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도난 사고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고야 만다.
출발 전부터 상상만 해도 끔찍했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보고타의 버스정류장에서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방을 앞으로 메고 손으로 지퍼를 꼭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던 것이 불과 한 달 전.
콜롬비아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한 달이 훌쩍 넘는 여행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내내 순탄했고, 보고타의 호텔 주변 거리도 쾌적하고 안전해 보였다. 저녁 비행기라 시간이 넉넉했던 게 문제였을까. 하필이면 구시가에 다시 간 것이 잘못된 걸까. 이제 출발하자는 그의 말에 이미 두 번이나 갔던 보테로 미술관을 한 번 더 가자고 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결정적인 이유는 경계심이 풀어진 내 마음이었다. 보테로 미술관을 나와 시몬 볼리바르 광장으로 향하는 노점 거리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고, 누군가와 부딪치지도 않았으며, 수상한 기척도 없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내 가방에 있던 스마트폰은 사라졌다. 열려있는 앞주머니의 지퍼를 내가 열어둔 것인지, 아니면 도둑이 열고 간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도난을 당한 후의 행동도 후회스러웠다. 계속 전화를 걸어보지 말았어야 했다. 왔던 길을 되짚어 보테로 미술관까지 다시 가볼 필요도 없었다. J의 휴대폰으로 내 폰의 위치 추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십여 분이 지난 뒤였고, 전원이 꺼진 내 휴대폰의 신호는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멈춰 있었다. 도난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위치를 추적했더라면 찾을 수 있었을까. 길거리에서 내 폰의 벨소리를 알아차리기는 어려웠겠지만, 작은 기회나마 놓친 것 같아 못내 아쉬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혼자 여행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일을 당했을 때 통신수단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 이후에는 후속 처리 하느라 정신없었다. 하필 호텔 앞에 공항까지 가는 직통버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우버 대신 버스를 탄 것도 내 뒷머리를 잡게 했다.
일단 휴대폰에 꽂혀 있던 신용카드의 분실 신고가 급선무였다. 모든 금융 업무를 휴대폰으로 처리하는 요즘 세상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예전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다행히 편리해진 점도 있었다. 주거래은행인 하나은행 분실사고 접수팀에서는 모든 금융거래를 한 번에 정지해 줄 수 있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하나은행 지점에 방문하면 한 번에 해제도 가능하다고 한다.
J의 휴대폰을 들고 집중해서 통화를 하고 있는데 색소폰을 든 한 남자가 공항버스에 올라탔다. 부스럭거리며 색소폰을 조립하더니 연주를 시작한다. 메데인에서는 공항버스 안에서 잡상인이 삼십 분이나 떠들어대 귀가 따가웠었는데 한 술 더 떠 버스 안에서 색소폰 연주라니.
은행 직원은 분실 신고 접수와 제1금융권, 제2금융권에 대한 단계별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도저히 들을 수가 없다. 볼륨을 최대로 높여도 색소폰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일어나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을 준비하는 짧은 틈을 이용해 겨우 통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드디어 약 20분간의 연주를 마친 악사는 승객들의 박수와 약간의 팁을 받은 뒤 유유히 버스에서 내렸다. 연주도 별로 좋지도 않던데 콜롬비아 사람들은 인심도 좋다. 그때까지 수화기를 붙잡은 채 금융거래 정지 과정은 계속되었고, 공항에 도착할 무렵에야 간신히 모든 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공항에서 짐을 부친 뒤 공항 경찰을 찾아갔다. 여행자보험에서 비록 20만 원이라도 분실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폴리스 리포트, 즉 경찰 확인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 휴대폰을 도난당해서 폴리스 리포트를 받으러 왔어요."
통역기를 켜고 더듬더듬 설명을 시작하려는데 한가롭게 앉아있던 경찰 서너 명 중 한 명이 대뜸,
"그래서요? 당신 휴대폰을 잃어버렸는데 우리 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하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게 아니라 폴리스 리포트를 발급받고 싶어요."
비슷한 대화가 몇 번 반복된 끝에 얻어낸 결론은, 자기들은 그런 서류를 만들어줄 수 없으니 문 옆에 있는 QR코드를 통해 신청하라는 거였다. 일단 QR코드를 사진으로 찍은 후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보고타에서 바로 귀국하는 게 아니라 멕시코시티에서 사흘을 머물러야 했다. 호텔에서 QR코드를 통해 콜롬비아 검찰청에 사고 신고를 했다. 번역기와 AI가 도와주는 요즘이라 가능한 과정이다. J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행자의 카메라 도난 사고로 경찰서를 찾았던 일을 떠올렸다. 러시아어로만 쓰여있는 서류를 내어주며 작성하라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어 돌아왔다던 때가 2016년이었다.
새벽 비행기로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당일에 모든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우선 휴대폰을 구해야 했다. 휴대폰이 없어진 지 닷새째, 덕분에 디지털 디톡스를 조금 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 존재가 사라진 듯한 상실감과 불안함을 하루빨리 해소하고 싶었다.
중고나라 카페와 당근을 통해 갤럭시 S24 울트라 모델을 찾았다. 일산 쪽에서 원하는 물건을 가진 사람과 연락이 되어 찾아갔다. 그러나 받아보니 울트라 모델이 아니라 S24 플러스 모델이었다. 사진이 잘 나오는 울트라를 사용해 보니 다른 모델은 쓰고 싶지 않다. 두 모델이 같은 것이라고 착각했던 판매자는 교통비 만 원을 돌려주겠다며 연신 사과를 한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받을 것까지야 없지 싶었지만 미안해하는 마음은 보기 나쁘지 않다. 다행히 일산 근처 고양시에 사는 다른 판매자와 연락이 되어 드디어 원하는 휴대폰을 구할 수 있었다.
SK 대리점에 가서 유심을 꽂고 개통을 마치자, 비로소 나 자신을 되찾은 것 같다. 오후에는 하나은행을 방문했다. 하필 우리가 찾아간 내자동지점이 건물 공사 중이라 주차가 불가능했다. 출입문 앞에 잠시 세워두는 건 괜찮다더니 결국 2주 뒤 주차위반 과태료 통지서를 받았고, 그것이 이번 도난 사고의 마지막 지출이 되었다.
걱정만 하고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던 결과 삼성 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던 데이터는 대부분 복구할 수 있었지만, 갤러리의 사진은 모두 사라졌다.
제일 걱정했던 삼성 노트의 메모와 데이원의 일기 자료가 고스란히 되살아나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진은 용량이 커서 원클라우드나 구글 클라우드에 별도로 백업해둬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평소 나에게 사진 백업 좀 하라고 잔소리했던 J는 혀를 끌끌 찬다. 휴대폰을 바꾼 지 2년, 그 사이 찍었던 세계일주 속 남극 크루즈, 이태리 한 달 살기, 북유럽과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사진들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이틀 동안 휴대폰 앱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도난당한 휴대폰의 데이터를 원격으로 초기화했지만 제대로 삭제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요즘은 유럽에서 도난 사고가 더 심하다고 한다. 그동안 당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는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다. 소는 잃었지만 외양간은 고쳐야겠다.
3년 전 코펜하겐에서 휴대폰 가방에 넣어뒀던 손지갑을 도난당한 적이 있다. 인어공주상을 보고 달려가던 내 앞에 작은 지갑 하나가 뚝 떨어졌다. 많이 본 지갑 같아 자세히 보니 내 지갑이었다. 소매치기가 내 폰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어 유로화만 가져간 후 카드가 들어있는 지갑을 내 앞에 던져준 것이었다. 지갑을 돌려준 게 어찌나 고마웠던지, 유로화가 너무 조금 들어있었던 것이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 후로 외국에서 지갑은 항상 바지 앞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 가방은 보기 싫어져서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 가져갔던 도난 방지 브랜든 가방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도난을 당했어도 가방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출발 후에야 휴대폰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를 발견한 것이 아쉬웠었다. 휴대폰 줄을 미리 준비해 그 고리에 연결해 두었더라면 이번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와서 같은 모델의 다른 색상 가방을 하나 더 구매했다. 휴대폰에 연결하는 고리도 사고, 수많은 검색 끝에 나에게 맞는 도난 방지 와이어도 찾았다. 한국에서는 사용할 일이 없겠지만, 해외에서는 반드시 가방에 연결해 둘 생각이다.
도난 관련 검색을 많이 해서일까. 네이버를 열 때마다 런던에서, 스페인에서, 포르투갈에서 휴대폰과 지갑, 심지어 캐리어를 도난당했다는 경험담이 계속 올라온다.
휴대폰만 도난당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싶기도 하다. 금전적인 피해는 스마트폰 가격 정도였고, 여행자보험으로 20만 원을 보상받았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왜 세상은 점점 더 험해지는 것일까.
적어도 도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우리나라가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