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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오 Sep 19. 2024

배추와 고라니

“남편이 일찍 죽어 나를 고생시키네.”

며칠 전 엄마가 배추밭 풀을 뽑으며 한 말이다. 듣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이 무슨 말인가! 누군가 이 말을 듣는다면 남편이 50대쯤 죽어서 고생을 한 줄 알 텐데, 아버지는 50대도 60대도 아닌, 자그마치 79세에 돌아가셨다. 팔순잔치 못한 건 아쉬운 일이지만, 젊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내가 고생이다’도 아니고, ‘나를 고생시킨다’는 화법에서 의도를 눈치챘다. 자신을 불쌍한 처지에 놓아야 누구라도 일을 거들 테니까.      


밭고랑의 풀은 어마어마했다. 장맛비와 폭염에 정글이 됐다. 풀들은 서로 엉키고 단단히 뿌리를 내려 잡아당겨도 꿈쩍 안 했다. 배추를 심으려면 고랑의 풀을 뽑아야 한다. 호미로 땅속에 박힌 뿌리를 캤더니, 그제야 풀이 뽑혔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땀이 줄줄 흘렀다. 폭염문자도 오는데,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풀을 못 이기면 농사는 끝이다.’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늘 예초기를 돌리고, 제초제를 뿌리며, 밭과 집의 풀을 관리하셨던 아버지. 아버지 부재가 실감 났다. 이따 오후에 뽑자고 해도 엄마는 말을 듣지 않는다.      

“배추를 사 먹고 말지….” 

나는 호미를 집어던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찬물에 샤워를 하니 살 것 같다. 에어컨을 틀고 냉커피를 마셨다. 손에는 호미 대신 책을 집어 들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엄마가 내려오지 않았다. 또 폭염 경보 문자가 울렸다.  찜찜함을 못 이기고,  냉커피를 들고 밭으로 갔다. 엄마는 여태 밭고랑에 주저앉아 풀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빨리 나와. 초상 두 번 치르게 할래!”
나는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돌아보는 엄마 얼굴에 땀이 범벅이다. 

엄마에게 냉커피를 주고 뽑아놓은 풀을 손수레에 실었다. 그제야 엄마는 한숨을 돌리고 일어섰다. 

“그러다 죽는다고! 아빠 빨리 만나고 싶어?” 

이렇게 다그치자, 엄마가 밭에서 나왔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소나기에 주위 열기가 떨어졌다. 커피를 마신 엄마가 시원하다며 웃었다.      


결국 비를 맞으며 검은 비닐이 씌워진 밭에 구멍을 뚫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뚫은 구멍에 배추 모종을 놓았다. 빗속에 쉬던 엄마도 일어나서 모종을 심기 시작했다. 여린 배추 모종이 밭에 가지런히 심겼다. 다리를 구부리기 불편한 엄마는 허리를 숙였다 폈다 하는 동작을 반복하며 모종을 반듯하게 심었다. 밭에 200여 개의 모종이 꽉 들어찼다. 그제야 엄마 얼굴이 좋아졌다. 

모종을 다 심고 나니, 비가 그쳤다. 비를 맞으며 심었으니, 모종에 물을 줄 필요도 없고 딱 안성맞춤이다. 배추가 잘 자라야 김장도하고 일 년 농사를 마무리할 수 있다.   

   

며칠 후, 밭에 가니 가득했던 배추 모종이 싹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범인은 고라니다. 밤에 내려온 고라니가 야들야들한 배추 모종을 다 뜯어먹은 것이다. 비까지 맞으며 심은 배춘데, 라니야, 너무 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전 같으면 펄쩍 뛸 일인데, 화가 나지 않았다. 너도 먹어야 살겠지.     

엄마는 밭을 보며 속상해했다. 그리고 다시 심고 그물망을 치자고 했다. 

그냥 사 먹고 말지,라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시골 일은 끝이 없다. 끝났다고 생각해서 돌아서면 다시 시작이다.     

며칠 후, 엄마는 모종을 사 와 다시 심었다. 4일 만에 고라니에게 또 뜯겼다. 엄마가 "망할 놈의 고라니!" 라며 욕을 했다.


과연 올해 심은 배추로 김장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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