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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식 커피, 원효대사 해골물

카이로, 이집트

by 김룰루

이게 말이 돼? 40도가 넘어가는 날씨에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커피만 마시는 게? 무릎까지 오는 패딩을 입고도 얼음 섞은 아메리카노를 쪽쪽 빠는 K-직장인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 커피는 기호식품이기도 하지만, 졸린 오후 집중력을 지켜주는 자양강장제의 역할도 있다. 차가운 커피를 마셔야 잠이 깬다고!


이집트의 음식들은 대체로 내 입에 안 맞았는데, 가장 힘들었던 건 커피의 취향이었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커피라고 하면 응당 커피가루를 넣고 물에 팔팔 끓인 터키식 커피이고, 아메리카노와 전혀 다른 풍미를 지닌 이 커피는 나에게 곤란함을 안겨주었다.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특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려면 스타벅스, 코스타커피 같은 해외 프랜차이즈 매장을 가야 했고, 가격은 로컬 카페의 3배쯤 했다.


이집트 근현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카페리체에 갔다. 예술가들의 사교모임 장소였던 지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나기브 마후즈, 전 대통령 Gamal Abdel Nasser도 이 카페를 좋아했다고 한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지식인들이 비밀결사단체를 만들고 비밀리에 활동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카페가 되었다. 그래서 비교적 여러 종류의 커피가 있었으나, 가장 많은 주문이 있다는 터키식 커피를 주문했다. 유서 깊은 카페라고 해서 맛이 다를까 했는데, 역시나 내가 실망했던 그 맛 그대로다. 맹숭맹숭한 와중에 커피가루는 오지게도 씹힌다. 건더기를 최대한 바닥으로 가라앉히고 윗 물만 마셔본다. 행여나 침전물이 위로 떠오를까봐 커피잔을 조심히 들고 홀짝홀짝 마신다.


30분쯤 자리에서 책을 읽었나? 가게에 들어온 한 여성이 내 앞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테이블을 조심스레 똑똑 두드린다. 나는 시선을 책에서 그녀로 옮긴다. 이내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그리스인이라고 한다. 그녀의 외면이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 어린 눈빛, 가지런히 길러낸 금발, 주근깨가 박힌 하얀 피부, 밀짚모자, 하늘하늘거리는 원피스까지. 온몸으로 지중해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커피 어때요? 맛있어요?"

"터키식 커피인데요. 한국에서는 아메리카노를 주로 마시는지라, 제 입맛에 맞지는 않네요. 커피가루가 너무 많이 씹혀서 불편해요."


내 혹평에 조금 놀란 그녀. 황당하게 나와 같은 커피를 주문한다. 그럴 거면 왜 나한테 물어본 거람.


그리스에서 온 묘령의 여인은 커피를 두 모금 마시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에게 말했다.


"오, 이 씹히는 가루는 원두가 아니에요. 카다멈이라는 향신료예요. 커피가 상당히 Flavor 하군요!"


향에 취한 그녀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세상에. 나에게는 기분 나빠지는 음료가 누군가에게는 웃음을 주는 선물이라니!


원효대사 해골물이 생각났다. 실체를 모르고 마셨을 때는 꿀맛이었던 물이, 낮에는 구역질을 하게 만드는 것.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린다. 내가 마신 그 터키식 커피도 그랬다. 맛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누가 채점하느냐에 따라 점수가 바뀌었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직장인의 법칙이 깨지고 있다. 승진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생각을 바꾸고 있다. 얼마 전 유튜브 '민음사 TV'에 올라왔던 고민사연이다. '회사에서 팀장 제안을 받았어요. 어떡하죠? 저는 리더자리가 부담스러워요. 그저 시키는 일 하면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요.'라는 사연이었다. 이 분만의 고민이 아닌 게, 요즘 리더자리를 서로 마다하는 현상이 많다고 한다. 보직장의 권력, 회사원의 꽃인 임원, 무언가 창피한 만년 과장. 이런 생각들도 유효하지 않다.


리더 자리는 거부한다… 팀장은 절대 되기 싫은 당신에게 [. txt]


여행을 할수록, 특히 이집트처럼 전혀 다른 문화권에 갈수록, 내 잣대가 얼마나 주관적인지 느낀다. 여행하면서 엄두를 내지 못했던 로컬 카페에 가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길에 작은 의자 몇 개 두고 카페라고 주장하는 떴다 다방이다. 터키식 커피를 주문해 본다. 여전히 내 입에는 안 맞지만, 그래도 전과는 기분이 다르다. 현지 사람들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체험하는 기분이 드니, 향신료가 매력적인 거 같기도 하다. 나의 혀란, 기분이란, 이토록 줏대가 없다. 그러니 나에게 어떤 불행이 와도 마냥 좌절하지 말 것. 반대로 행운이 오더라도 겸손할 것! 어떤 사건이든 생각하니 나름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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