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다 떠나고, 남아있는 것들에 대하여

시절인연 /프롤로그

by 수련

"당신은 붙잡고 있는 인연이 있나요, 아니면 보내야 할 인연이 있나요? "

영원할 것 같은 G는 떠났고, 남아 있는 것은 빛을 잃은 어둠 속 설득할 수 없는 공백이었다.

봄이 오면 연둣빛 들판이 예전처럼 펼쳐졌지만, 그 풍경은 더 이상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여름 바다의 파도는 모래 위에 남았던 발자국을 아무 미련 없이 지워버렸고, 가을의 공원에서는 늘 함께하던 그림자 하나가 빠져 있었다. 같이 걷던 따뜻한 겨울의 골목길은 차가운 바람만 옷깃을 여미게 한다. 계절은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약속 안에서 자꾸만 길을 잃었다.

이별의 쓴맛을 알고 나서야 그것이 특별한 인연이었음을 안다.

마치 오래 쓰던 문손잡이가 어느 날 갑자기 헛돌 듯, 손에 남은 감각으로 그 부재를 알아차린다. 있을 때는 의식하지 못했고,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텅 빈자리를 가늠한다.


젊은 날의 나는 만남이란 것이 내 선택으로 유지되는 줄 알았다. 마음만 다하면 사람도 시간도 붙들 수 있다고 믿었다. 관계가 흔들릴수록 그것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려 애썼다. 헤어짐은 실패라고 생각했고, 떠나는 이는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때가 다했다’는 말은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처럼 들렸다.

시간은 다그치지 않고, 설명도 하지 않는다. 다만 속절없이 지나가며 내가 붙들고 있던 생각들을 하나씩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몇 번의 계절을 건너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봄에 뿌려야지 한겨울의 땅에 심으면 싹이 트지 않는다.’라는 것은 시절과 인연이 맞아야 꽃을 피울 수 있다.


인연은 사람의 의지보다 시절의 힘을 더 많이 닮아 있다. 가까웠던 사람이 멀어지고, 다시는 만날 것 같지 않았던 얼굴이 오래 남는 것도 그 때문이다.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머물렀던 시간이 아직 내 안에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른 해 넘게 손목을 감싸던 시계, 몇 번의 이사를 따라다니며 창가를 지켜온 화분 하나도 같은 시간을 건너온 존재이다. 말이 없어서 오래 곁에 있었고, 요구하지 않아서 쉽게 헤어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보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 보낼 시절이 오지 않았던 인연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시절의 문제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때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았고, 아무리 붙들어도 시절인연이 안되면 떠나갔다. 그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나는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제는 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라는 말은 사람뿐 아니라 명예·돈·권력 등 인생의 흐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만날 때는 귀하게 대하고, 떠날 때는 이유를 묻지 않는 것. 그것이 오래 살아온 사람만이 알게 되는 인연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새로운 연재글 '시절인연'은 머물다 간 사람에 대한 이야기, 아직 곁에 있는 존재에 대한 조심스러운 기록을 엮을 것이다. 이미 정리했으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시절에 대한 미련함까지를 글로 풀어내고 싶다. 오늘도 새로운 인연 앞에서 나는 쉽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


우리는 왜 떠난 뒤에야 인연이었음을 알게 되는가.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지금 어떤 인연의 시절을 살고 계신가요?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