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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D 미식가 Aug 24. 2023

[미술의 맛] 내 피를 뽑아 나를 표현한다-신체예술

인간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성'이 무너질 때 '신체'는 등장한다.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2022

미술계도 코로나19로 인한 신체에 대한 탐구 증가

지난 2022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제59회 베니스(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열렸다. 격년제로 개최되는 비엔날레는 애초 2021년 개최됐어야 했는데, 전 세계에 닥친 코로나19로 한해 늦춰져 3년 만에 개최된 것이다. 1895년 시작되어 격년제로 개최되어 온 세계 최고 권위의 베니스 비엔날레는 ‘미술 올림픽’으로 불린다.


국가별로 국가관을 운영하면서 전시를 선보이고, 전시기간 동안 심사를 통해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시상하기 때문에 '미술 올림픽'으로 불린다. 특히 베니스 비엔날레는 참가 나라마다 개성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세계가 추구하는 미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전시행사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영향으로 인류의 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까닭으로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지구환경변화에 따른 돌연변이와 신체와 기계에 대한 전시작품이 유난히 많았다는 점이다. 이는 인류가 근세기에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19로 인해 몸에 대한 각성과 반성이 미술의 형태로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몸에 대한 인간의 미적 관심은 원시부족 시대의 타투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인체의 미적 신체성을 강조하는 행위로 이어져왔다. 그 행위가 미술이라는 장르로 인정받기 훨씬 전부터 인간의 신체에 대한 미적 탐구는 계속되어 왔다. 우리의 몸에 대한 관심이 예술의 형태로 나타난 것을 '신체예술'이라 한다.  오늘 미술이야기는 신체예술에 대한 것이다.


현대미술에서 신체성을 강조하는 미술운동은 왜 일어났을까?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


미술에서 신체성은 신체의 힘이나 순환작용, 근육의 쓰임, 피부의 역할 등 신체의 성질을 말하는데, 이를 탐구하는 것이 미술운동으로 일어난 것이다. 몸의 현상학을 주장하는 메를로 퐁티는 <몸틀(le corpspropre)>개념을 통해 신체성을 강조하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리고 프랑스 미학자 질베르 뒤랑은 <상징적 상상력>에서 "이성과 합리를 지향하는 서구의 근대 문화가 포화상태가 되었을 때, 신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균형을 잡는다"라고 주장했다.


즉 서구사회가 기술발전과 전쟁 같은 사회변화를 거치면서 인간의 절대 가치로 추앙하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해 반성과 함께 의심을 하게 되는 시기에 , 신체성 탐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아래 1960~70년대의 미술가들은 우리가 흔히 ‘행위예술’이라고 말하는 해프닝과 퍼포먼스를 비롯해, 신체를 이용한 각종 뉴미디어 아트에 이르기까지 신체에 대한 미술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의 신체 미술에서는 마치 ‘천연의 재료(raw material)’를 사용하듯이 신체를 미디어(매체)로 사용했다.


우리의 신체, 즉 몸이 미술의 재료가 된 것이다. 신체가 캔버스가 되거나,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되는 것이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했던 맥루한의 주장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몸은 우리의 욕망 혹은 우리의 의지들 나타내고 , 그러한 신체들은 현재의 시대와 문화가 새겨지는 매체가 된다는 것이다.

브루스 나우먼, 분수로서의 자화상,1966

1960~70년대에 신체를 미술의 중요한 매체로 도입한 작가로 미국의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을 먼저 꼽을 수 있다. 그는 신체를 매개로 퍼포먼스를 하거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네온사인을 미술의 오브제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위의 사진 작품은 그의 ‘분수로서의 자화상’이다.

자신이 마치 분수가 된 것처럼 입에서 물을 뿜어내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이 보면 한낱 우스워 보이는 행위이지만, 그는 자신의 몸을 마치 캔버스처럼 미술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퐁티가 말한 '몸틀' 개념을 미술에 도입해 신체를 강조하는 미술을 선보였다. 브루스 나우먼은 이러한 신체성을 강조하는 작품을 통해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황금사자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자신의 '피'로 자화상을 만들다

다음은 약간 엽기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국작가 마크 퀸(Marc Quinn)의 자화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크퀸, Self,1991

위의 이미지는 영국 yBa(young British artists: 1980년대 말 이후 나타난 영국의 젊은 미술가들을 지칭)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마크 퀸의 <셀프, self>다. 보통의 조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 엽기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인 마크 퀸 본인의 자화상이다. 즉 본인의 얼굴을 조각의 형태처럼 만든 것이다.


왜 엽기적이라고?

바로 자신의 혈액으로 만든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정기간 자신의 혈액을 주사기로 뽑아서 모은 다음, 약 4.5리터(ℓ)의 피를 사용해 자신의 자화상 <셀프>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고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액체상태의 혈액을 냉동장비를 이용해 조각품의 형태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회화작품의 경우 작가의 자화상은 자신의 이목구비나 성격을 나타내는 특징을 가장 잘 묘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마크 퀸의 경우는 자신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방법으로 자신의 혈액을 미술의 재료로 사용한 것이다.


자신의 신체 유전적인 요소가 내포된 신체 일부인 혈액을 이용해 자신의 자화상을 표현함으로써 작품에서 신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새롭게 탄생하는 신체

다음은 더 나아가서 미술에 도입된 신체의 증폭된 기능을 향한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야기다.

우리의 신체는 영구적이거나 완전하지가 않다. 우리는 치아가 기능하지 못하면 임플란트로 보완하고, 무릎 관절이 나쁘면 인공관절로 대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언뜻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이런 시술들이 인간을 사이보그화하는 초보적인 단계라고 하면 독자들은 수긍할 수 있을까?


이처럼 현대인들은 유례없는 기술 혁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 넘쳐나는 기술 혁신은 인간과 기계 사이, 인공과 자연적인 것 사이, 탄생하는 것과 제작되는 것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기술적 발전은 인간의 신체성에 변화를 가져오는 한편, 인체는 기계와의 결합을 통해 확장되는 시대가 됐다. 신체는 새롭게 탄생했고, 그와 동시에 퐁티의 <몸틀> 개념처럼 상호 의존성과 상호텍스트성, 상호 보완성의 특징을 띄게 되었다.

이런 기술과 인간의 사이보그적인 결합을 다양한 방법으로 미술에 도입한 작가는 호주의 스텔락(Stelarc)이다. 위의 이미지는 그의 대표 작품인 <제3의 손>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작가는 자신의 두 손이 아닌 <제3의 손>을 사용해 글씨를 쓰고 있다. 독자들은 로봇 팔을 사용해 글씨를 쓰는 모습에 눈길이 가겠지만, 이런 시도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과는 다른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다.


 바로 우리의 신체가 우리의 이성과 상호작용하지 않은 채 손이 따로 움직이고 행위를 행한다는 점이다. 이성이 아닌 신체가 신체를 통제하며 상호 작용하는 것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 작품에서 '제3의 손'은 이성이 작용하는 의지의 손이 아니다. 그의 복근으로부터 전달된 근육자극장치를 이용해 사이보그적인 손이 글자를 쓰도록 퍼포먼스를 행하고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성과 증폭된 신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신체는 해체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통해 증폭되고 보완됨으로써 다윈의 진화론적 세계관마저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코로나19 이후 '몸'에 대한 관심 증폭될 것

'이성의 시대'를 넘어서 '신체의 시대'는 지금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인스타그램이나 sns에서 자신의 몸을 가감 없이 나타내고 대중은 이를 소통하고 유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중세 유럽에 불어 닥친 흑사병으로 종교중심의 문화 대신 르네상스라는 인간중심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듯이 지금 우리에게 불어 닥쳤던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의 삶과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신체의 대한 관심증폭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술계에서도 신체에 대한 관심과 기계의 결합 같은 '증폭된 신체성'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미술가들의 활동도 늘어날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또는 이런 것들도 미술일까 하는 의문과 회의가 들 수 있겠지만 아방가르드적인 전위부대의 예술 활동은 분명 미래를 향한 인간 탐험의 흔적이 될 것이다.


 미술의 주제가 우리 생활의 일부에서 비롯되고 상호 영향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관점을 가진다면 '신체 미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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