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밤마다 넋을 놓고 '72시간 소개팅'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남녀가 3일 동안 함께 데이트를 하는 유튜브 채널이다. 여행이 끝나고 나면 두 사람이 함께 출국할지, 아니면 따로 갈지 각자 정하게 된다. 인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영상미, 여행이 주는 설렘, 그리고 선남선녀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까지.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재료들로 만든 음식 같다. 히트공식을 있는 대로 때려 넣은 이 방송은 이미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을 탄지 3달이 지났다고 하는데, 현직 아저씨인 나는 이제야 알게 됐다.
(월급쟁이 치고는) 아쉬운 게 없을 만큼 여러 나라를 가봤다고 자부하지만, 애석하게도 로맨스에 대한 주제에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다. 여행지에서 사랑을 느낀 적이 없다. 누군가를 홀릴 정도로 빼어난 외모도, 능숙한 화술도, 낯선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대범함도 없는 나는 그저 남들의 달달한 이야기에 침을 흘릴 뿐이다. 여행 로맨스라니, 부럽다. 생각만 해도 그 어떤 경험보다 강렬하다. 여행이 연결해 준 사랑이 인생을 바꾼 경우도 봤다. 제주 올레 1코스에서 만났던 카페 '카페제주동네' 사장님 내외는 올레길을 걷다가 만난 사이였다고 한다. 남들은 놀러 와서 꽁냥꽁냥 연애를 할 동안 난 무슨 변죽만 쳐댄 건가. 이성을 보지 않고 풍경만 보고 걷다가 허벅지만 단련되었나. 뭐, 건강이라도 챙겼으니 다행인 건가.
로맨스 빠진 내 흑백 여행에 대한 변명을 적어보자면, 나는 워어언래 금사빠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소이다. 20대 때도 소위 '첫눈에 반한 적'이 없다. 사랑꾼 여러분, 본인 스타일의 이성을 만나면 진짜로 종소리가 울리고 보자마자 심장이 콩닥콩닥 뛰나요? 온통 그녀 생각뿐 일상이 마비되나요? 진짜 궁금해서 묻습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려면 어느 정도 정신적 교감이 필요하다. 그래서 애당초 여행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나에게는 불가능하다.
한 가지 핑계를 더 대보자면, 대학교에서 여학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전공을 택한 탓이다. 여자가 80% 이상이고 남학생은 많아야 20%에 불과했기에, 여자들과 교류하는 게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성적인 감정이 없어도 남녀가 같이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2인 조별과제도 해야 하고, 시간표가 비슷하면 같이 밥도 먹어야 할 것 아닌가. 내외를 하면 졸업을 못하는데? 이러한 이력 탓에 오해를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다.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여성분과 늦은 시간에 영화를 보고 광안리에서 식사를 했다. 영화 시간이 애매했고, 기왕 사람을 만났으니 최소한 밥은 먹고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됐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심야남녀 상황 자체를 그린라이트로 생각하셨나 보다. 슬며시 해변에서 팔짱을 끼길래, 머리가 아파서 집에 가고 싶다고 택시를 잡아 도망쳐 버렸다. 그때 이후로는 학교 밖에서 만나는 이성과는 가급적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서로 욕설을 자제할 정도로 격식을 차리는 관계의 이성과는 둘이서 밤술을 마시지 않기로 다짐했다.
관광지에서 사랑을 나눈 적은 없으나, 사랑의 시작점이 된 적은 있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를 주최한 적이 있다. 조교 선생님의 명을 받고 함께 행사를 준비하던 후배가 있었는데, 약속도 자주 빠지고 말투도 부정적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이 일을 해야 하니 교류를 하긴 하지만, 일 밖의 공간에서는 절대 어울리고 싶지 않은 친구였다. 신입생 환영행사를 마치고 각 방에서 삼삼오오 술게임이 벌어질 무렵, 무사히 공식 행사가 끝나 긴장이 풀린 나와 그 친구는 조용한 숲 속으로 맥주를 들고 이동했다. 우리 과 학생들이 있던 장소는 송정 해수욕장. 학교 밖에서 그녀를 보니 또 평소에 할 수 없었던 모습들을 봤다. 그녀도 개인적인 일이 많아서 학교일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들었다. 그동안 서로 가지고 있던 앙금을 풀었다. 오해를 풀고 나니,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구린 친구는 아니구나' 싶었다. 괜히 혼자 미워한 게 미안해서 더 잘해주고 싶었다. 그 뒤로 같이 밥을 먹는 일이 많아졌다. 영화를 보러 갔다. 여행을 갔다. 호감이 스며들었다. 그녀가 여자친구가 된 건 그 '신입생 환영회 숲 속 회담'부터 12년이 지난 뒤였다. 누군가는 여행지에서 며칠 만에 짝을 만드는데, 난 띠동갑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상에서 변화를 주고 싶다면 새로운 장소에 날 던져보는 것도 좋다. 아무래도 같은 장소에서는 비슷한 행태를 반복하게 되니깐 말이다. 혹시 모르지. 낯선 그곳에서 훗날 내 사람이 될 인연을 만날지도. 여행의 도착지가 새로운 인연의 시작지일지도.
https://youtu.be/TDQKq_zRjcI? si=eA1 y8 Myj0 Ai2 UUQK
내가 가장 좋아하는 후쿠오카 편이다. 영상 속 남자인 현구는 요즘 내 추구미다. 현구의 패션을 벤치마킹 하고 싶으나, 그보다 머리가 크고 팔다리가 짧아서 탈락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