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 첫날 두 개의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는 순간 당장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수업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이제 막 수저 하나로 꿈적도 않는 벽을 파기 시작한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시작은 했지만 언제 도달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시작이었기에 최대한 빨리 시작해야만 했다.
학과 도서관에 가서 사서에게 어느 교수님의 무슨 수업 자료를 원한다고 하면 usb에 교보재를 넣어 준다라는 것을 들었던지라 한국에서 가져온 usb를 가져와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그렇게 중세 미술사와 근대 미술사 교보재들이 내 손에 들어왔다.
저녁을 먹고 책상에 앉아 맨 첫 번째 파일을 열었다. 글이 빼곡했지만 그림도 빼곡했다. 하지만 미술사 공부의 좋은 점(?)은 아무리 두꺼운 책일지라도 반은 그림이라는 것 아닐까. 하지만 이때는 몰랐다. 그 많은 이미지들은 내 머릿속에 넣어야 하는 것들임을.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까짓것 해보자!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용기가 절로 샘솟았다. 큰 어려움 없이 어학원에서 하라는 대로 이탈리아어 공부를 했더니 실력이 오른 것처럼 대학 공부도 어느 정도만 하면 될 줄 알았던 것. 다들 하는 공부 나라고 못하겠느냐 싶기도 했다. 이런 것이 바로 근자감일까.
웬걸, 첫 페이지를 읽어 나가는데 머릿속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읽으면서 동시에 이해하며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 없이 그저 글자만 읽으니 깡통 겉핥기만 열심히 한 셈이었다. 읽기야 빠르게 읽지만 무슨 내용인지 전혀 파악을 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었다.
한 단어를 지나면 한 단어가 또 막혔다. 단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사전에서 찾아와 그 뜻을 모두 알게 되면 그제야 단어들을 형용사, 전치사들과 조합해 대충 문장의 의도를 파악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단어와 뜻 짜 맞추기로 오히려 퍼즐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 보니 글의 요지를 파악할 수 없어 그저 뜬구름 잡기의 연속이었다.
책에 쓰인 언어는 내가 알던 이탈리아어가 아니었다.
이 아카데믹한 단어들은 어학원에서 알려준 적이 없었다. 아니,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면서도 만난 적이 없었던 생 초면이었다.
이 pdf 만이라도!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한 페이지만이라도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적어도 최소한의 희망 내지 용기를 느끼고 싶었다.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비록 오늘은 허덕이지만 이 시작으로 끝끝내 졸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의 불씨라도 본다면 그날 저녁은 더할 나위 없이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날 A4 용지 반 페이지를 읽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읽어야 할 분량은 몇 백 페이지가 넘고 책도 두 권이나 더 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운에 둘러싸여 있었다. 한 페이지라도 이해한 게 어디냐고 자신을 위로했다.
수업을 하루 종일 듣고 집에 돌아와 단어-뜻 맞추기를 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전 8시부터 시작하는 수업은 오후쯤 끝났고 부지런히 집에 돌아와 정신을 차려보면 창 밖은 벌써 캄캄해져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포근했던 공기도 쌀쌀해져 갔고 강의실이 익숙해질 무렵 종강이 다가왔다. 많은 양은 하지 못해도 최소 한 장씩이라도 매일 하자던 나와의 약속이 무색하게 여전히 전공서적 읽는 것이 버거웠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1학년 1학기 중세 미술사와 근대 미술사 수업은 아는 척만 하다가 끝이 났다.
3개월 동안 난 뭘 한 거지.
그리고 이제 곧 시험인데 어쩐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