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석상자
동네공원을 함께 산책하는 친구가 울컥하며 성토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꼬마가 "할머니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난생처음 듣는 "할머니"라는 소리에 나 말고 뒤에 누가 있나 돌아보았으나 본인한테 인사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냐며 울먹인다.
그녀는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나름대로 외모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다. 동네에 나갈 때도 화장을 하고 젊게 살려고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다. 다섯 살짜리 눈에 쉰이 훨씬 넘은 어른이 할머니로 보이는 건 당연한 일. 아이의 시선은 때로 너무도 솔직하다. 나는 "아기 친할머니가 친구 또래인가 보다"라며 아직 예쁘다고 괜찮다고 등을 두드리며 웃어 보였다. 오늘의 소소한 일기 한 토막이다.
일과를 마치면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의 크고 작은 일들을 생각하고 정리하면서 일기를 쓴다. 일기는 나의 삶을 담아 두는 그릇이다. 아이들이 초등 시절 받아쓰기를 100점 받았다고 뛰어와서 엄마에게 숨을 헐떡거리며 내밀던 시험지를 보며 좋아하던 날, 어머니가 하늘의 별이 되어 많이 울었던 날, 자동차 사고로 발을 다쳐서 억울했던 일, 이웃사촌인 친구가 멀리 이사하는 날, 커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친구가 멀어져서 속상한 일 등 일상의 많은 순간까지 품어주는 투박한 질그릇이다. 지나간 일기를 펼칠 때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마음이 차분해지고, 가끔은 울먹이며 지나간 나와 손을 맞잡는다.
결혼 후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다. 산모 수첩과 함께 시작된 기록. 의사의 조언, 태동의 미세한 변화, 설렘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어느 날은 하루에 2~3페이지를 차지하며 많은 이야기가 종이에 스며들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 일기를 보면 품속에 아기를 안고 있던 순간의 느낌을 생생히 불러온다.
출산 후,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이 매일 다르고 신기하고 기적처럼 다가왔다. 신생아 때 아기를 목욕시킨 후 뽀얀 살결 위에 톡톡 뿌리던 베이비파우더가 너무 많이 발라져 몸 전체가 찹쌀떡처럼 하얀 가루를 쓰고 있는 모습, 모빌을 바라보며 배냇짓으로 미소를 짓는 일을, 나를 알아보고 웃는다고 착각하던 일, 세상 밖 첫나들이로 103일째 되는 날 이모 댁에 다녀왔다는 얘기. 모든 순간이 일기장과 사진첩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나 둘째가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며 첫째보다 둘째 육아 기록이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스물아홉에 두 아이를 혼자 돌보면서 몸이 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종일 움직여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아파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는 얘기가 일기장에 보인다. 둘째가 10살쯤 되었을 때 앨범 속 사진 옆 짤막한 코멘트를 보며 "누나는 글이 긴데 왜 내건 짧아?"라며 투정을 부렸다.
육아와 살림에 지쳐가던 20대 후반. 허약한 체력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일기장에는 저혈압과 빈혈로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몇 군데 보인다. 시댁의 잦은 행사에 아이 둘을 데리고 먼 길을 나섰던 고단함, 그때는 아이 둘을 데리고 기저귀 가방 들고 길에서 택시를 타려면 안 태워주고 그냥 지나치던 시절이었다. 합승이 허용되던 시절에 왜냐하면 합승을 못 하므로 승차 거부를 당했다. 어찌할 수가 없어 전철을 타면 전철에서 답답하다고 울고 떼를 써 두세 정거장마다 내려, 의자에 앉아 잠시 달래고 다시 타고 갔다는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회사 일에 몰두하던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생긴 외로움과 서운함도 일기장은 묵묵히 받아주었다. 어린이 놀이터에서 아빠와 뛰노는 또래 아이들을 부러워하던 우리 아이들의 눈빛은, 나의 속마음을 더욱 외롭게 흔들었다. 그런 날이면 아이들을 재운 뒤 일기장을 펴고, 한참 동안 서럽고 고단한 마음을 꾹꾹 눌러썼다.
S 사에 다니는 남편은 회사 일이 바쁘다며 아침 8시 반에 출근하면 밤 12쯤이나 새벽 1~2시에 퇴근했다. 그때는 휴대전화기도 없던 때라 걱정하며 귀가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놀아주기는커녕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잠을 잔다, 피곤해서인지 아이들에게 시끄럽다고 짜증을 내는 남편을 쉬게 하려고 아이 둘을 데리고 놀이터로 나가서 시간을 보낸다.
사내 커플로 연애 2년을 하고 결혼했다. 그 당시는 결혼하면 무조건 여자는 퇴사를 해야 했다. 결혼하면서 전업주부로 많이 바뀐 일상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총각 때와 같은 생활을 한다고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리며 결혼하면 마냥 행복할 줄로 생각했는데 힘든 일상이라며 죄 없는 일기장에 매일 장문으로 호소하고 훌쩍이면서 감정을 다독이고 마음의 짐을 덜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살 차이 나는 31살의 남자는 아빠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동료들과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았던 철이 없었던 것 사람 같다.
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내가 겪어온 모든 날의 마음속 푸념도, 새 생명을 출산했던 신비스러운 감동도, 살림하면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온 삶의 흔적들이 모여 나의 역사가 된다. 이삿짐 속에서 사라진 몇 권을 제외하고 10권이 넘는 일기장이 내 보물상자에 보관되어 있다. 또 하나 일기의 좋은 점은 집안의 경조사 내용 및 지인의 축의금 내용이 지면 한쪽에 기록이 되어 있어 필요할 때 참고 자료가 되어 유용하다.
최근 나의 보물상자를 열었다. 먼지 쌓인 20대 후반에 일기를 꺼내어 보았다. 젊은 시절 나를 되돌아보고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며 그땐 그랬구나! 어떻게 버티고 살아왔는지…. 지난 시절의 일기장은 나의 애틋한 친구이다. 앞으로도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가득 담을 것이다, 많은 계절이 바뀐 후 꺼내어 읽어보는 일기장에는 어떤 사유가 있을까? 첫 손주가 태어나서 아가의 예쁜 모습들을 적어놓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