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인석 Nov 13. 2018

늦은 밤, 제주에서

나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밤



제주에 오니 멍때리는 것이 너그럽게 용서가 된다.


늦은밤, 에피톤프로젝트 새앨범을 틀어놓고

맥주 한캔을 따고.노란 스탠드 조명을 켜놓고

덩그러니 앉아있자니

많은 것들을 그냥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나는 아직도 많은 것에 확신이 없다.

내가 가진 유일한 확신은

내 아내와 딸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 뿐.

내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뭣도 모르는 사람 치고는 너무 열심히 살았다.

눈 앞 작은 성취에 도취되고 중독되어 미친듯 일만 했다.

예전의 나는 참 스펙트럼이 넓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아마도 프리즘에 비춰보면 무지개빛이 아닌

회색이 가득 퍼져 나가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가끔 불안하고, 조바심이 난다.


쉼표가 되어준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다.

호텔이 아닌, 제주의 작은 집을 빌려 이 분위기,

공간, 공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

게다가 지금은 곡 순서가 바뀌어

바하마의 All I’ve ever known 이다.

기타 전주에서 이미 나는 손가락 끝이 멈춘다.


건너 방에는 아내와 딸이 새근새근 자고있다.

세상 평화로운 풍경이자,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은 하나의 장면이다.

가끔 발을 휙 돌리며 뒤척이는 딸의 잠버릇은

내 모든 평화이다.

사실 지켜야 할 것은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제주에서 돌아가면 나는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입술이 터져 구내염이 옮기고 옮아 아랫입술에 이르니

제주에서 흔해빠진 귤 하나를 제대로 먹지를 못한다. 하하

적어도 다급한 마음으로 일하던 자세는 버릴 수 있겠지.


모든 것이 너그럽고,

내 아내와 딸로 마음이 가득찬 밤이다.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해 첫날, 거짓말처럼  무지개다리를 건넌 강아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