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년은 다 미친년이다.”
언젠가 엄마가 내게 한 말이다. 엄마는 딸에게 참 주옥같은 어록을 많이 남겼는데, 이 말도 잊히지 않는 말이다. 나중에 묘비명으로 쓰고 싶다.
이 말을 하는 엄마 속내는 뻔하다. 밭에 농사일은 많은데, 다락방에 처박혀 글 쓴다는 이유로 내다보지 않으니, 화가 난 것이다. 그땐 갱년기가 다 되도록 변변한 글 하나 쓰지 못하는 내 신세가 슬퍼 눈물도 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시골에 내려온 지 몇 년째 변변한 명함도 없는 주제에, 글을 쓴다며 일손을 거들지 않으니 해괴할 만했다.
그 후에도 ‘젊은 년이 돈 안 벌고 집에 있으면, 동네 할머니들이 흉본다.’라며 엄마는 한결같은 욕망을 드러냈다. 돈을 벌던가, 일을 돕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다. 오십이 다 돼가는 마당에 ‘젊은 년’ 소리 듣는 건 좋지만, 엄마의 욕망을 순순히 실현시켜 주긴 싫었다.
살다 보니 그런 날도 있다. 엄마의 미친년 기대에 부응하는 작은 사건이 있었다. 단편 동화가 어린이 문학잡지에 실렸다. 잡지에 글이 실리면 등단으로 쳐준다는데, 또 누군가는 그걸 ‘정식 등단’은 아니라고 했다. 정식 등단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동화는 잡지에 실렸고, 나는 소정의 원고료를 받았다. 그걸로 엄마 밥을 사드렸다. 잡지가 왔을 때 엄마는 내가 쓴 동화를 앉은자리에서 다 읽고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냐며 칭찬을 했다.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본 칭찬인가! 이 나이에도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해 가을 중편 동화를 공모한 모 신문사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상금은 300만 원이나 됐다. 다락방에서 중편 동화를 쓰고 있을 때, 부모는 가을 뙤약볕에 콩을 수확하고 있었다. 나는 콩을 베자는 아버지 부탁도, 깨를 베자는 엄마 부탁도 거절하고 미친년처럼 다락방에 처박혀 동화를 썼다.
신문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먼저 아버지에게 당선 소식을 전했다.
“그거 내가 일 안 시켜서 당선된 거야!”
아버지는 기뻐하시면서도 본인을 치켜세우는 일만은 빼놓지 않았다.
‘진작 일을 안 시켰으면 더 일찍 등단했을 텐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외출했던 엄마가 돌아왔다. 소식을 전했더니, 얘기 들었다는 말뿐이다. 엄마 반응이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딸이 진짜 미친년이 될지 몰라 걱정스러운 걸까?
코로나로 시상식은 열리지 않았다. 꽃다발을 든 사진은 남겼어야 했는데, 상금은 통장으로 상패는 택배 아저씨께 받았다.
‘정식 등단’이란 걸 했지만 여전히 나는 갱년기 습작생이다.
미친년 소리를 들어가며 쓴 원고는 매번 공모전에서 탈락했고, 출판사도 거절 답장뿐이다.
미친년이 되는 길은 아직 멀었다. 이러다 글 쓰는 미친년이 아닌, 그냥 미친년이 될 거 같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올해 봄과 여름이 무심히 흘러갔다.
가을은 어떻게든 엉덩이를 붙이고, 글 쓰는 미친년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