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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인석 Aug 11. 2018

철학의 부재에 관하여

열심히는 살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다소 무거운 느낌의 제목으로 시작한다. 이번 글은 마케팅이나 비즈니스적인 관점이 아닌 정말 '나'에 대한 성찰을 해보고자 글을 쓴다. 그럼에도 1인 기업 매거진에 글을 발행하는 것은 아마도 이 과정이 회사로부터 독립하기 전이나 후에 꼭 겪어야 할 것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입추가 지났다.

무더운 날씨 탓에 아직은 실감 나지 않지만, 입추가 지나버렸다. 백 년 만의 더위 속 흐르는 땀에 젖기 일쑤인데 무슨 가을이냐 싶어도, 시간은 차박차박 제 갈 길을 간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곧 가을은 오고, 금방 또 한 해가 다 갔네- 하며 뻔한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하다. 2018년도 가득 차오르고 만 것이다.


해마다 글로 다짐하고 몇 가지 계획을 세우기를 수차례, 지금의 나는 그중에 얼마를 지켰는가를 돌이켜보니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엉덩이를 쉽게 뗄 수 없을 만큼 밀려드는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달렸던 나는, 달력을 보고 다시금 또 한숨을 쉰다. 벌써 8월이란 말인가.


아주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어째서 나는 항상 같은 감정에 빠지게 되는지 이것도 참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항상 제자리라고 느끼는가. 이번만큼은 반드시 이것을 도려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박한 마음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바쁘다는 핑계로 독서는 거리가 먼 (부끄러운) 나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래도 책을 찾곤 한다. 급히 든 책은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이었다. 공감과 질문과 반성을 반복하며, 문득 나에게 인생의 철학이 있는가? 하고 묻게 되었다. 답이 쉽지 않다. 내가 좌우명으로 여겼던 단어는 갑자기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조금 더 원초적으로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흐릿하다. 내 꿈이란 것은 뭘까. 바로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게다가 내 나이가 서른여섯이라는 사실에 멈칫-하게 된다.


회사를 떠나면 부침을 겪는다는 많은 인생 선배들의 조언과는 달리, 나는 정말  몹시도 바빴다. 벌써 퇴사 이후 3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쉰 날을 꼽기가 어려울 만큼 일이 몰려들었다. 분명 대단한 복이다. 최근 2개월여 동안은 정말 잠을 극도로 아껴가면서 일을 쳐냈는데, 정산을 하고 보니 제법 많이 벌었다. 계속 회사를 다녔다면 절대로 볼 수 없을 숫자임은 틀림없는데, 어째서인지 흥이 나질 않고 되려 전전긍긍한 마음이 든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계속 코너에 몰아넣는 걸까.



철학의 부재, 자발적 노예


나는 대학 때부터 좌우명을 <열정적 행동가>라고 떠들곤 했다. 톰 피터스의 책 프롤로그에 있던 구절이 너무 감명 깊어, 그때부터 스스로를 그리 부르기로 했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인데 이것은 '철학'이 아니다. 열정적 행동가는 중요한 이유들에 대한 성찰보다는, 그냥 의사결정의 우선적 기준 같은 것이었다. 일단 재지 말고 움직이자! 정도라고 해야 할까. 가운데 코어는 비어둔 채로 열정적 행동가로서 살다 보니 이 꼴이 나고 만 것은 아닐지.


지금 내 일과 삶 속에 어떤 철학을 세울 수 있느냐는 모르겠다. 그러나 앞뒤 안 가리는 열정적 행동가이기는 했으므로, 나는 의뢰받는 모든 일을 열심히도 수주하고 어떻게든 해냈다.  그러나 기준 없이 닥치는 대로 덤벼든 열정적 행동가적 자세는 간섭이 싫어 회사를 떠난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큰 셀프 구속이었다. 딱히 거절할 철학 따위는 없었으므로, 열정적 행동가라면 행동해야 하므로. 나는 내 사업 자신에게 고용된 노예와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니 틈만 나면 밀려드는 공허함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1인 기업가에게 필요한 철학은 무엇일까


가장 큰 싸움은 '불안 제어'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의 몇몇 프리랜서들, 1인 기업가들 중 일부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사업을 해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잘 풀리지 않아 고민인 사람들도 있다. 하나같이 이야기한다. 일이 많아서 고민보다는 없어서 고민이 훨씬 고통스럽다. 그러니 달려라 열정적 행동가여!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딱히 인생의 우선순위가 뚜렷치 않은 상황에서 내게 남은 것은 '책임과 의무' 이기에 나는 열심히 달렸다. 그 책임과 의무라는 것은 사랑하는 내 아내와 딸이 먹고사는 문제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이다. 그 외에 또렷한 기준이 없었기에, 거절할 철학과 비전이 없다면 일은 가리지 않고 해야 하는 게 맞다고 여겼던 것 같다. 꿈을 향한 질주라기 보단 현실적 불안 방어. 사실 방어를 해야 할 상황을 맞이해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거창한 퇴사의 변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내 경우 정리된 퇴사의 계획이 있었던 상태는 아니었다. 단지 자신 있는 것은 내 전문성으로도 충분히 홀로 생존은 가능하다는 자신감 정도였다. 계획을 차곡차곡 세워나가면 될 것이다. 몇 가지의 옵션도 머릿속엔 분명 있었다. 그러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바빠지고 나니, 그 모든 것들이 여태껏 밀려 이 시점까지 오고 만 것이다. 단단한 기준과 철학이 없으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


아내는 어느덧 정말 미치도록 일을 하고 달려 나가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다. 일을 반드시 끊고 일단 며칠은 쉬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시간을 꼭 가지라고 내 등을 밀어주었다. 나는 독하게 마음먹고 일을 거절하기 시작했고(정말 웃기는, 배부른 소리다 다시 생각해도) 거짓말처럼 엊그제 걸려있던 프로젝트들이 끝이 났다. 지금 나는 완벽한 자유의 상태가 되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차례로 답을 적어보기로 했다. 아직 다 칸을 채우지 못했고, 일부의 질문은 답의 영역이 겹치기도 한다. 그래도 다 써보고자 고심해서 정리한 질문들을 함께 띄워본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 꼭 먼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나는 무엇에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가?

나는 못해봐서 아쉬운 건 무엇인가?

내가 가진 기술, 재주를 명확히 정리하면?

나는 무엇으로, 어떻게 정의되고 싶은가?

나에게 가장 즐거운 놀이는 무엇인가?

큰돈을 이미 벌었다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3개월간 소득이 없다면 가족의 생계는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항상 해야지, 하고 미뤄두었던 마음의 숙제는 무엇인가?

기회는 무엇일까. 어떻게 올라탈 수 있을까?

6개월 후에 죽는 게 틀림없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질문들을 적고 보니, 이 얼마나 유치한가. 벌써 10년 너머 진작에 막 열정과 꿈을 부르짖던 자기개발서에서나 볼 법한 질문들 아닌가. 그러나 닥치는 대로 열심히 살기만 해서는 쉽게 답이 안 나오는 질문들이기도 하다. 오히려 '열심히 부딪히는' 것이 인생이었던 나에게는, 모든 것에 기회가 있어 보이고, 모든 것에 어느 정도의 호감이 있었고, 또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경험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뿌옇게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 싶다.



아마도 철학이란,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무언가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위의 질문을 다 답하고 교집합을 찾아낼 즈음, 아마도 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한 기준과 순서를 갖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생기고 나면 비로소 책임과 의무에 의해서만 해야 했던 일들을 때에 따라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이것을 '일을 덜하고 놀고 싶다'는 관점에서 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내 일을 더 세련되게, 더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꼭 해야 할 일들을 선택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단기적 성과에 대한 중독, 불안 회피에 대한 합리화를 넘어선 도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1인 기업가는 누구도 미래와 비전을 위해 대신 투자해 주는 법이 없다. 모든 결정은 본인에게 달려있는 만큼, 명확한 인생의 기준을 갖는다면 리스크를 선택하고 돌파하는 것 또한 한결 쉬워질 것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한걸음 더 성장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계속 회사를 다녔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나는 퇴사를 하여 독립 사업을 해 나가면서 아주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직장 생활의 종말은 반드시 다가올 미래이다. 유예하지 않고 먼저 선택했고, 열심히도 부딪히며 살았다. 아주 조금이라도 먼저 이런 고민들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두 성장의 일면으로, 그저 기쁘게 생각하기로 했다.


퇴사, 회사 독립 이후에 대한 글은 보통 밥벌이를 어찌할까에 대한 글, 어떻게 안전펜스를 칠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글이 많다.  나도 전에 그런 글을 썼다. 그러나 지금 이 글에서, 너무 바쁠 때 쳐낼 기준 세우기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다소 우습다. 조금은 거만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또렷한 재주를 가지고 열심히 파고들면, 그 시간이 어느 정도 누적되고 나면 일이 없을까 봐 걱정하기보다는 넘쳐서 힘든 시점은 생각보다 빨리 올 것이다. 그때 빠른 탈출을 위해, 더 큰 성취를 위해서는 반드시 또렷한 기준과 철학을 필요로 한다는 것. 나는 이제야 정리하는 이 화두를 독자분들께 꼭 전하고 싶었다. 음- 일단 며칠은 더 멍 때리기로. 하하.




고인석

FMCG 소비재 회사에서 브랜드 마케팅, 완구 제조사에서 B2C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하다 퇴사, 현재는 프레젠테이션 전문 컨설팅 및 디자인 기업 <원포인트>를 운영하고 있다. 일과 삶과 육아의 공존에 대한 실천적 고찰을 하고 있는 1인 기업가이자 보편의 딸바보 아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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