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한국인인데 한국 영화는 안 좋아해?-(3)
글 특성상 소공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은 감상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해당 영화를 감상하시고 읽어주시면 더욱 깊이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소공녀>를 보고 있으면 자꾸 계산기를 떠올리게 된다.
월세, 담배, 위스키
셋 중 하나만 포기해도 삶은 훨씬 수월해질 텐데,
미소는 그 계산을 끝까지 따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계산은 한다.
다만 계산 결과를 존중하지 않는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꽤 무모한 삶의 방식이다.
이 영화는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는 가난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한 이야기다
미소는 돈이 없어서 불행한 사람이 아니다.
돈 때문에 자기 삶을 흥정하지 않겠다고
이미 결론을 내려버린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이 영화는 슬픈데 웃기고,
웃긴데 보고 나면 계속 마음이 불편하다.
미소의 선택은 하나같이 합리적이지 않다.
월세를 포기하고, 집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담배와 위스키를 지킨다.
보통 이런 선택 앞에서는
'그래도 현실을 생각해야지'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그 말은 언제나 옳고, 그래서 더 잔인하다.
우리는 너무 쉽게 현실이라는 말을 쓴다.
현실을 생각하라는 말은
대게 상대의 이상적인 삶을 정리해 달라는 요청에 가깝다.
조금만 참아라,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중에 다시 해도 된다.
그 말들 속에서 언제나 '지금'은 늘 삭제된다.
미소는 그 삭제를 거부한다.
지금 피우는 담배,
지금 마시는 위스키,
지금 만나는 사람들.
이 모든 걸 '나중'으로 미루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래서 미소의 선택은 멋있다기보다는
조금 고집스럽고, 조금 피곤하다.
그리고 그 점이 이 영화를 더 웃기게 만든다.
<소공녀>의 블랙코미디는
미소보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더 강하게 나온다.
미소의 삶을 걱정하는 사람들, 충고를 건네는 친구들,
'그래도 그렇게 살면 안 되지 않냐'라고 말하는 얼굴들
그들은 대부분 악의가 없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더 불편하다.
이상하게도 미소는 불행해 보이는데
비참해 보이지는 않는다.
반대로 주변 사람들은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자꾸 불안해 보인다.
미소의 선택이 틀렸다고 말하면서도,
그 선택을 끝까지 부정하지는 못하는 표정들
그 표정들이 이 영화의 진짜 블랙코미디다.
미소는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자기 삶을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삶 안에서
계산서에 적히지 않은 것들을
조용히, 끝까지 지킨다.
그 선택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는 영화가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난을 미화하지 않는다.
버티는 삶이 아릅답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가 너무 쉽게 정리해 버린 것들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소공녀>를 보고 있으면
자꾸 내 삶의 계산서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미 지워버린 항목들, 유지비가 든다는 이유로 없애버린 취향들,
언젠가 다시 적어보려다
'지금은 아니지'하고 접어둔 선택들
그때마다 나는 꽤 현실적인 판단을 해왔다.
그리고 그 판단들이 나를 얼마나 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도 안다.
이 영화가 씁쓸한 이유는 미소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 선택이 생각보다 너무 단순해서다.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고, 사람을 만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좋아하는 일
그게 이렇게까지 설명이 필요했던 일인가 싶어진다.
미소는 계산을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계산의 기준을 바꾼다
돈이 아니라 태도
안정이 아니라 존엄
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삶
그 기준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분명하다.
그래서 이 선택은 여전히 불편하고, 여전히 따라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묘하게 용기가 생긴다.
모든 걸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계산서에 없는 선택 하나쯤은
끝까지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게 인생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를 너무 빨리 설득하지도 않게는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소공녀>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미소를 보여준다.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가능성을
물론 그 가능성은
여전히 비싸고, 불편하고, 비합리적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좋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사치가
사실은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그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선택 하나였다는 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