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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미디어 PCARMEDIA Feb 16. 2022

삼성자동차 SM5 : 완성되지 못한 초일류의 꿈

수요 명차 극장

자동차의 역사 속에는 많은 이들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꿈, 완벽한 엔진을 만들겠다는 꿈, 건방진 경쟁자를 넘어서겠다는 꿈 등등... 자동차 회사나 특정 모델의 탄생 비화에 이런 크고 작은 꿈들이 담겨 있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기반을 다진 뒤 대기업 중심으로 성장해 온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 환경에서는 이렇게 담대한 꿈이 담긴 차를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경제 개발을 위한 중공업 육성의 일환으로 정부가 오랫동안 자동차 산업에 직·간접적 개입을 해 온 데다 1990년대까지도 해외 기술 의존도가 높았던 만큼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자동차 회사를 차린다"는 건 그야말로 '꿈 같은 얘기'였죠.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내 아픈 기억으로 남은 SM5의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야망을 가진 이는 있기 마련이었고, 실제로 그 꿈을 잠깐이나마 현실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20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1990년대 국산 명차로 거론되는 삼성자동차 SM5 이야기입니다. 故이건희 회장의 열정이 담긴 SM5는 혜성처럼 등장해 국내 자동차 산업을 뒤흔들었지만, 외부 환경의 압박을 극복하지 못하고 못다이룬 꿈으로 남은 비운의 명차입니다.


'초일류 삼성', 자동차를 노리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삼성그룹 회장 자리에 오른 뒤 삼성의 혁신을 이끌었습니다.

1987년 이건희가 그룹 회장 자리에 올라선 뒤, 삼성은 반도체와 전자제품을 앞세워 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며 경영 혁신을 이끌었고, 특히 1993년 이른바 '신경영 선언'을 통해 질적 향상과 양적 성장을 동시에 이뤄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기업집단으로 성장한 삼성이었지만, 이때까지도 채워지지 않은 오랜 숙원사업이 있었으니, 바로 자동차였습니다. 당시 재계 1위였던 현대는 물론 대우그룹, 기아그룹, 쌍용그룹 등 내로라 하는 대기업들은 모두 자동차 회사를 갖고 있었는데, 삼성에게는 수많은 사업 분야 중 마지막 퍼즐 조각과도 같았죠.


창업주 이병철 회장 체제에서도 몇 차례 자동차 산업 진출의 기회가 있었지만, 당시 삼성은 선택과 집중을 위해 자동차를 뒤로 미뤄왔습니다. 게다가 1980년대까지 정부가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를 통해 자동차 회사들의 생산량과 생산 차종 등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성이 마음대로 자동차 시장에 뛰어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지시했던 이 회장은 자동차가 삼성의 미래 먹거리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당시 "삼성이 하는 건 현대도 다 하지만, 현대가 하는 것 중에는 삼성이 못 하는 것(자동차)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삼성그룹의 장기적인 브랜드 가치를 고려할 때는 삼성그룹의 마지막 빈 자리인 자동차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자연농원(現에버랜드) 부지에 국내 첫 상설 온로드 서킷인 모터파크(現에버랜드 스피드웨이)를 지을 정도로, 이건희 회장 본인이 엄청난 자동차 마니아였던 만큼 삼성의 이름을 단 완성차를 만드는 건 삼성의, 이건희 회장의 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에 이 회장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 끈질기게 자동차 회사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1993년에는 삼성생명을 통해 기아자동차 주식을 대량 매입, 인수를 시도했지만 이 마저도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수포로 돌아갑니다.

삼성은 끈질긴 설득 끝에 김영삼 정권에게 자동차 산업 진출을 허락받습니다.

당시 국내 시장의 규모는 한계가 있었고, 지금과 달리 수출보다는 내수 시장의 비중이 훨씬 컸던 까닭에 정부는 대기업 삼성까지 자동차 시장에 뛰어드는 건 공급과잉과 출혈경쟁을 일으킬 수 있다며 반대했습니다. 1994년 초까지도 정부는 이런 입장을 견지했는데요. 이에 삼성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 공장을 세우겠다며 정부를 설득했고,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12월 삼성의 자동차 회사 설립을 허가합니다.


1995년 삼성자동차 법인이 설립되고, 본격적인 자동차 회사의 구색갖추기가 시작됩니다. 특히 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초일류'를 추구했던 삼성은 자동차 분야에서도 초일류가 되겠다며 아낌없는 투자를 감행합니다.

오늘날 르노삼성 부산공장의 모습. 갯벌 위에 지어진 공장은 부지 매입과 기초 공사에만 6,000억 원이 들었습니다.

당시 삼성차가 부산 신호공단에 공장을 짓는 데에 든 비용은 무려 2조 원 가량. 갯벌을 간척해 만든 공장 부지를 매입하고 기초 공사를 하는 데에만 다른 공장의 5배나 되는 돈이 들었고, 최고급 제조 설비와 쾌적한 휴식 공간까지 갖춘 '초일류 공장'으로 지어졌습니다. 공장 설립과 제품 개발을 위해 선진 브랜드였던 닛산에 143억 원 규모의 기술도입료를 지불하고, 자동차 생산이 시작된 뒤에도 대당 1.6~1.9%의 로열티를 내기로 합니다.


후대에는 이러한 이건희 회장과 삼성의 투자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가 적지 않습니다. 자동차에 대한 이 회장의 개인적인 열정 탓에 시장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고, 그저 완벽만 추구한 나머지 수익성이 형편 없었다는 이유입니다. 결과론적으로는 이 같은 무리한 투자가 후술할 삼성차의 매각이라는 결과로 귀결되기는 했지만, 당시로썬 대한민국에서 가장 최신의 설비와 선진 기술을 갖춘 자동차 회사의 출현은 경쟁사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최악의 순간 탄생한 최고의 차
이건희 회장은 꿈꿔왔던 자동차 회사의 첫 양산차로 중형 세단을 선택합니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지어진 공장에서 생산할 첫 차는 1990년대 성공한 중산층의 상징이었던 중형 세단이었습니다. 당시 중형 세단 시장에서는 현대 쏘나타와 대우 레간자, 기아 크레도스 등 쟁쟁한 경쟁 모델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는데요. 삼성은 기술 제휴 관계인 닛산의 엔진과 플랫폼을 활용해 경쟁자들을 압도할 품질의 중형차를 기획합니다.


당시 닛산은 일본 내에서도 토요타에 견줄 사세를 자랑했고, 북미 시장에서도 제법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세계적인 기업이었습니다. 삼성은 그런 닛산의 중형 세단, 세피로를 기반으로 첫 양산 승용차를 준비합니다.

신차의 베이스가 된 닛산 세피로는 이미 일본과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 모델이었습니다.

베이스가 된 2세대 세피로는 1994년 출시돼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둔 모델이었습니다. 게다가 북미 시장에는 닛산 브랜드의 맥시마, 인피니티 브랜드의 I30 등으로 팔리며 상품성을 검증받았으니, 이제 갓 기술 자립 걸음마를 뗀 국산 경쟁 모델들과는 완성도 측면에서 비교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삼성은 세피로를 거의 그대로 가져오되, 몇 가지 변화를 줬습니다. 우선 전·후면부의 디자인을 한국 소비자의 취향(과 이 회장의 취향)에 맞춰 수정했고, V6 VQ 엔진만 탑재됐던 세피로와 달리 직렬4기통 SR 엔진을 탑재한 일반 모델과 V6 엔진을 탑재한 고급형 모델로 구분된 라인업을 확충했습니다.

이 회장의 엄격한 지시 하에 최고의 품질을 지닌 신차의 생산 준비가 끝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는 대부분 닛산의 설계와 부품을 그대로 사용했고, 심지어 초창기에는 아예 일본에서 대부분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했습니다. 이 회장은 신차의 품질을 전자제품만큼 엄격하게 관리할 것을 주문했고, 기술을 이전해 준 닛산의 엔지니어들도 닛산보다 삼성의 조립품질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공장 설비 비용과 로열티 등을 감안하면 차 한 대를 팔 때마다 삼성차가 100만 원씩 손해를 본다는 계산이 나왔지만, 그럼에도 이건희 회장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그는 이미 삼성차 설립 당시부터 향후 5~6년 간 10조 원 이상을 투자할 각오를 했으니까요. 삼성차는 반도체와 더불어 삼성그룹의 중요한 미래 먹거리로 여겨졌습니다.

삼성의 숙원사업이 결실을 보기 직전, IMF가 한국을 덮칩니다.

자부심을 담은 첫 차는 이름도 남달랐습니다. 경쟁사들이 모두 미국식 명사 차명을 붙인 반면, 삼성차(Samsung Motors)의 약자인 'SM'에 차급과 배기량을 더한 유럽식 알파뉴메릭 차명을 국산차 최초로 도입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정해진 차명은 SM5. 삼성그룹과 이 회장의 오랜 꿈이 담긴 당대 최고의 중형 세단이 출격을 앞두고 있던 1997년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합니다.


삼성이 만든 처음이자 마지막 승용차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국내 경기는 곤두박질칩니다.

훗날 'IMF 사태'라 불리는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주가는 폭락하고 환율은 치솟습니다. 재계의 쟁쟁한 기업과 은행의 부도 소식이 연일 언론을 장식했고, 대규모 실업과 더불어 구매 심리가 위축되며 장밋빛 전망을 그리던 자동차 산업도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혼돈의 한복판에서 출시된 SM5의 초기 시장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그런 위기의 한복판이었던 1998년 3월 28일, 삼성 SM5가 출시됩니다. 하지만 싸늘하게 얼어붙은 신차 시장에서 신생 자동차 회사의 차가 폭발적인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엄밀히 따지면 일본에서 단종을 앞둔 구형 모델을 베이스로 한 탓에, 유선형 디자인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국내 시장에서 SM5의 디자인은 다소 구식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삼성 직원이 아니면 타지 않을 차"라고 비아냥거리는 반응까지 나왔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SM5를 각별히 여겼지만, 그룹 존폐의 위기 앞에서 결국 자동차 사업 매각을 결정합니다.

삼성차는 "삼성이 만들면 다릅니다", "타보면 다릅니다" 등의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SM5의 뛰어난 품질을 강조했고, 이건희 회장은 본인과 삼성그룹 임원진들을 위해 3.0L VQ 엔진을 탑재하고 휠베이스를 늘린 SM530L을 제작해 타고 다니는 등 SM5를 각별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에도 IMF의 충격 속에서 엄청난 적자를 감당하는 건 제아무리 삼성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삼성은 신차를 선보인지 1년도 되지 않은 98년 12월부터 자동차 부문의 매각을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당초 삼성차의 매각 협상 대상자는 대우그룹으로, 대우전자와 삼성차를 상호 교환하는 이른바 '기업 간 빅딜'이 6개월여간 논의됩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협상이 결렬되며 삼성차는 법정관리에 돌입했고, 이듬해인 2000년 9월, 프랑스의 르노가 삼성차의 자산을 인수해 오늘날의 르노삼성자동차 법인이 출범하게 됩니다.

불안감 속에 SM5의 판매량이 곤두박질쳤지만, 경영이 정상화되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대우와의 인수 협상, 법정관리를 거치며 SM5의 판매량은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나마 첫 해에는 약간의 신차효과를 누리며 '다크호스'로 떠올랐지만, 삼성차가 휘청대면서 "지금 SM5를 샀다가 회사가 망해서 고치지도 못 하는 것 아니냐"며 구매를 꺼렸습니다. 르노삼성이 출범한 2000년, SM5의 연간 판매량은 고작 1만 2,000대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이후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회사가 빠르게 정상화되면서 출시 초기부터 강조했던 품질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죠.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 SM5의 뛰어난 내구성은 출시 후 3년여가 지나서야 입소문을 타기 시작합니다.

화제가 됐던 '10만km 엔진' 광고. SM5의 품질과 내구성은 국산차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

SM5는 당시 국산차에 거의 없던 아연 도금 강판을 적용해 부식에 강했고, 대다수 국산차가 주기적으로 교체가 요구되는 타이밍 벨트를 채택한 반면 타이밍 체인 방식을 채택해 엔진 정비 주기가 길었습니다. 또 경쟁사들이 2년/4만km의 보증기간을 제시한 것과 달리, SM5는 국산차 최초로 3년/6만km의 보증기간과 더불어 구매 후 1개월 이내에 2회 이상 고장 시 새 차로 바꿔주는 공격적인 보증 정책을 펼칩니다.


10만km만 달려도 폐차하는 게 이상하지 않던 시절, SM5는 "10만km를 달려도 새차와 엔진소리가 같다"는 광고를 통해 품질을 어필했습니다. 특히나 내구성에 민감했던 개인택시 기사들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면서, SM5는 입소문을 타고 '차트 역주행'을 시작합니다.

기사회생에 성공한 SM5는 7년 간 40만 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고, 르노삼성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 결과 르노삼성 출범 이듬해인 2001년 SM5의 판매량은 10배 가량 치솟았고, 2002년에는 국산차 판매 6위에 오르며 기사회생에 성공합니다. 보급형 모델인 SM518과 SM520은 현대 EF쏘나타와 경쟁했고, V6 엔진을 탑재한 고급형 모델 SM520V와 SM525V는 그랜저XG와 경쟁하며, SM5는 제한된 자원으로 중형과 준대형 시장을 아우르는 성공을 일궈냅니다.


2003년 페이스리프트를 거쳐 2005년 1월 단종될 때까지 SM5는 누적 40만 대 넘게 팔렸고, 닛산 티아나 기반의 2세대 모델에 바톤을 넘겨줍니다. 1세대 SM5는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삼성차 고객들의 두터운 신뢰와 충성도를 쌓은 주역이었고, 당대 국산차로선 최고의 완성도와 공격적인 보증정책을 통해 국산차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차로 평가받습니다. 20년여가 지난 현재까지도 적잖은 1세대 SM5가 도로 위를 누비는 것이 시대를 앞서나갔던 이 차의 품질을 증명하는 셈이죠.

삼성에게 SM5는 아픈 손가락이었지만, 초일류를 추구했던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올해로 르노삼성과 삼성의 브랜드 사용 계약이 종료되면서, 르노삼성은 오는 8월 사명에서 '삼성'을 뗄 예정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그토록 바랐던 자동차 회사와의 마지막 연결고리가 사라지는 셈입니다. 비록 SM5는 삼성에게 아픈 손가락이자 완성하지 못한 꿈으로 남았지만, 그럼에도 '초일류'를 꿈꾸며 삼성이 만든 처음이자 마지막 자동차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명차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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