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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수진 Aug 19. 2022

이탈리아 대학은 말하기 싸움

 

맨날 봐도 새로운 아카데믹한 언어들 사이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체류 허가증을 갱신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던 나날들이었다.

중세 시대의 건축물과 유물들을 시대순에 따라 분석하고 머리에 집어넣는 일은 아직 이탈리아어에 완벽 흡수되지 않는 나에게 큰 과제로 다가왔고 그럴수록 더 책상에 앉아 책을 물고 늘어졌다. 반드시 이 시험을 통과하리라는 다짐을 단단히 굳혔다.


이탈리아 대학에서 시험 유형을 결정하는 것은 교수다. 과 상관없이 교수의 재량에 따라 말하기 시험을 볼 수도 쓰기 혹은 선다형 문제 풀이 시험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풀이만 가능할 줄 알았던 수학조차도 말하기로 시험을 보는 이탈리아 대학.

입학 전 작문이 부담되었던 나는 말하기 시험이 낫다고 생각을 했다. 오히려 좋아. 어떻게든 아는 것들을 머릿속에서 꺼내놓기만 하면 되겠지 싶었던 것이다. 공부한 것들을 입 밖으로 내놓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주관식 시험은 글로써 흔적이 남으니 완벽하지 않은 이탈리아어 작문 실력을 들키기 싫었던 이유도 있었다.



한국에서처럼 공부하던 방법 그대로 공부를 시작했다.

일단 시험 범위에 드는 책을 모두 읽고 요점정리를 해서 외우기를 시작했다. 중요한 문화재들을 글과 사진을 매치하며 연도와 이름을 달달 외우며 머릿속에 하나씩 쌓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을 매일같이 진행했고 이 모든 행동들은 순전히 체류허가증 갱신을 위한 목적뿐이었다. 외우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고 마침내 툭 치면 이름과 해당 연도, 특징을 말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아, 나 이제 체류증 갱신할 수 있겠다!' 싶은 만족스러운 수준까지 공부를 했더랬다.


시간은 흘러 그렇게 시험날이 되었다.

나 포함 대여섯 명 남짓하는 아이들이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교수님의 연구실 안에서 본인의 순서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학생들이 대기하고 있는 바로 옆 테이블에서 시험을 보는 터라 차례를 기다리며 요점 정리를 읽을 틈이 생기지 않았다. 눈은 필기를 보고 있지만 귀는 옆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험에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슨 문제가 나오는지 염탐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공부한 것을 점검받는 시간일 뿐인데 입은 바짝 마르고 손과 다리는 덜덜 떨렸다. 무슨 문제가 나오는지 듣다 보니 대부분이 내가 알던 문제들이어서 안심하던 차에 나의 순서가 다가왔다.


본인 확인을    문제를 위해 책을 펼친 교수님은 처음 보는 작품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셨다. 아는  없으니 대답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엔 그저 이게 대체 뭐야?라는 생각만 가득했지 이에 관련된 어떠한 작품들도, 설명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머릿속은 하얗게 안개가  상태였다.

앞서 시험 본 친구들에게 물어봤던 문제들은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왜 하필 내 차례에서 이런 문제를 내시는 건지 원망이 앞섰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은 닫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작품의 사진만 바라보고 있자 교수님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나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모르겠다고 답하자 교수님은 첫 문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지 조금은 더 쉬운 문제를 내겠다며 첸니노 첸니니 Cennino Cennini에 대해 말해보라고 했다. 화가 겸 첫 이탈리아 미술 저술가였던 첸니노 첸니니. 이 날 이후 그의 이름은 잊을 수 없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첸니노 첸니니는 화가고.. 미술에 대한 글도 썼는데요.."라고 말문을 떼자 교수님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에 대해 알고 있던 전부였다.

"그리고..?"  말해보라는 교수님의 말에 부응하지 못한  다시 입을 닫아버렸다. 지금도 잊을  없는  순간은 시간상  초만 지났겠지만 체감상으론 1 보다   순간이었다. 그렇게 입을 닫고 있으니 마지막 질문이라면서 다른 책을 펼치며 교수님은 말했다.

" 작품에 대해 설명해 볼래요?"


머릿속의 정보들이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알긴 아는데 확실하게 안다고   없는 상태.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앞서  문제나 침묵으로 보냈기에 이번 마지막 문제는 어떻게든 말로  포장해야겠다 싶어 일단 입을 열었다.

"상아로 만든 장신구이고.." 다음 말을 잇기까지 또다시 수많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양각 기법으로 만들어졌고..  정도에 따라 표현에 그림자를 넣기도 하고.." 애써 쥐어짜듯 말하니 교수님은 "그래서 언제 만들어진 거죠?"라고 물었다.

"주제로 보아 초기 그리스도교로 추정되.. 인물의 옷차림을 보니 성경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하는  같은데.." 자신감이 한껏 결여된 나의 말을 끝으로 교수님은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나는 교수님의  말을 마지막으로 연구실에서 나왔다.

"이 과목은 미술사예요. 학생이 한 건 미학적인 접근이에요. 잘못됐다는 게 아니고 접근 방법이 다른 것이니 미술사에 기반한 공부를 해서 다시 오세요. 4월에 시험이 있을 예정이에요."


1학년 1학기  시험을 호기롭게 말아먹고 건물을 나와 바라본 태양은 얄밉게도 밝고 따듯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겠냐고 애써 나를 다독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그래도 해본  어디냐며 경험으로 만족하자 생각하다 집에 도착하니 문득 체류허가증 생각이 났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탈리아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결론적으론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나와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떤 문제가 나올지 모르니 과목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하는 말하기 시험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감이 오지 않을 만큼 여태껏 해온 시험들과는 너무 다른 성격의 시험이었고 어쩌면 못하는  당연했다. 그렇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싫었나 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어떻게든 여기서 학업과 생활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엉엉 울면서 어떤 시험이 비교적 통과하기 쉬울까 싶어 들었던 과목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반토막짜리 학점의 과목을 보게 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시험은 전공과목이 아닌지라 읽어야 할 책이 한 권뿐이었다. 책 한 권이 비록 400페이지 짜리였지만 검색하면 한국어로도 자료가 많이 나오는 과목이었던지라 다시 용기의 불씨가 하나씩 일어났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충분했기에.

다음 6월 중세사 시험까지 4개월이 남아있었다.




아마존으로 책을 배송받아 손에 쥐어본 400페이지짜리의 중세사 서적은 나에게 이번만큼은 반드시 나를 소화해야  것이다라는 선전포고를 하는 듯했다.

빠른 속도는 보장할 수 없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일 조금씩 읽어나가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세계사 관심도 없던 내가 중세사를 공부하게 되다니 역시 인간의 삶이란   없음의 연속이구나.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던 겨울의 토리노가 따가운 햇빛으로 가득 찰 즈음에는 나의 읽기 속도에 가속이 붙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이탈리아어 사전을 곁에 두어야만 읽기가 가능했지만 글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를 파악하는데 무리 없는 수준으로 올라선 것이다.

주중 5일간, 적어도 5시간 정도는 책상에 무조건 앉아 읽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고 약속대로 하다 보니 속도는 저절로 늘게 되었다.


공부의 방법은 전과 동일했지만 이번 시험에서는 추가적으로 하나를 더 했다. 바로 말하기 연습.

책의 목차만 보고 그 내용들을 계속해서 말로 꺼내보는 연습으로 어쩌면 나는 외우기보다 말하기 스킬이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에 담고 있는 것들을 소화시켜 내 것으로 말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책의 모든 목차의 내용을 말하고 나면 두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다. 그 두 시간이 점점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질수록 힐끔 거리며 커닝하는 빈도수도 줄어들었고 그렇게 시험 당일이 다가왔다.


이름이 호명되고 서른 명 남짓한 아이들을 뒤로한 채 교수님 옆으로 가 앉으니 시험이 시작되었다. 강의실에서 1:1로 진행되는 시험은 정작 시험 당락의 두려움보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실시간으로 내 시험을 듣고 있을 거라는 상황을 만듦으로써 더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괜찮아. 난 외국인이니까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지 않아도 돼'라고 수없이 되뇌며 입을 열었고 10분 남짓한 시간이 지나자 시험이 끝나 있었다. 유창하게 말하진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혼자서 했던 말하기 연습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많이 더듬거리고 생각하느라 이따금씩 침묵의 시간도 보냈지만 교수님은 차분히 기다려주며 말문이 트이도록 대화를 이끌어내 주었다.


점수에 상관없이 체류허가증을 연장할 수 있다는 기쁨과 내 힘으로 시험을 통과했다는 자랑스러운 마음에 그만 짧고 굵은 웃음소리를 내어버렸다. 마침내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으로 나를 인도했다.

다리를 방방 거리며 "이탈리아에서 통과한 제 첫 시험이에요!"라고 말하니 교수님은 "잘했어요! 수고했어요. 악수할까요?" 라며 웃음을 지어 보였고 시험을 통과한 후 바라본 하늘은 유독 더 파랗고 경쾌하게 느껴졌다.


이제 막 한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성취가 주는 기쁨과 이탈리아에 1년을 더 있을 수 있다는 안정감은 그날 내내 콧노래가 절로 나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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