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부족했던 놓아줌의 용기

06. 어느 부길마의 뒤늦은 사임서

by 아마추어게이머
행복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언제 멈춰야 하는 걸까.


직장 생활에 치이고 사람에게 시달린 탓일까. 나는 업무 외의 영역에서 타인과 소통하는 것을 극도로 피했다. 게임 세계에서도 이런 성향은 마찬가지여서 편식이 심했다. 혼자 전략을 짜는 RTS(실시간 전략 게임) 장르를 선호했을 뿐, 수많은 사람이 한데 섞여 북적이는 MMORPG(대규모 다중 접속 역할 수행 게임)나, 팀 단위로 경쟁하는 AOS(진지점령 전)류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철저한 싱글 플레이어, 그게 나였다.


변화는 단순한 계기에서 시작되었다. 강의 교안 자료를 만들기 위해 남편과 함께 게임을 설치한 것이다. 남편에게는 추억의 게임이었지만, 나에게는 생애 첫 MMORPG였다. 처음엔 그저 자료 수집용이었으나 점차 재미가 붙었고, 활동 반경이 넓어지면서 남편과 함께 길드라는 모임을 창설해 길드마스터와 부길드마스터로 데뷔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나의 게임 라이프는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막을 올렸다.


그때부터 강의와 모니터링, 육아와 살림, 그리고 부길마 생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한창 강의가 몰릴 때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모든 게 신선했다. 다양한 삶을 짊어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협동 미션을 클리어하며 느끼는 성취감이 좋았다. 현실의 역할들을 잠시 벗어던지고 자유로울 수 있는 그 세계관에 흠뻑 빠져들었다.


하지만 MMORPG를 깊게 파고들수록 냉정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이 장르는 과금(현금 결제) 없이는 캐릭터를 강하게 키우거나 뛰어난 퍼포먼스를 내기 어려운 구조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과금은 내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애초에 내 목적은 남들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즐기는 것이었기에, 많은 시간과 일정 수준 이상의 자본까지 투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내게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사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훨씬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게임의 생리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과금이나 치열한 시간 투자 없이는 공동체의 흐름을 쫓아가기에 역부족이었다. 길드원 중에는 굉장히 몰입하는 하드코어 유저들이 많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나는 그들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벅찼다. 즐거워야 할 접속은 어느새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숙제 같은 압박감이 되었고, 부족한 컨트롤 실력 때문에 단체 미션에서도 점차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본업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 잠을 줄여가며 버텼지만, 결국 몸에도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첫 단추부터 어긋나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임을 대하는 온도가 길드원들과 너무 달랐고,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한 채 결국 사람들이 떠나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길드를 이끄는 책임자의 마음가짐이 그리 가벼워서야 되겠는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몇 개월간 정들었던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못내 서글펐다. 하지만 서글픔보다 컸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안도감이었다. 그들이 떠나는 과정에서 섭섭함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이 후련했다.


'아, 드디어 끝낼 수 있구나.'


그제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버거운 짐을 지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낮은 레벨과 어설픈 실력으로 부길마라는 책임감을 짊어지고 이만큼 버텨온 것이 오히려 기적 같았다. 돌아보면 진즉 그만뒀어야 했지만, 인연에 대한 미련으로 결단을 미루며 질질 끌어왔던 것 같다. 결국 나는 나 스스로를 포함해 모두를 위한 놓아줌의 용기가 부족했던 셈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이들 중에서도 나와 비슷한 케이스가 있지 않을까? 자신과는 맞지 않고 별다른 재미도 느끼지 못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억지로 게임에 끌려가고 있지는 않을까? 게임 리터러시를 가르치는 강사인 나조차 상황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놓쳤는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싶어 마음이 쓰였다.


이때 필요한 것이 어른들의 세심한 개입이다. 아이가 게임과 자신을 분리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다정한 질문을 건네보는 것이다.


"이 게임, 정말 널 즐겁게 해주고 있어? 너는 어떤 순간이 가장 좋아?"


이런 질문들은 아이를 가르치려는 수단이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대답하는 과정에서 '아, 내가 정말 즐거워서 하고 있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소중한 멈춤의 시간이다. 부모가 그 대답을 가만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억지로 쥐고 있던 게임을 내려놓을 용기를 얻을지도 모른다.


즐겁기 위해 시작한 게임이 더 이상 즐겁지 않다면, 멈추는 것이 맞다. 비단 게임뿐만이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 시작한 모든 일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의무감만 남아 나를 끌고 간다면, 그때는 용기를 내어 놓아야 한다.

놓아줌에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나는 그 소중한 진리를 게임이라는 작은 세계를 통해 아프게, 그러나 값지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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