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남긴 질문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해의 끝자락에 국립극단의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보았다. 이 작품은 흔히 말하는 ‘복수의 허망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인공 정영은 시대가 부여한 필연을 수행하지만, 그 끝에서 맞닥뜨리는 허무는 실패의 감정이 아니라 삶이 본래적으로 지닌 결말이다. 허무는 결과가 아니라 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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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왕에게는 두 명의 유력한 신하, 무관 출신 도안고와 문관 출신 조순이 있다. 조순은 백성들에게 자애를 베풀며 살아왔으나, 도안고는 그저 권력에만 눈이 멀어 조순을 죽이려 하고, 결국 그의 모함으로 조씨 가문 300여 명은 왕에 의해 멸족된다. 공주는 조순의 아들 조삭과 결혼해 아들을 임신한 상태였는데, 조삭은 죽기 전 아들에게 조씨고아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반드시 복수하라고 전할 것을 당부한다.
시골의사 정영은 조순의 은혜를 입은 적 있는 인물로, 공주를 만나러 갔다가 조씨고아를 떠맡게 된다. 그 아기를 살리기 위해 공주와 도안고의 부하는 자결하고,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 도안고는 조씨고아가 사라진 것을 알고 분개하여 진나라의 갓 태어난 아기들을 모두 잡아들여 죽이겠다고 하는데, 정영은 귀하게 얻은 자기 자식을 조씨고아인 것으로 속여 도안고에게 넘기는 대신 그의 신임을 얻는다. 자식이 처참하게 죽임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정영에게, 도안고는 기뻐 보이지 않는다며 웃으라고 강요한다. 정영의 아내는 상심을 못 이겨 자결한다. 이후 도안고는 조씨고아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 키운다.
정영은 조씨고아가 장성하기만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할 말을 준비한다. 드디어 조씨고아가 스무살이 된 해, 어느덧 노인이 되어버린 정영은 그에게 조씨 가문의 비밀을 일러주며 복수를 당부한다. 조씨고아는 처음에 정영의 말을 농담으로 취급하지만 곧 자신의 숙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후 복수는 그 전의 전개에 비하면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이루어진다. 왕은 조씨 가문을 멸족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도안고의 가문을 멸족시키고, 정영과 조씨고아를 불러들여 잔치를 열어준다. 조씨고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마치 도안고가 그랬던 것처럼 정영에게 웃어보라고 한다. 그리곤 곧장 잔치 자리를 향해 당차게 사라진다. 정영은 망연한 표정이 되어 홀로 그 자리에 붙박이고, 이 날이 오기까지 희생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본다. 그 누구도 절박한 정영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그를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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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기 전 줄거리를 대략 살펴보았을 때, 정영이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자식과 아내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선택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후 찾아보니 원작이 된 희곡 “조씨 고아”는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쓰였고,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사상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고대 중국 사회에서 복수라는 테마는 보편적인 일이었고, 충과 효를 기본 도리로 강조하던 유가적인 정치 철학은 나라에 대한 충성을 당연시했기 때문이다. 극에서 정영이 “이 아이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괴로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정영이 제 가족을 희생시킨다는 설정의 핍진성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 즉 복수라는 테마를 만들어내기 위해 부자연스럽게 꾸며진 장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에 와서 여전히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가 뭘까? 이 연극은 표면적으로 복수나 분노의 허망함이 강조되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혹은 거대 담론을 위해 희생된 개인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단 이 서사가 각자의 삶에 주어진 운명(혹은 소명)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지닌 필연성과 부질없음이라는 양면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영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회적 자리를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는 아내에게 미안하다며, 그렇지만 ‘평생 후회할지라도 지금은 이 선택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아내와 자식을 희생시킬 때 이미 자신이 맞이할 불행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 선택이 그 순간 그의 삶에 주어진 최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복수가 쉽게 끝난 뒤 허망함에 빠지는 것은, 그가 자신의 가족을 희생시킨 일이 헛되어서가 아니며, 그 복수가 낳은 또다른 비극이 헛되게 느껴져서도 아니다. 그가 허무한 것은 복수 성공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가 수행한 필연의 총합이 부질없는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와 얼마나 다를까? 복수라는 특수한 임무까진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저마다 다른 조건의 삶에 주어진 결핍과, 욕망과, 책무가 있다. 젊은 시절 마주한 그것들을 부정하지 않고 그 필연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늙을 것이고, 마침내 죽을 것이다. 인생에서 우리가 수행하는 모든 필연은, 그것이 얼마나 고귀하거나 절박했는지와 무관하게 마지막에는 허무의 자리에 도달한다. 허무는 실패의 감정이 아니라, 삶이 본래적으로 지닌 결말이다. 그는 복수를 이루었기에 허무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결말에 이르렀든 결국 허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부질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인생을 덜 허무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갖기 위해 부지런히 살아갈 때만이, ‘부질없는 삶‘과 ‘좋은 삶‘은 양립이 가능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타인을 위한다는 명분이 가지는 허약함, 대의라는 허상을 본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저마다의 제약된 삶을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한 선택이 삶의 동기가 되도록 태도를 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정한 최선이고, 우리가 유일하게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할 자기 정직이다.
정영은 시대와 환경이 부여한 필연을 받아들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필연 안에서 자기 동일성을 구축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는 조씨고아에게 출생 배경과 복수에 대해 설명할 때, 그것을 단번에 믿지 못하는 조씨고아에게 쉽게 분노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그에게, 이해는 필요 없고 인정을 하라고 일갈한다. 그러한 모습은 정의나 충을 실현하려는 자의 분노보다는, 자기 선택의 정당성을 타인으로부터 입증받으려는 자의 절망에 가깝다. 그 절망이 마지막에 가서는 끝내 그를 허무에 밀어 넣는다. 즉 필연은 수행했지만 주체가 되지는 못한 것이다.
극에서는 아래의 대사가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긍정의 의미로 쓰이나, 두 번째는 부정성을 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 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면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
첫번째는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희생하기로 선택한 노년의 신하로부터 언급된다. 노래하듯 직접 이 대사를 읊는 그는 진정으로 즐거워보인다. 삶의 필연을 수행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자기 선택을 긍정하는 모습이다.
두번째는 노인이 된 정영이 고인들의 환영을 볼 때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배경으로 깔린다. 환영들이 무표정으로 정영에게 눈길을 주지않은 채 스쳐가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영이 끝내 자기 자신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인이 된 도안고가 끌려나와 무릎이 꿇렸을 때, 그는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되려 정영을 비웃는다. 뭐하러 그랬느냐고, 어차피 다 늙어버리지 않았냐고. 그런 그에게 정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조씨고아의 경우에는 복수가 끝난 뒤 정영에게 웃을 것을 권하고 자신만만해 하는데, 누구보다도 정영의 마음을 헤아려야 마땅할 그이지만 오히려 도안고와 더 닮아보인다. 아주 큰 일을 해냈다며 가볍게 정영을 칭찬하고 곧장 잔치를 여는 것으로 무마해버리는 무능한 왕 역시 비슷하다. 이 장면들이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정영은 그들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그저 무력한 노인이 되어 황망한 표정으로 환영을 보면서, 자신을 봐주지 않는 고인들을 쫓아가며 이름을 부르짖는다. 어쩌면 그는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라고. 내가 이렇게 어렵게 살아왔는데, 삶이 나에게 무언가 보상을 해주리라고.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을 믿는 것에 실패했기에 허무를 견뎌내지 못했다. 결과의 허무가 아니라, 주체의 부재에서 온 허무다. 우리가 주어진 필연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은, 나 자신이 되기 위함이지 나 바깥의 대상으로부터 인정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극은 다음의 대사로 막을 내린다. "이 이야기를 거울삼아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우리는 이 이야기를 거울삼아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가? 정영이 처한 우환은 누가 만들었는가? 인생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닌 왜, 어떻게의 문제다. 무엇을 하든 인생은 허무할 것이다. 그 허무 가운데 끝내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은 ‘나‘의 부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