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처럼 시작된 만남

미순이 있던 자리

by 수련

우리 인연은 돌이켜보면, 늘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소리에서 시작되었다.

한 달에 한 번, 노인 복지관 부엌으로 갔다. 아홉 시 반 앞치마를 두르면

어르신 한 분은 벌써 나물을 다듬고 계셨고, 우리는 말없이 점심준비를 나누어 맡았다.


초등학교 어머니회라는 인연으로 만났고, 학교 녹색 어머니 봉사활동을 하였다.

학교장 추천으로 복지관 급식봉사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열었다.

그 결정이 이렇게 오랜 인연으로 긴 시간을 함께할 줄은 몰랐다.


그때 모임의 막내였던 A는 30대 초반으로 체격은 야리야리하고 하얀 피부가 도자기처럼 반짝이는 모습으로 가장 어렸지만, 처음 보는 커다란 국솥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쇠 수세미를 들고 큰솥을 박박 씻어내던 모습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겁 없이 늠름했다. 왕언니 B는 원색의 빨강 바지와 초록의 재킷을 입는 화려한 패션을 좋아하고 팔찌와 반지를 여러 개 장착하는 패션 스타로 개성이 강한 인물이다.

B는 복지관 부엌에서 가장 중심 구실을 했다. 된장찌개는 유난히 깊은 맛이 났고, 대량의 나물을 삶아내는 손놀림엔 망설임이 없었다. 칼질도 어찌나 반듯한지, 같은 크기로 썰린 재료들이 도마 위에 가지런히 놓이면 음식은 맛을 보기 전부터 깊은 맛이 보장되는 정갈한 음식으로 탄생된다.


밥상은 늘 H의 손을 거치며 보기 좋은 세팅으로 마무리되었다. H는 조용한 성격으로 차분하며 말수가 적고 손끝이 야무진 종갓집 맏며느리다. 그리고 언제나 하이힐을 포기 못 하는 C가 있었다. 복지관 오는 날에도 빨간 구두를 신고 나타나 시멘트 바닥의 부엌에서조차 자기만의 리듬을 잃지 않던 멋쟁이. 앞치마 아래로 반짝이던 구두를 볼 때마다 우리는 감탄했다. 봉사현장에도, 삶에도 정해진 모양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C는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볼이 통통하고 동그란 눈으로 동안 미가 최고인 미순이 있었다.

미순은 덤벙대는 성격으로 늘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접시든, 국그릇이든, 도시락 가방이든—

복지관 부엌에서 ‘쨍그랑’하는 소리가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미순을 쳐다본다.

이상하게도 그 소리 뒤에는 언제나 웃음이 따라왔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릇 하나가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졌고 부엌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 노인회장님과 몇 분은 큰소리로 뭐라 하셨다. 눈치를 보며 주방일을 할 때 그 침묵을 깨는 건 미순이였다.

“아이고, 접시가 내 손보다 먼저 가버렸네.”

그 말에 우리는 웃었고, 그날 이후 부엌은 조금 덜 긴장된 공간이 되었다.

거동이 불편해 식당에 못 오는 어르신을 위해 도시락 배달도 한다. 미순은 욕심을 부리고 많이 들고 가다 꽈당 넘어졌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미순은 늘 먼저 몸을 털고 도시락부터 살폈다.

“괜찮아, 도시락통은 살아 있어.”

그 말 한마디는 몸을 다치지 않아 천만다행으로 다시 웃을 수 있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면서 큰소리로 호통치던 복지관 어르신이 하나둘 보이지 않게 되었고, 다시 부르지 못할 이름이 늘어갔다. 그럴 때면 미순은 괜히 그릇을 더 조심히 옮겨도 결국 하나쯤은 떨어뜨렸다.

그 소리에 우리는 놀랐다가 곧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차라리 어르신들과의 이별로 인한 먹먹함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십오 년의 봉사를 마치던 날, 미순은 아무것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부엌은 지나치게 조용했고 그 정적이 낯설었다.

“오늘은 사고 없이 얌전하네.” 그러자 미순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떨어뜨릴 것도 다 떨어뜨렸나 봐.”


올해로 만난 지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미순은 여전히 덤벙대며 명랑한 일상을 살고 있다.

모임 날짜를 헷갈려 엉뚱한 날에 전화하고, 버스를 잘못 타 전혀 다른 동네에서 내렸다고 태연하게 연락한다.

우리는 먼저 걱정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늘 밝다.

“괜찮아, 금방 찾아갈게.”

미순에게는 귀한 자랑거리인 예쁜 손녀가 하나 생겼다. 모이면 앉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넘기며 설명을 덧붙인다. 그 작은 얼굴을 바라보는 미순의 표정에는 젊은 날 복지관 부엌에서 환하게 웃던 웃음이 온기를 더한 채 남아 있다. 무릎이 예전 같지 않다며 절뚝거리긴 해도 30년 지기 모임에 절대 빠질 수 없다고 한다. "만남은 인연이고, 관계는 노력이다."


이제는 골다공증에 넘어질까 봐 서두르지 않지만, 우리가 손을 내밀면 여전히 웃으며 손을 잡는다.

사람을 오래 남게 하는 인연은 어려운 일을 함께 나누며 넘어졌던 순간,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내밀어 준 손 하나가 아닐까. 돌아보면 우리는 남남으로 만나 복지관 밥을 지으며 친구가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온정을 나누며 넘어지는 순간마다 서로를 붙잡으며 빛나던 시절 함께한 오랜 친구로 남았다.


미순이 있던 자리에는 늘 소란스러운 소리와 웃음이 함께 있었고, 그 덕분에 우리의 시간은 미숙하지만 단단해지고 조금 더 유연해진다. ‘쨍그랑’하고 깨지던 그 소리가, 이제는 우리 삶을 지탱해 온 시간의 증거처럼 남아 있다. 앞으로의 시간도 길을 잘못 들고, 약속을 헷갈리고, 삶의 어디쯤에서 잠시 넘어질 때 먼저 웃어주며 그 웃음 덕분에 조금 덜 아픈 쪽으로 안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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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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