영화를 봤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몇몇 장면들이 불현듯 떠오르는 두 편의 영화, <센티멘탈 밸류>와 <엄마의 시간>에 대해 기록해본다. 이 글을 완성하고 나면, 내 안에 부유하는 생각들 중 최소한 몇 가지는 길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문장으로 남기지 않으면 그것이 내 생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싶어서, 나는 때로 쓰는 일을 미룰 수 없다.
요아킴 트리에의 신작 <센티멘탈 밸류>는, 집의 시선과 목소리를 빌려 가족의 단절과 화해를 그린다. 영화감독인 아버지 구스타프는 두 자매가 어릴 적 어머니와 자주 다투다가 떠났다. 오랜 시간이 흘러 두 자매가 장성한 어른이 된 후 그 집에서 맞은 어머니의 장례식 날, 구스타프가 나타나며 딸들과 재회한다. 긴 단절 후 불쑥 자매의 인생에 재등장한 구스타프는 연극배우로 성장한 맏이 노라에게 자신이 쓴 각본을 건네주며 주연배우가 되어줄 것을 요청한다.
노라는 훌륭한 연기로 대중의 인정을 받는 연극배우가 되었지만 무대공포증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노라는, 기혼자인 동료 배우와 불륜 관계에서 주어지는 제한적인 애정만을 누린다. 그 이상을 원하지만 원하지 않는 것처럼 기대를 낮추기도 한다. 노라는 신경질적으로 구스타프의 노력과 성의를 거부하는데, 그런 노라를 향해 구스타프는 화로 가득찬 사람은 사랑받기 어렵다고 일갈한다. 노라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상처받은 얼굴이 된다.
그러나 노라에게서 불쑥 튀어나오는 분노는, 그것을 비난한 당사자인 아버지에게서 기인했으리라. 그가 떠난 후, 노라 자신도 모르는 새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자라난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떠나가는 뒷모습도 남기지 않고 떠난 아버지. 그녀가 한때 가장 사랑했고, 그만큼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 어쩌면 미워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기 위해 분투하게 만든 사람. 그런 사람이 불쑥 나타나 해명은 커녕 같이 영화를 찍자고 하고, 나의 분노를 달래주는 게 아니라 비난한다.
노라는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동생에게, 너는 어떻게 그런 유년 시절을 겪고도 그렇게 잘 살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동생은 그녀에게 언니 덕분이라고 말한다. 언니가 날 돌봐줬기 때문이라고. 둘은 서로를 품에 안으며 둘만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그러나 아무리 언니가 동생을 돌보았더라도, 동생 역시 마음 깊은 곳에 억눌러야 했던 무언가가 있다. 즉흥적인 성격이 꼭 닮은 언니와 아버지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늘 해왔던, 침착하고 착한 그녀마저도, 끝내 아버지에게 분노하며 묻는다. "그렇게 가장 좋을 때 왜 날 버리고 떠났어요?" 구스타프는 두 자매의 계속되는 물음에 침묵한다.
한때 진실된 관계를 맺었던 대상과의 단절은, 평생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을 품게 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나한테 대체 왜 그랬어?" 이 질문은 여러 가지를 함축한다. "나라는 존재에게 필수적이었던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실은 이런 질문으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불가피하게, 너도 어렵게 날 떠난 거 맞지?", "난 여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지?". 궁극적으로는 이런 호소와 같다. "제발,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줘."
합당한 이유 없이 버림받은 사람만 평생 '왜'를 곱씹는다. 떠난 사람은 묻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때만 질문하는 능력이 생기는데, 애초에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떠나지 않았거나, 떠나가기 전 분명한 이유를 남겼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단절은 늘 그렇게 급작스럽게 벌어지는 지도 모른다. 질문이 들어올 공백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직면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훌쩍 떠나면 일단은 편하니까.
그렇기에 떠난 상대를 찾아내서 붙들고 아무리 절실하게 '왜'를 묻더라도 평생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왜 떠났는지 알 수 없는 것은, 상대가 떠나버리는 바람에 물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상대가 이유를 찾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냥,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다. 상대가 나를 떠날 때, 안타깝게도 그에게 나라는 존재는 크게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을 직면하는 게 두려워서, 그걸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 급히 떠났고, 그 부수적인 결과로서 나는 이유 없이 버려졌다.
이승우는 산문 <고요한 읽기>에서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자기 자신을 찾지 않으려고 회피한다’고 썼다. 결국 떠난 자는 자기 자신을 만나기 두려워한 사람이다.
나는 나에게서 가장 멀고, 내가 가장 잘 모르고, 내가 가장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또 있을까?" (헬무트 틸리케, <신과 악 마 사이>) ...
행여라도 사람은 기꺼이 자기를 찾는다고 말하지 말라.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자기 자신을 찾지 않으려고 회피한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할 때까지 외면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마침내 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달아난다. 자기 자신이 가장 멀리 있다. 끝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다.
<고요한 읽기> 중 한 챕터 '세상의 끝' p.18~19
어차피 대답을 들을 수 없다면, 난 언제까지 '왜'를 곱씹으며 살 것인가? 그것은 오로지 나의 선택에 달린 것인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품고 사는 일은 미련한 것인가? 해명되지 않은 단절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일은? 어디까지가 나아가기 위함이고, 어디까지가 소모적인 행위인지 스스로 분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신작 <엄마의 시간>에서도, ‘왜‘에 관한 동일한 질문이 반복된다. 영화는 청소년 미혼모인 주인공들이 보호센터에서 살아가며 겪는 각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 중 제시카는 미혼모였던 엄마에게 버림 받은 뒤 센터에서 자라, 그녀 자신도 엄마처럼 청소년 미혼모가 된 인물이다. 제시카는 만삭의 몸으로 모르간의 집과 직장으로 거듭 찾아가며, 왜 날 버렸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몇 번을 물어봐도 그녀는 달리 뚜렷한 답이 없다. 안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그게 가장 편하니까 그렇게 한 것일 뿐, 사실 불가피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다른 주인공 페를라는, 사랑하는 남자와 아이를 가졌고, 지금은 보호센터에 머물고 있지만 조만간 나가 그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것을 꿈꾸는 인물이다. 그러나 점점 자신을 대하는 남자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고, 연락마저 닿지 않는 상황이 된다. 그녀는 아이를 내팽개치고 남자를 찾으러 다니기도 하고, 깊은 슬픔에 빠져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기도 한다. “제발 그가 절 버리지 않게 해주세요.“ 아니, 그는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그것이 곧 신이 널 버린 게 되진 않아,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다시 <센티멘탈 밸류>로 돌아가서, 구스타프는 자신들을 왜 버리고 떠났느냐는 말에는 마땅히 대답하지 못한 채, 다만 영화를 같이 찍자고 했다. 두 자매가 뒤늦게 펼쳐든 각본 속에는 어린 구스타프가 등장한다. 그는 젊은 어머니의 자살을 목격하는 결말을 맞이한다. 그 이야기를 통해, 구스타프 역시 스스로 다 설명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불안을 품고 자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노라는 결국 아버지의 자전적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다. 그녀는 구스타프의 어머니가 되고, 동생의 어린 아들은 어린 구스타프가 된다. 그렇게 두 딸과 아버지는 화해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 불완전한 화해다. 아무리 아버지가 힘든 환경에서 컸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딸들에게 상처를 줘도 되는 명분이 될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더 제대로 살아서, 자신의 딸들만큼은 자신과 같은 상처를 겪지 않도록, 충분한 사랑을 누리며 클 수 있도록 더 노력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 대체 왜 그랬냐고, 딸들은 아버지를 향해 평생 원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그토록 불완전하다.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를 주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사랑을 거두어간다. 경험이 완전한 앎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사랑받지 못한 상처가 휩쓸고 지나간 뒤 천천히 자란 뿌리깊은 분노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순간부터 해소되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왜’가 해명되지 않아도, 인정할 수 있다. 이별은 이미 벌어진 일이며 지나간 일이라는 것. 그것이 나의 가치를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시간에 기대서, 주어진 현실을 열심히 살아나가야 한다. 최대한 정직하게. 나만큼은 나를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살다보면 나 역시 비겁해지는 순간들이 있겠지만, 그것 역시 똑바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면서. 과거가 남긴 분노는 나 자신의 정직으로만 점차 둥글어질 수 있다. 그것을 남긴 타인에 의해 해소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인정을 회피하고자 우리는 계속해서 ‘왜‘를 붙드는 게 아닐까. 최초의 씨앗이 심겨진 이후, 그 분노를 키우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그 원형을 새긴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여담으로, 영화제에 다녀오느라 긴 휴가를 쓰고 직장에 복귀한 뒤, 점심시간에 팀원 분들과 카페에 갔다가 어떤 영화가 가장 재밌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센티멘탈 밸류>에 대해 말하면서 이전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라는 영화의 감독이 만든 신작이라고 부연했는데, 대화를 이어나가다 얼마 안 있어, 듣고 있던 세 명 중 두 명이 '살아갈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라고 잘못 알아들었다는 걸 알았다. 음 그렇지, 살아갈 땐 누구나 최악이 되지, 생각했다고. 살아갈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그 말이 어쩐지 오래 남았다. 분노를 다스린다는 건 아마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완전하지 못한 존재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 그 불가피함을 탓하지 않고 견디는 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