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유도시 착각으로 멍청비용 + 불법체류자 예약

by Bora

여행을 많이 다니다 보면 익숙한 일일수록 긴장이 풀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 어이없는 실수가 심심찮게 터진다.


이번에 유럽으로 가는 여행을 앞두고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폴란드 항공(LOT)을 예약했다. 바르샤바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새벽에 프랑크푸르트행으로 갈아타는 일정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폴란드 항공이니까 당연히 바르샤바에서 자겠지’라고 생각하고 하루 동안 바르샤바에서 찾아다닐 장소까지 미리 찾아놨다.


그런데 인천공항에 도착해 체크인 데스크를 찾으려고 전광판을 올려다본 순간, 당황스러운 상황이 전개됐다.


'바르샤바, 바르샤바.... 도대체 바르샤바가 어디 있지?'

바르샤바행 항공편이 없다!

어떻게 된 거야? 얼른 항공권을 열어본다.

으악! 행선지가 부다페스트로 찍혀 있다.

'엥? 바르샤바행이 아니라 부다페스트행? 부다페스트 경유였단 말이야?'

돌아오는 건 바르샤바 경유 맞는데 가는 건 부다페스트 경유였다.

어디로 비행을 하는지 기본적인 사항을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모바일 탑승권을 받은 후에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으니 내가 제정신이 아니다.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

'그럼 내가 예약해 둔 바르샤바 호텔은 어쩌지?

급히 숙소 예약 취소를 위해 부킹닷컴에 들어갔지만, 취소 가능 시간은 이미 지났고 숙박비는 버얼~써 전액 결제 완료!

에고, 아까워라.

어차피 날린 돈, 포기하고 부다페스트 호텔을 서둘러 찾아본다.


결국 같은 날 두 군데 도시의 호텔을 예약하는 대참사. 멍청비용 제대로 냈다.


‘그런데 폴란드항공이 왜 인천에서 부다페스트 직항 편을 운행하지?’

최근에는 내가 일정, 예약을 도맡아하므로 J는 믿거라 그냥 따라오는 편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한마디씩 잔소리를 늘어놓는 J가 이번엔 말없이 한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내 마음을 대변해 주듯 수속 카운터 직원에게,

"폴란드 항공이 왜 바르샤바행이 아닌 부다페스트 직항을 운행하는 거예요? 헷갈리게!"

라며 질문을 던졌다.

그거야 항공사 사정이지, 직원이야 무슨 상관이 있을까마는,

'인천에서 출발하는 폴란드 항공은 바르샤바와 부다페스트 운항 편이 따로 있습니다'라는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J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외국 항공사라면 당연히 자기네 나라 공항을 경유하는 게 상식 아닌가. 왜 폴란드항공에서 헝가리를 가냔 말이다. 내가 미리 확인하지 않은 잘못을 왜 폴란드항공 탓을 하는가 싶지만 원래 남 탓은 제일 쉬운 변명거리가 되는 법.


바르샤바의 호텔은 허공으로 날아갔으니 부다페스트에서 하루 자면서 다뉴브 강가나 걸어봐야지 했건만 뜻밖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중으로 결제하게 된 호텔 비용 때문에 쓰린 가슴을 달래며 폴란드 항공 카운터로 향했다.

폴란드항공 체크인 데스크에서 직원이 여권을 뒤적이더니,

"유럽에 자주 가시네요. 최근 180일 중에서 절반 이상 유럽에 머물 수 없는 솅겐 규정 알고 계시죠?"라고 묻는다.

"네? 솅겐이요?" 그건 또 뭐냐!

나는 유럽 무비자 제도가 한 번 출입에 90일까지 체류 가능한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 유럽은 무비자가 아니라 비자 면제이며 솅겐 국가(유럽 내 국경 통과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27개국) 내에서 6개월 안에 합산하여 총 90일 상 체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6주를 살고, 북유럽을 3주 여행한 후 돌아온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어찌하다 보니 작년 가을부터 여러 번 유럽을 드나들게 되었지만 비자 문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만약 합계 90일이 넘었다면 탑승할 수 없습니다."

엄숙한 선언과 함께 직원이 여권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유럽 출입국 스탬프를 찾아내어 꼼꼼히 계산하더니 최근 반년 간 J는 84일, 나는 71일 유럽에 체류했단다.

그나마 나는 여유가 조금 있었지만, J는 이번 여행 중반에 90일을 넘기게 되고, 자동으로 불법체류자가 된다.


"돌아오는 항공편이 2주 후네요. J 손님은 탑승 수속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헉 그건 아니다. 무조건 타야 한다.

항공사 직원을 달래 본다.

"쨌든 가는 것은 가능하잖아요. 돌아오는 건 현지에서 비자를 받아볼게요"

"그건 곤란합니다. 저희도 규정이 있으니까요."

"유럽에 가서 날짜가 흐르면 체류가능일도 늘어나는 거잖아요. 들어가는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들어가서 해결할게요. 중요한 일이 있어 이 비행기를 꼭 타야 해요."


계산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겨본다.

직원도 곤란한지 상관에게 상의를 하겠다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 나왔다.

"그럼 일단 탑승 수속은 도와드리겠습니다. 돌아오시는 건 책임질 수 없으니 잘 알아보세요."


졸지에 불법체류 예약 완료.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면 공항이든 영사관이든 가서 비자 문제부터 해결하자."

나는 좌불안석이었지만, J는 태평하다 못해 여유만만하다.

"뭐, 설마 잡아넣겠어? 끽해야 추방이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고민하다 일단 검색부터 해 봤다. 90일 체류 기간이 넘었는데도 출국할 때 별문제 없이 나간 사람도 있고, 다시 입국하려면 3개월 있다 들어가면 된다고 한다.

게다가 그가 믿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자기 여권이 곧 만료 예정이니, 새 여권을 발급받으면 기록이 초기화될 거라는 거다.


이쯤에서 떠오른 아련한 추억.

J는 과거에도 러시아 비자 때문에 모스크바 공항 면세 구역에서 이틀을 보낸 적이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일으키기 전의 평화롭던 시절,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비자 면제 협정으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졌었다. 그 뉴스를 보고 비자도 없이 덜컥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탔던 그가 공항에 도착한 것이 비자 면제 협정이 발효되기 이틀 전이었던 것.


한국으로 되돌아가던가 아니면 비자 면제 협정이 발효되기까지 공항 터미널에서 기다리던가 택일하라는 입국심사관의 말에 눌러앉기를 선택했다던 J.

그때까지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아 별 문제 없이 공항 면세 구역에서 며칠을 머물렀다고 한다.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터미널>의 모스크바 공항판을 찍은 셈인데, J는 에어사이드 구역에 머물며 담당 경찰관과 함께 맥주도 마시고, 기념사진도 찍으며 재미있게 놀았었지. (잠은 어찌 잤나 모르겠다)


아무튼, 부다페스트를 경유하여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무사 통과했고, 우리는 여유롭게 렌터카를 빌려 독일과 프랑스, 스위스를 누볐다.

그런데 문제의 유럽 체류 90일째 되는 날,


J가 블로그에 우리의 솅겐 비자 사태를 올렸더니, 스위스에 거주하는 블로그 이웃이 겁을 잔뜩 줬다.


"독일은 불법체류 단속이 엄격해서 재수 없게 걸리면 5000유로 벌금에, 앞으로 5년간 입국 금지래. 그리고 솅겐 비자는 출국할 때 확인하는 거야"


와, 큰일 났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걸리면 어떻게 하지?

이제라도 항공권을 바꿔 바르샤바로 나가는 게 나을까?


그런데 다행히도 추가 정보가 들어왔다.

독일은 양자협정 우선국가라 한 번 입국하면 90일까지 가능하다고.

즉, 여권에 찍힌 도장 개수보다 독일에 마지막으로 입국한 날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시름 놓았지만, 그래도 출국할 때까지 방심할 순 없다.


무사히 여행을 끝내고 돌아갈 수 있을까?

어쨌든 이번 사건 덕에 한 가지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작년에 반년 중 절반을 유럽에서 살았다는 사실.


여권을 다시 펼쳐보니, 정말 어지간히도 나돌아 다녔구나 싶다.

이 정도면 아예 유럽 거주 계획을 세워야 하나?




이해가 안된다고 투덜댔던 폴란드항공의 인천-부다페스트 노선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운항이 종료될 운명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탄 비행기가 이 노선의 마지막 운항편이었던 것이다. 적자를 거듭한 끝에 폐쇄되는 노선이라 승객도 거의 없었다. 덕분에 우리 둘은 각자 세 자리씩 차지하며 눕코노미(눕는 이코노미)석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