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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Jul 04. 2022

실패 변주곡-5

수능 실패 후 그 남자와, 두 번째 만남

 많은 시간 잠을 잤고, 누운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넉다운된 사람처럼

가족들 조차 볼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난 방 안에 갇혔다. 

극복하고 싶었지만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벗어나려고, 내 판단력을 믿을 수 없어 조언을 구하고 싶었지만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은 정신없이 빠르게만 흘러갔다. 

이대로 썩어 사라지거나 끝없이 걸어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가버리고 싶다. 

나 자신에 대한 어떤 물음과, 왜 내가 부서졌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생각하는 게 버거웠다. 

죽을 것 같다.

그렇다고 진짜 죽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상적인 위로, 피상적인 격려, 피상적인 해결책 모두 마음에 닿지 못했다. 격언, 위로, 생각해낸 해결책에 기대어 일어서려고 노력했지만 그 것들을 잡으려 하는 순간 유리창 너머의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또다시 도피했다. 책 속으로, 영화 속으로, 내 정신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렇게 가둬진 채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엄마가 나를 부른다. 오랜만에 거실을 보는 것 같다. 

배로 노력하지 않을 거면 재도전은 시도하지 말라고 한다. 재도전할수록 성공률이 떨어지므로

그리고 묻는다. 왜 다시 시작을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니? 왜 다시 일어서지를 못하니?

 구역질이 나왔다. 더하라고? 여기서 더 하라고? 더?

 난 못해요, 못해. 못한다고

온몸이 뒤집히는 기분에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집을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해가 눈이 부시다. 맑은 날이었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작정 걸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 얼굴을 엉망으로 만든다. 

골목 끝 한적해 보이는 계단 아무 곳에나 걸터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골목 구석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구석을 바라보니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앗, 저번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워줬던 그 남자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마주칠 줄이야, 민망한 마음에 눈을 피하고 그때는 감사했어요,라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 남자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고개 숙이고 있던 나의 눈을 맞추며 말한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네 얘기가 있니?"


 나는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해결책을 구하고 싶었고, 이왕이면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앞으로도 내 삶에서 영원히 타인일 누군가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므로 내 얘기를 못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제일 비참할 때 두 번씩이나 나타나 작은 위로를 건넨 이 사람이라면 혹시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 같은 생각도 했다. 

 나는 바로 옆에 있는 계단으로 자리를 고쳐 앉는다. 위쪽의 또 다른 골목길로 들어가는 입구. 사람도 없는 곳이니 괜찮겠지. 남자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높은 담벼락에 햇살이 선명한 자국을 낸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면서 시간을 따라 물 흐르듯 흐른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시험에 여러 번 실패했더니 정신이 복구가 안돼요. 집중할 수가 없고, 수업을 들어도 튕겨나가는 것 같이 머리가 받아들이질 못하더라고요."

 남자는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자꾸 다른 곳으로 도피하게 되고, 간단한 것도 기억을 못 하고 잡생각이 많아 머리가 시끄러워요. 시험 전에는 강박적으로 계획 세우고 못 지키고 자책하고 주변 정리하고 이걸 반복했어요. 잠도 못 자고요. 예전에는 모든 일을 참 의욕적으로 자신 있게 했었는데... 제가 해낼 거라는 자신을 갖고 말이죠. 근데 지금은 현실감이 없어서 그냥 무작정 제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리고 진짜로 못하면 또 자책하고. 이런 일도 해결 못하는 제가 너무 싫어요. 의지박약에... 약해 빠져 가지고. "

 고요한 골목길 구석에 새소리와 나의 작은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동안 내 속에만 갇혀 있던 말들이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세상으로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제가 너무 싫어서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도 날 못 봤으면 좋겠고, 밥도 먹기가 싫고 씻기도 싫고 나 자신에게 뭔가 좋은 걸 베풀기가 싫어요.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하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최대한 불행해지기를 바랐으니 사실을 실패하기를 바랐는지도 몰라요. 무엇보다 괴로운 건... 이게 다 제 탓이라는 거예요. 다 제 탓이에요. 제가 못한 탓. 제가 죄인이에요... 나를 이겨내지 못한 패배자이죠.

극복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문제에 부딪혀야만 하는데 못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속에서 '넌 못해'라고 강력하게 말하네요. 우물에 갇혀 그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하늘만 바라보는 것 같아요. 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시야가 가려진 것 같은... 누가 절 좀 여기서 끄집어 내줬으면 좋겠어요. 눈 가리고 귀 막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못할 거 같은 기분이에요. 어디로 나가야 할지... 다시 일어나고 싶은데 힘이 없어요. 제가 보는 세상만 왜곡된 듯 답답해요. "

 

 남자는 말이 없었다. 앉은자리에서 찬기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햇살은 눈부시고 따듯했다. 햇살을 받고 있는 붉은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잠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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