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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인석 Apr 12. 2018

워라밸 말고, 워라일체.

3년 차 1인 기업가의 새로운(?) 행복론

어느덧 내가 회사로부터 독립한 지 무려 2년 하고도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놀랍다. 퇴사를 하고 나면 삶에 더 여유가 있으리라는 기대가 조금은 있었는데, 정말 한치의 거짓도 보탬 없이 나는 매일매일이 너무나 바빴다. 가끔 이곳 브런치에 글을 쓸 때마다  "이제 정말 쉴 거야!"를 외마디로 외쳤지만, 그럴 새가 없었다. 주변의 프리랜서들, 1인 기업가들은 일이 끊기지 않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이것도 참 말 못 할 고민이었다. 급기야 일에 빠져 한참을 책상 앞에 앉아있던 어느 날,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우주 공간에 붕 뜬 것만 같이 소리들이 울렸다. 배를 보니 살도 엄청 붙었고. 절대적으로 쉬어야겠다! 하는 생각에 위기감을 가지고 일을 잘라내기로 하였다. 무를 썰듯 추가 작업 의뢰를 밀어내고, 밀린 프로젝트들을 쳐나가다 보니 드디어 일의 끝이 보인다. 오늘은 간만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내 열정 터지는 시간들에 대해 짧게 회고하고자 한다.


정말 바빴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요즈음의 내 삶은 오직 '육아'와 '프레젠테이션' 이 두 가지의 단어로 압축된다. 눈을 뜨면 딸의 어린이집 등원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딸과 매일 함께하는 이 길은 나에게 매우 소중하다. 미팅이 오전에 잡히지 않는 한, 나는 딸이 늦잠을 자더라도 내가 어린이집을 데려다주고 있다. 가는 길에 사진도 한 장 찍고, 꽃도 보고, 술래잡기도 하고. 내가 계속 월급쟁이였다면 할 수 없을 가장 큰 행복이라 여기는 소중한 시간. 그렇게 아이를 등원시키고 일하러 자리에 앉으면 보통 오전 11시가 다 된다. 그때부터 나는 의뢰받은 프레젠테이션 프로젝트들을 일정에 맞춰 수행한다.


프로젝트의 유형은 정말 다양하다. 투자유치를 위한 IR 프레젠테이션부터, 제품소개서, 교육자료, 정부사업 입찰 PT, 회사 마케팅 기획안, 입점 제안서, 정부기관 대민 발표자료, 개인 포트폴리오 작업까지. 프레젠터블하게 어딘가에 보여줘야 할 모든 자료가 나의 작업 대상이다. 딱히 영업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데, 거래가 쌓여나가다 보니 소개로 연결되는 경우가 정말 많다. 심지어 너무 바쁜 나머지 만들어 두었던 홈페이지조차 리뉴얼 못하고 만료되어 사라졌음에도 어디선가 의뢰는 이어진다. 무튼간에 일은 끊임이 없고, 나는 매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만족하는 클라이언트들의 반응을 보는 일이 즐겁고, 다양한 시도로 내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경험 또한 즐겁다. 이렇게 일을 보통 오전 11시 즈음부터 오후 6시 반 정도까지 한다.


사무실은 자유롭다. 집에서, 카페에서,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어디서든 랩탑만 펴면 착!


저녁엔 다시 딸내미와 시간을 보낸다. 같이 저녁 먹고, 되도록 목욕도 함께 하고. 동화책도 읽고 하다 보면 밤 11시 즈음이 다 된다. 딸이 잠들고 나면 난 또 슬쩍 작업실 방으로 빠져나온다. 그렇게 또 2~3시까지는 일을 한다. 물리적으로 일하는 시간만 합해보면 사실 보통의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으나, 육아 타임이 앞뒤로 끼여 있어서 하루가 아주 꽉 차게 돌아간다.


누군가에게는 숨 막히는 시간표일 수 있겠지만 나는 딱히 부정적인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 일은 즐거웠고, 아이와 시간도 충분히 보낼 수 있어서 좋았으니. 다만 가끔 너무 몰려드는 일 때문에 극도로 잠을 줄여야 할 때가 힘들기는 하였다. 어찌 되었든 그러한 노력들은 월급쟁이 시절과는 달리 그대로 보상으로 이어졌으므로, 그 또한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었다.



원래 나는 워라밸이 좋은 직장인이었다.


요즈음 여기저기서 아주 많이 들리는 단어, 워라밸. Work and Life Balance. 나는 어느새 워커홀릭이 되어버린 것인지, 약간 이 단어에서 아쉬움? 같은 것을 느낀다. 내가 내 일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워라밸이라는 단어 속 "워"는 발음 그대로 "War"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도 회사를 다니던 때, 매일 신이 나서 출근을 했던 적은 딱히 없는 듯하다. 회사 생활에서도 소소한 재미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큰 감정의 흐름은 아-출근이라니!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월급 따박따박 주는 회사를 왜 그리도 따분히 여겼던가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온갖 부서들에 아쉬운 소리를 계속해가며 일을 이끌어야 했던 마케터로서의 업무 환경이 나에게 딱 맞는 옷이 아니었던 탓이 크다.(난 생각보다 정적인 성격이라) 일이 잘 안되면 안 되는대로 스트레스를 받고, 잘 되면 어차피 잘 돼도 내게 돌아오는 것도 없다는 공허감에 허탈했던 것도 같고. 그때 나에게 일(Work)은 전쟁(War)에 가까웠던 것 같기는 하다.


회사원 시절의 퇴근길. 내게 회사가 괴로운 공간만은 아니었다. 맡는 옷을 찾아 독립이 하고 싶었을 뿐, 그 자체를 싫어하진 않았다. 돌이켜보면 좋은 회사였다. 진심!


재직 당시는 아이도 없었기 때문에, 퇴근이 빠른 회사의 직원이었던 나는 제법 워라밸이 훌륭했다. 저녁엔 운동도 하고, TV도 실컷 보고, 친구랑 맥주를 마시거나, 아내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출퇴근 오가는 길엔 책도 볼 수 있었고, 밸런스의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삶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왜 그토록 회사를 떠나고 싶었을까.



일이 즐거워지니 생긴 변화


직장인이었던 나와 지금의 1인 기업인 나를 가르는 가장 큰 단어는 어쩌면 일보다도 육아일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 비교가 어렵다. 삶의 여백이 예전엔 '내'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아빠'이기에. 그래서 그냥 일에 대한 나의 자세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고 싶다.


회사 다닐 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의 일은 매우 매우 신나는 수준이다. 나의 전문성이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는 '썸띵'이 된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동기부여가 된다. 나를 찾아오는 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굉장히 클리어한 비즈니스 구조가 되면서 잡다한 외부 고려 요소들은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게 되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고, 그것을 통해 인정받는 재미 자체가 쏠쏠하다.


또 하나 큰 차이는 일이 곧 정직하게 수입으로 연결이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굉장히 리스키 한 부분이라 퇴사하면서도 가장 큰 고민의 축이긴 했지만, 역으로 잘 되면 되는대로 모두 수입이 된다는 것이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의 나는 일에 끊김이 없었고, 회사 다닐 때보다는 훨씬 나은 수입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일 자체가 War에서 다시  Work를 향해 자리를 잡아가게 됨에 따라, 일은 더 하고 싶은 존재로 변모하게 되었다. 나는 내 삶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게 되었고, 아빠로서 역할을 해야 할 시간을 빼두고 나머지는 사실상 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몸이 편하지는 않지만, 마음만은 외적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 것이다.



워라밸 말고, 워라일체


1인 기업가를 꿈꾸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흔히 말하는 워라밸을 원한다면 그냥 복지 좋고 칼퇴하는 회사를 가는 게 좋다. 그러나 회사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만의 무기로 살아가고 싶다면, 일과 삶이 뒤섞여 돌아가도 평온하거나 혹은 즐거울 수 있는 '워라일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교보문고에서 덕업일치를 검색하니 이 책이 나온다. 열심히 하는 놈보다 좋아서 하는 놈을 이길 수 없는 것이 진리.

경영 및 마케팅 관련 저술과 명강연을 쏟아내는 스콧 갤러웨이 교수가 2017년 칸 광고제에서 20대를 위한 조언 10가지를 이야기한 것이 있다. <10가지 조언 영상> 여기서 나는 가장 공감한 부분이 바로 워라밸은 환상이다. 라고 딱 잘라 말한 부분이다. 전문가라면 일은 삶이고, 삶은 일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숨 막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실제 전문영역을 구축하고 그것을 서비스하며 살아보니 정말 그리 되었고, 그것을 크게 스트레스받지 않으며 요령껏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생기게 되었다.


또 하나, 내가 이야기하는 '워라일체'는 최근 워라밸 만큼이나 자주 보이는 '덕업일치'와도 일맥상통한다. 덕업일치는 아주 긍정적인 해석과 희망적이고 부러운 목표로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덕질이라는 것 자체가 그 분야의 전문성이 깊어졌다는 것이고 시도 때도 없이 하기 때문에 덕질이라고 표현하지 않던가. 일도 사실 그리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잠깐 틈나면 앉아 일하고, 많으면 잠을 줄여서라도 하고픈 대상이 바로 일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1인 기업가로서의 탄탄한 생존을 약속할 수 있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1인 기업가는 간판 내리고 붙는 진짜 싸움이다


가끔이지만 퇴사를 이야기하는 이들 중 '절대 퇴사하면 안 될' 사람들이 보이곤 한다. 본인의 현재 직장과 본인을 혼돈하는 경우다. 그 큰 회사의 이름은 당신의 간판이지 능력이 아니다. 많은 거래업체들 앞에 어깨 펴고 앉아 주도적인 협상을 하고, 일을 추진하면서 얻은 자신감은 칭찬한다. 그러나 진실은 그 업체들이 당신의 협상력에 설득된 것이 아니라, 그 뒤의 간판의 위압감에 팔로워를 자청하여 일을 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친하게 지냈던 거래처 분들을 통해 무언가 쉽게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는 정말이지 0.1g도 하지 않는 게 좋다.


나 역시 대기업, 중견기업을 모두 다녀보고 퇴사를 했지만, 다행스럽게 잘 경계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이 '간판의 함정'이다. 회사 다닐 당시, 신제품 하나를 출시할 때 설득해야 하는 수많은 부서와 OEM공장, 패키지 납품 업체 등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이 명함, 이 자리 아니었으면 이렇게 일이 돌아가지도 않았으리라. 이 분들은 얼마나 힘들까. 이런 기본적인 자세가 있었던 것이 오히려 진짜 1인 기업 독립의 과정에서 약이 되었던 것 같다.


간판은 떨어지고, 내 능력만이 남은 그 상황에서 옛 인연에 기댈 생각을 하면 생존은 더 멀어진다고 본다. 나는 철저하게 옛 인연들에는 기대지 않았다. 95% 이상의 클라이언트는 모두 새롭게 연결된 곳들이다. 그들은 내가 어느 기업 출신인지 궁금하지 않다. 내가 하는 일과 포트폴리오만이 중요하다. 그렇게 철저하게 전문성으로만 승부를 보면 진짜 인정이 무엇인지 맛보게 되고, 그것은 꽤나 중독성 있는 매력이며, 스스로 워라일체를 자청하며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쉼은 중요하다.


뭔가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숨 막히는 이야기만 떠든 것 같은 생각에, 마지막으로 '쉼'을 꺼내본다. 쉼은 정말 중요하다. 워라밸이라는 단어 속을 다시 살펴, '삶(Life)'에서 '쉼'만 따로 떼어 콕 집고 싶다. 나는 매번 글을 쓸 때마다 쉼을 이야기했음에도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 심지어 과로 징후를 느낀 최근에서야 진짜 쉬어야겠다는 깨달음과 함께 이렇게 글로서 한 달간의 셀프 방학을 시작하려고 한다.


너무 꽉 차게만 돌아온 일상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 쉬려고 일을 다 쳐내고 한 달 즈음 방학을 가져볼 생각에 들뜨긴 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아이러니에 빠져있다. 조금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들 정도. 여러분은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래본다. 하하.


우선 책을 좀 볼 생각이고, 내 일을 환기시켜줄 만한 다양한 디자인들을 구경하러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딸과 여행을 좀 다녀올 생각이고, 손 놓고 아무것도 못했던 팟캐스트도 다시 기획하고. 잠시 이 뇌의 긴장을 풀어야겠다. 비로소 이 쉼까지 자기 방식을 잘 갖추는 것이 1인 기업의 완전한 자립이라고 생각하는데, 필자는 아직 이것이 너무 서툴다. 그러나 너무나도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다. 잘 쉬어보고 그 결과를 또 글로 전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주체적인 행복을 향하여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기준으로 나의 행복에 도달하고자 힘껏 달리기 시작한 지 만 2년이 지나 3년째다. 아직도 정확한 답은 모르겠고, 목표는 출렁인다. 희미하게 알 것 같은 느낌이 오는 건 버티는 힘, 생존의 노하우 정도. 에너지 과잉 소비에 반은 강제적 휴식을 선택하여 한 달 즈음의 시간을 계획하며, 나는 또 워라일체가 아닌 새로운 행복론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어떤 전문성을 가지고 서비스를 하는 독립을 꿈꾼다면 일과 삶의 분리보다는 짬뽕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마음이 편해질 거란 사실. 여유에 대한 갈망보다는 꿈과 성취를 위한 갈망으로 많은 이들의 도전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럼 나는 일단, 휴식!



고인석

FMCG 소비재 회사에서 브랜드 마케팅, 완구 제조사에서 B2C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하다 퇴사, 현재는 프레젠테이션 전문 컨설팅 및 디자인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일과 삶과 육아의 공존에 대한 실천적 고찰을 하고 있는 1인 기업이자 보편의 딸바보 아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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