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게임물 등급제가 우리 아이들의 최소한의 울타리인 이유
기억을 더듬어보면, 고전 명작 <페르시아의 왕자>는 전투 중이나 사망 시 붉은 선혈 묘사가 꽤 적나라했다. 도트 그래픽임에도 불구하고 함정에 빠지면 몸이 잘리거나 붉은 피가 솟구치는 등 시각적으로 상당히 잔혹한 연출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즘 기준이라면 최소 15세 이용가, 그래픽 구현 수준에 따라서는 청소년 이용불가 판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 당시엔 등급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었다. 내 기억 속의 등급 분류란 그저 성인용인지 아닌지를 겨우 구분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당시 게임의 그래픽 수준이 지금처럼 사실적이지 않았다. 대다수 게임이 투박한 2D 도트로 구현되어 있었기에, 핏방울이 튀어도 단순한 점들의 나열로 보였다. 이러한 표현의 추상성 때문에 요즘과 같은 세밀한 등급 체계가 굳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애초에 게임을 등급을 나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조차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게임은 그저 아이들의 하위문화, 혹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과 동급으로 취급받았으니까.
하지만 표현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게임 등급 분류 체계 역시 세분화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스타크래프트 열풍과 함께 등장한 PC방 문화는 게임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린 결정적 사건이었다. 산업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게임은 더 이상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닌, 사회적 통념과 명확한 기준 아래 관리되어야 할 거대 산업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바다이야기(2006년) 사태다. 이 사건은 지금의 등급 분류 체계가 정립되고 게임물관리위원회가 탄생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청소년 보호를 목적으로 한 등급분류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현재 등급은 전체이용가, 12세이용가, 15세이용가, 청소년이용불가로 나뉘며 만 나이가 기준이다. 예를 들어 12세이용가라면 초등학교 6학년 생일이 지난 학생들부터 이용할 수 있는 게임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폭력성, 공포, 선정성, 사행성, 범죄, 약물, 언어의 부적절성으로 총 7가지다.
각 기준 요소별 등급을 매긴 뒤, 그중 가장 높은 등급을 기준으로 최종 등급을 결정한다. 여기에 표현의 정도와 빈도를 고려하고 사회적 통념을 반영해 최종적으로 등급을 분류하는 구조다.
아이들은 게임 등급이 더 친숙하겠지만, 어른들에게는 아마 영화 등급이 훨씬 익숙할 것이다. 두 장르의 등급 분류는 외견상 비슷한 체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게임은 영상물에 비해 훨씬 엄격한 잣대가 적용된다.
예를 들어 영화의 경우 [보호자 동반 관람제도]가 운영되어 청소년관람불가를 제외하고 아이의 연령이 등급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보호자가 함께라면 [관람 지도]가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영화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은 다르다. 게임은 보호자가 옆에 있더라도 정해진 등급에 맞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왜일까?
영화는 관객의 개입이 불가능한 관찰의 영역이지만, 게임은 이용자의 직접적인 참여로 완성되는 매체다.
영화 속 살인 현장에서 관객은 프레임 밖의 목격자일 뿐이지만, 게임에서는 가해자 또는 피해자로서 프레임 안을 활보한다. 스스로 상황을 주도하는 만큼 이용자가 체감하는 심리적 영향력은 훨씬 클 수밖에 없다.
게임의 등급 분류가 영화보다 엄격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이유다.
현재 관련 기관에서 등급 분류 교육을 시행하고 학교로 출강도 나가고 있지만, 실질적인 지도의 출발점은 결국 가정이어야 한다. 부모가 등급제의 기준을 정확히 인지해야 명확한 가이드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목이 터져라 등급의 중요성을 외쳐도 가정에서 이를 무시한다면, 모든 교육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PC 게임의 경우, 게임물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게임명을 검색하면 등급과 구체적인 결정 사유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교육 포털의 이용자 교육 항목을 통해 무료 강의도 수강 가능하다.
"게임하지 마라"는 막연한 통제보다, 이런 시스템을 활용해 아이의 게임 환경을 함께 들여다보는 부모의 능동적인 관심이 절실하다.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은 최근 산업 발전과 규제 완화라는 흐름 속에 자정 작용을 담당해 온 게임물관리위원회의 역할이 민간으로 이양되거나 축소될 전망이라는 것이다. 국가 기관의 역할이 줄어들수록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은 결국 성숙한 시민 의식과 가정 내의 리터러시 교육이다.
앞으로 제도가 어떻게 변하든 청소년 보호라는 등급 분류의 본질만큼은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 직접 플레이어가 되어 세상을 주도해 나갈 우리 아이들에게, 등급제는 무분별한 자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가장 견고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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