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 히스토리
자동차의 바디 형태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세단, 2-도어로 스포츠카에 많이 사용되는 쿠페, 세단을 바탕으로 실용성을 강화한 왜건, 개방형 적재함을 탑재한 픽업트럭 등등.. 그 종류를 일일히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죠.
그 중에서도 소형차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자, 유럽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바로 해치백(hatchback)입니다. 해치백이라는 말은 1970년대에 만들어졌는데, 글자 그대로 차의 뒷모습(back)이 잠수함의 해치(hatch)를 닮았다는 뜻입니다. 용어 자체는 70년대에 정립됐지만, 실제로는 193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는데요.
처음에는 특이한 트렁크의 형태 중 하나 정도로 탄생했지만, 오늘날 해치백은 특유의 실용성과 컴팩트한 설계 덕에 어엿한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았습니다. 나아가 요즘 인기가 많은 소형 크로스오버의 뿌리도 해치백에서 찾을 수 있죠. 오늘은 귀엽고 실용적인 차, 해치백의 탄생과 발전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실용적인 짐차에서 실속있는 소형차로
우선 해치백의 정의부터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루프 쪽에 힌지가 달린 해치형 테일게이트를 모두 해치백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통상적인 분류에서는 C-필러 위치에 테일게이트가 위치하고 적재 공간과 캐빈룸이 분리되지 않은 차량을 해치백이라 부릅니다. 세단에서 트렁크 부분을 잘라낸 형태라 할 수 있는데요.
왜건과 비교하자면, 왜건은 세단의 트렁크 부분을 루프까지 높여 적재 공간을 극대화한 바디 타입입니다. 때문에 차체 길이가 세단과 별 차이 없거나 오히려 긴 경우도 있는 반면, 해치백은 짧게 끊어진 뒷태가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작은 차체에서 공간 활용도를 높여야 하는 소형차나 준중형 차급에 두루 적용되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해치백이 처음부터 소형차를 위해 탄생한 바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외관 상 툭 튀어나온 적재 공간 없는 2-박스 형태의 차체를 채택한 차는 많았지만, "루프에 달린 힌지를 통해 뒷쪽 차체가 통째로 열리는" 해치백의 구조적 정의에 맞는 차는, 원래 큰 짐을 싣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죠.
1938년 출시된 세계 최초의 해치백, 시트로엥 11CV 코메르시알(Commerciale)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공전의 히트작인 트락숑 아방의 파생 모델로 만들어진 이 차는, '상용(코메르시알)'이라는 서브네임에서 알 수 있듯 소상공인들을 위한 차였습니다. 빵집이나 정육점, 식료품점 등을 운영하는 이들이 큰 짐을 간편하게 실을 수 있도록 큰 테일게이트를 단 것이죠. 초기형은 위·아래가 분리된 클램쉘 타입 테일게이트를 달았지만, 후기형은 오늘날의 해치백처럼 하나의 큰 테일게이트를 장착했습니다.
1949년 미국에서 출시된 카이저-프레이저(Kaiser-Frazer)의 배가본드(Vagabond)나 트래블러(Traveler)도 초기형 해치백 중 하나입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3-박스 세단처럼 생겼지만, 특이하게도 뒷유리까지 이어진 상단 해치와 하단 클램쉘 게이트가 분할 개방되는 방식이었는데요. 여기에 2열 시트 폴딩 기능까지 지원해 세단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뛰어난 공간활용도를 자랑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패스트백 또는 리프트백 타입 해치백의 시초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적인 해치백의 형태를 정립한 차는 1961년 출시된 르노 4입니다. 르노 4는 뒷유리까지 통째로 개방되는 해치 테일게이트를 장착하고, 2열 시트를 접거나 아예 탈거해 큰 짐을 효율적으로 실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작은 차체에 넓은 개구부, 시트 조작을 통한 공간 활용도 극대화 등 해치백 만의 고유한 아이덴티티가 이 차에서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르노 4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30년 간 800만 대 넘게 팔려 나갔고, 유럽 시장에 해치백의 장점을 널리 알리며 해치백 전성시대를 연 차로 평가 받습니다.
1970s : 해치백 전성시대
해치백은 유럽의 교통 환경에 가장 적합한 차였습니다. 비좁은 유럽의 구시가지에서 운전하기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활용도가 높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죠. 이전에도 BMC 미니, 피아트 600, 시트로엥 2CV 같은 2-박스 소형차가 있었지만, 이들은 트렁크와 캐빈룸이 분리돼 있고 개구부가 작아 활용도가 낮거나, 아예 리어 엔진 구조로 적재 능력의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반면 르노 4를 위시한 해치백 소형차는 용도에 따라 공간 구성을 바꿀 수 있어 패밀리 카로 쓸 수도, 소형 밴처럼 활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1967년에 출시된 생카(Simca) 1100은 르노 4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모노코크 바디와 가로배치 전륜구동 레이아웃, 독립식 서스펜션을 탑재해 현대적인 섀시 설계가 반영된 첫 해치백이었습니다. 또 용도에 따라 3-도어와 5-도어 등 두 종류의 바디 타입을 제공해 스타일과 실용성을 동시에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74년에는 전설적인 C-세그먼트 해치백의 교과서, 폭스바겐 골프가 등장하면서 그야말로 해치백 전성시대가 열립니다. 비틀의 후속으로 만들어진 골프는 탄탄한 주행 성능과 넉넉한 실내 공간을 두루 갖춰 이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치백으로 자리매김 합니다. 후대에 출시된 모든 해치백이 골프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골프에 고성능 버전인 'GTI'가 추가되면서, 작고 실용적이기만 했던 해치백의 고성능 펀카(fun car)로서의 가치도 발굴됩니다. 해치백은 구조적으로 리어 오버행이 짧고 뒷 차축의 하중이 적어 동급 세단보다 코너링 성능이 뛰어난데요. 이 작고 운전이 즐거운 차체에 고성능 엔진을 얹은, 이른바 '핫해치(hot hatch)'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이런 핫해치들은 고성능 스포츠카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접근성이 좋았고, 고성능의 대중화를 통해 자동차 문화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합니다. 또 기민한 차체 특성을 살려 랠리 무대에서도 활약하는 등, 모터스포츠에서도 해치백의 가치를 인정 받습니다.
한편, 1970년대는 유럽에서만 인기 있던 해치백이 북미 시장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낸 시기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미국 시장은 중대형 이상의 세단이나 왜건, 픽업트럭의 인기가 높았지만, 1970년대 들어 수입산 소형차와의 경쟁, 강력한 배출가스 규제 등으로 미국 회사들도 소형 해치백을 직접 만들기 시작합니다.
대형차를 선호했던 미국 시장에서 이런 차들은 당연히 찬밥 신세였지만, 1973년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유가가 치솟자 소비자들도 경제적인 소형차를 찾기 시작합니다. 즉, 실용성이나 공간 활용도 때문에 소형 해치백이 잘 팔린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는 온전히 경제성 때문에 소형차를 찾다 보니 해치백을 사게 된 것이죠.
그래서 처음부터 소형차의 용도에 맞게 만들어진 유럽산 해치백들과 달리, 미국산 해치백들은 효율을 높이기 위해 그저 차 크기를 줄여놓기만 한, 다소 기형적인 형태를 지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AMC 그렘린, AMC 페이서, 포드 핀토 같은 차들이 대표적인데요.
미국산 해치백들은 소형차 개발 경험 부족으로 크고 작은 결함에 시달렸고, 이는 탄탄한 품질과 우수한 기술력을 앞세운 토요타 코롤라, 혼다 시빅 같은 일본산 해치백과 소형차들이 미국 시장에서 주목 받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혼다 시빅은 미국 제조사들이 "실현 불가능한 규제"라며 반대했던 배출가스 규제, 이른바 '머스키법'을 단숨에 통과하며 혼다의 뛰어난 기술력을 미국 시장에 알렸습니다. 오일쇼크의 여파가 가신 뒤에는 미국에서 해치백의 인기가 그리 높지 않지만, 이때 혼다를 비롯한 일본차들이 쌓은 신뢰와 인지도는 미국 시장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밑바탕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전통적으로 세단이 강세인 한국 시장은 과거에도 예외가 아니라서, 1970년대에도 해치백을 찾아보기는 힘들었습니다. 1975년 출시된 국내 첫 독자 모델, 현대 포니는 외관 상 패스트백 스타일의 해치백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뒷유리가 함께 열리지 않아 해치백으로 볼 수는 없었죠.
국내 첫 해치백은 이로부터 5년 뒤 출시된 포니 3-도어입니다. 뒷유리가 통째로 열리는 테일게이트를 채택해 공간 활용도를 높였는데요. 하지만 3-도어 구조 상 뒷좌석 활용이 불편해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1982년 출시된 포니 2는 3-도어가 단종되고, 대신 기본 모델에도 해치백 설계가 적용되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중적 인기를 끈 해치백이 됩니다.
사라져 가는 해치백, 이제는 크로스오버로
지난 50년 동안 사랑 받은 해치백이지만, 최근에는 그 인기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엔트리 모델 시장의 상당 부분이 컴팩트 SUV로 대체된 까닭인데요. 사실 컴팩트 SUV라는 장르는 해치백의 크로스오버 버전에서 파생돼 발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준중형급 이하의 세그먼트에서 해치백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1980년대 이후에는 이를 기반으로 한 크로스오버 모델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피아트 판다를 바탕으로 한 판다 4x4, 폭스바겐 2세대 골프를 바탕으로 한 골프 컨트리 같은 모델들이 있었는데요.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거나 독특한 장르의 차로 취급되며 컬트적 인기를 끌었지만, 대중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SUV의 인기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강력한 오프로드 성능을 갖추지 않더라도 도심에서 편리하게 탈 수 있는 크로스오버 스타일의 SUV가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패밀리 카로 사용되는 중·대형 모델만 크로스오버화(化) 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작은 차급에도 이런 크로스오버 SUV가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시판되는 컴팩트 SUV 중 상당수는 해치백을 바탕으로 SUV의 장점을 결합, 지상고를 높여 제작됐습니다. 가령 현대 코나, 기아 스토닉 같은 차들은 소형 SUV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소형 해치백에 더 가까운 형태죠. 실제 공간 활용도 역시 해치백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듬직한 디자인과 높은 지상고에서 오는 운전 및 승하차 편의성 등의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최근 출시되는 중·소형 전기차 중에서도 크로스오버 해치백 스타일로 꾸며진 차가 많은데요. 전기차의 구조 상 배터리가 차체 하부에 위치해 일반 승용차보다 시트고와 전고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이를 크로스오버 스타일로 해석하는 까닭입니다. SUV와 전기차의 인기가 갈 수록 늘면서 이런 형태의 차는 계속 늘어날 전망입니다.
하지만 크로스오버가 대체할 수 없는 해치백 승용차만의 장점이 있는데요. 바로 경제성입니다. 통상 SUV나 크로스오버는 동급 해치백보다 가격이 높게 설정되기 때문에, 보다 실속 있고 경제적인 차를 원하는 운전자들에게는 해치백의 매력이 유효합니다. 공기역학적으로 유리하고 무게도 가벼운 만큼, 해치백의 연비가 더 좋은 건 물론입니다.
때문에 자동차 트렌드의 급변 속에서도 해치백은 당분간 고유의 영역을 지켜 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SUV의 인기가 늘더라도 해치백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경제성과 실용성, 운전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도로 위 생태계에 종의 다양성이 유지되는 건 좋은 일이니까요. 다시 한 번 매력적인 해치백들이 인기를 끄는 날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