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이 맺어준 인연
삶이 지치고 힘들 때 깊은 심연으로 빠질 즈음 정확히 울리는 전화가 있다.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저 “잘 있느냐”는 한마디로 마음속 그늘을 정확히 짚어내는 전화다. 자비심 언니 전화가 그랬다.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여행 중이거나, 집 안에 앉아 생각의 매듭을 풀지 못하는 날, 그런 날 전화는 울렸다. 그것은 텔레파시가 아니라, 오래 닦아온 마음의 감각이 상대의 결을 알아보는 일이었다.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안부를 묻는 그의 목소리는 늘 차분했다. 그 차분함이 오히려 깊게 파고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알아차린다. 내 삶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이 먼저 닿는 인연은 이유가 없다.
법명이 자비심인 언니를 처음 만난 곳은 용주사였다. 초파일을 며칠 앞둔 절 마당에는 연분홍의 연등이 흔들리고, 고목의 연둣빛 잎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세웠다는 절은 ‘효행 본찰’이라는 이름으로 절 입구에 있는 홍살문이 늠름하며 고요하고 웅장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수원으로 이사하고 처음 방문하여 종무소에 들려 가족의 연등을 켜고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광목으로 만든 회색 절복 바지에 하얀 누빔 조끼를 입고 머리는 틀어 올려 목뒤로 단정하게 핀으로 고정한 인상 좋은 보살이 말없이 옆에 앉았다. 그는 보온병을 꺼내 종이컵에 차를 따랐다. 집에서 끓인 생강차라며 건넨 한 잔이, 처음 만난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단번에 덜어냈다. 생강의 톡 쏘는 맛 뒤에 남는 꿀의 단맛처럼, 그 사람의 인상도 오래도록 남았다.
그날 이후 매달 초하루 사시(오전 10시) 예불에 나가기 시작했고, 그의 권유로 신도회 활동에 참여했다. 불교대학에서 기초 교리를 배우고, 성지순례를 다니고, 교무스님과 신도들과 군부대에 짜장면 나눔 봉사를 나가며 나의 일상은 서서히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신앙을 갖는 일 보다, 주변을 돌아보며 삶의 태도가 바뀌는 과정이었다. 나눔과 베풂을 그는 말로 가르치지 않았다. 이름대로 행동으로 자비심을 보여 주었다. 나눔은 그의 삶에서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일상의 호흡이었다.
친정어머니가 병상에 계실 때 보살은 몇몇 신도들과 함께 병실을 찾았다. 손수 끓인 잣죽을 들고 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오래 앉아 있어 주기도 여러 번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는 장례 기간 내내 자리를 지켰고, 사십구재 또한 칠 재동 안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혈연보다 자주, 더 깊게 곁을 지켜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휘청거리는 나를 끝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다. 고아가 되었다는 외로움에 깊이 가라앉은 날에는 직접 운전하며 공기 좋은 곳으로 데려가 말없이 걷게 해 주었다. 그 침묵의 시간 덕분에 충분히 애도 기간을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승가대학에 입학한다며 연락을 했다. 당황스럽고 놀랍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수행자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다만 주변과 가족들 보살핌으로 시절 인연이 뒤늦게 따라왔을 뿐이다. 노년은 삶을 정리하는 시기라 말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때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누구로 살아왔는가.”
“이제는 무엇으로 남고 싶은가.” 진정한 자신을 찾으며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를 묻는 시간이다. 그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며 수행이 기쁨이고 좋아서 하는 일은 그대로 충만된 삶이라 불편하지 않고 행복하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 목소리로만 안부를 나눈다. 수계 받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수정처럼 단정하고 맑다. 아직 몇 해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 시간은 아마도 세상과 거리를 두는 시간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를 가장 깊이 재정립하는 시간이리라.
사찰 마당에 걸린 연등은 모두 같은 날 불이 밝혀지지만, 어떤 불빛은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는다. 늦게 켜진 연등 이어서일까.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쉽게 꺼지지 않는 그 불빛은, 삶의 끝자락에서야 비로소 더 단단해진 마음을 닮았다.
일흔셋에 시작한 공부는 아직 진행 중이다. 늦지 않았다. 오히려 삶이 충분히 무르익은 시간에만 가능한 선택이었다. 오늘도 그가 그리울 때면 절 마당 나무의자를 떠올린다. 그곳에서 우연히 맺어진 인연을 반추하며, 그가 정진하고 있을 하늘 아래 어딘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한다. 보살님의 늦은 연등이, 바람 속에서도 끝내 꺼지지 않고 환하게 빛을 내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