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 히스토리 by 피카몰
흔히 자동차의 디자인에 관해 이야기할 때 전면부 디자인을 '자동차의 얼굴'에 빗댑니다. 그만큼 자동차의 여러 부위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첫인상을 결정짓는 게 바로 전면부라 할 수 있습니다. 전면부 디자인은 개별 모델의 디자인 완성도를 판가름할 뿐 아니라 브랜드를 관통하는 디자인 콘셉트가 가장 선명하게 반영되는 부위이기도 합니다.
자동차의 전면부를 나눠 보면 또 여러 부품으로 구성됩니다. '눈' 역할을 하는 헤드램프, 충돌 안전성과 더불어 공기역학 성능과 미적 요소를 아우르는 범퍼 등이 있습니다. 또 하나, 전면부 디자인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며 첫인상을 정하는 것이 바로 라디에이터 그릴입니다.
라디에이터 그릴은 재미있는 부품입니다. 그 자체로선 특별한 기능적 역할을 지니지 않지만 장식적 요소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릴 하나만 바꿔도 분위기가 확 바뀌기도 하고, 그릴의 형상이 패밀리 룩을 이루기도 하죠. 또 미래차 기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라디에이터 그릴의 역할 변화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라디에이터 그릴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라디에이터도 지키고, 멋도 부리고
열교환을 통해 난방 효과를 얻는 라디에이터의 개념은 로마 시대부터 확립됐고, 실내 난방 목적의 라디에이터는 19세기에 특허가 출원돼 상용화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냉각을 위해 수냉식 설계와 라디에이터를 장착한 내연기관은 20세기나 돼서야 등장합니다. 태동기 자동차의 내연기관은 발열이 심하지 않은 데다 차체 외부에 노출돼 있어 공랭 방식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엔진의 성능이 향상되면서 그만큼 발열도 늘어나고, 주행속도가 빨라지며 엔진을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후드 안에 배치하기 시작하자 공랭 방식의 한계가 찾아왔습니다. 이에 따라 연소실을 둘러싼 워터 재킷을 설계하고, 여기에 냉각수를 순환시키는 수냉 방식의 엔진이 개발됩니다.
다임러 사의 엔진 개발자로 일했던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는 1901년, 다임러 메르세데스 35hp 차량을 위한 세계 최초의 벌집형 라디에이터를 고안했습니다. 냉각수가 통과하는 배관 사이에 수백 개의 냉각 핀을 설치해 최적화된 냉각 효율을 낼 수 있는 라디에이터는, 이내 수냉식 자동차의 표준이 됩니다.
물론 20세기 초에는 공랭식 엔진과 수냉식 엔진이 꽤 오랫동안 공존했습니다. 냉각 효율을 높여 더 높은 성능을 내기에는 수냉식이 유리했지만, 당시에는 냉각수의 품질이 조악해 엔진 내부에 부식을 일으키고 워터펌프, 라디에이터, 호스 같은 부품들이 고장나는 문제도 있었죠. 때문에 고성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차에는 공랭 방식이나 엔진오일이 냉각 역할을 맡는 공유랭 방식도 꾸준히 사용됐습니다.
어쨌거나 자동차의 성능이 향상되면서 라디에이터는 점차 필수품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주행풍으로 최적의 냉각 효율을 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라디에이터는 차량 전면의 한가운데 자리잡았고, 냉각을 방해하지 않도록 헤드라이트를 양 옆에 배치하게 됐죠. 이런 배치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러다보니, 주행 중 이물질이 날아들어 냉각 핀 사이에 끼거나, 아예 망가뜨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성능이 높아지고 속도가 빨라지면서 앞 차에서 튄 돌이나 벌레 따위만 날아들어도 라디에이터가 망가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라디에이터 앞에 철조망 형태의 석쇠(grille)를 씌우게 됩니다. 네, 바로 라디에이터 그릴의 탄생입니다.
1930~1940년대에 들어서는 라디에이터가 차체 외부에 노출돼 있는 형태 대신, 라디에이터를 후드 내부에 집어넣고 공기가 원활히 흐를 수 있는 그릴을 차체 전면부에 적용한 디자인이 주류가 됩니다. 이렇게 하면 경미한 충돌 사고 시 라디에이터가 터지는 걸 막을 수 있고, 한창 유행 중인 유선형 디자인을 적용하기도 수월했죠.
평면적인 디자인을 벗어나게 되니 그릴은 그야말로 브랜드의 상징이 됩니다. BMW의 키드니 그릴이나 당시 미국차들의 종(bell)형 그릴, 십자형 그릴 등 다채로운 형태의 그릴이 이때 탄생합니다. 물론 웅장함을 살리기 위해 기존과 같이 판테온 신전을 닮은 평평한 그릴을 적용한 롤스로이스 같은 브랜드도 있었죠.
처음에는 실용적 목적으로 탄생했지만, 차체 전면부에서 가장 넓은 부위를 차지하고 있는 라디에이터 그릴은 이내 자동차의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됩니다. 그릴 상단에 회사 로고를 새기거나, 그릴에 고유의 패턴을 넣거나, 그릴을 통째로 개성 있는 형태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후드 오너먼트와 함께, 그릴은 브랜드와 모델을 상징하는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자리잡습니다.
그릴은 어떻게 가장 중요한 디자인 요소가 됐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0년대 후반부터 라디에이터 그릴은 많은 차들의 핵심 디자인 요소가 됩니다. 크고 넓은 자동차가 늘어나고, 엔진룸과 휀더를 일체화한 디자인이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세로로 긴 형태였던 라디에이터 그릴은 전면부 전체로 범위를 넓히기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디자인 패턴도 시도됩니다. 스포티한 감성의 메쉬 그릴, 차체를 더 넓어 보이게 만들고 세련된 감성을 더하는 가로형 그릴, 권위적인 분위기와 웅장함을 강조해 고급차에 쓰인 세로형 그릴, 장식적 효과가 돋보이는 격자형 그릴 등 다양한 패턴이 쓰이기 시작합니다.
충돌 안전 규제가 생기기 이전에는 실로 제트기의 노즐을 본딴 그릴이나, 리트랙터블 헤드램프에 라디에이터 그릴과 같은 패턴을 입혀 마치 헤드램프가 없는 것처럼 숨기는 방식을 비롯해 실로 다채로운 그릴이 등장했습니다. 또 취향에 따라 바꿔 장착할 수 있는 애프터마켓 그릴도 여럿 시판됐죠.
소재와 컬러 측면에서도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크롬, 고성능 이미지가 부각되는 블랙 하이글로시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집니다. 또 라디에이터 그릴에 브랜드의 엠블럼이나 레터링 뱃지 등을 부착해 포인트를 주기도 했죠. 이처럼 라디에이터 그릴은 자동차 전면부의 '도화지'와도 같이 쓰이며 브랜드와 모델의 인상을 결정짓는 요소가 됩니다.
몇몇 브랜드는 패밀리 룩으로서의 그릴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BMW는 키드니 그릴을 계승해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으며, 메르세데스-벤츠도 이 시기 정립된 세 줄의 가로선과 한 줄의 세로선으로 이뤄진 고유의 그릴 디자인을 이어 갑니다. 이 밖에도 알파로메오, 애스턴마틴 등 여러 회사들이 패밀리 룩 그릴을 도입합니다.
시대에 따라 그릴의 크기는 계속 변했습니다. 80~90년대에는 디자인 트렌드의 변화에 따라 그릴의 크기를 줄이거나 아예 범퍼 하단으로 숨기는 미니멀리즘 스타일이 유행했습니다. 헤드램프 사이에 위치한 라디에이터 그릴은 손바닥 만한 크기로 줄어들기도 했죠.
작아지던 그릴 디자인의 일대전기가 찾아온 건 2000년대의 일입니다. 2003년 아우디는 상단 라디에이터 그릴과 범퍼 하단의 흡기구를 합쳐 강렬한 인상을 주는 싱글 프레임 그릴(single frame grille)을 최초로 선보입니다. '구식 디자인'이었던 대형 라디에이터 그릴을 현대적인 자동차 디자인에 적합하게 변화시킨 최초의 사례입니다.
아우디 싱글 프레임 디자인 이후로,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작아졌던 그릴이 다시 커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각종 안전 규제의 강화로 범퍼나 헤드램프, 보닛 등의 디자인에 있어 제약이 늘어나면서, 여러 제조사들은 대신 그릴을 확대하고 화려한 디테일을 더해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방법을 택합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중국 시장이 급성장하며 과시욕이 강한 중국 소비자 취향에 맞춰 그릴이 더 커지는 추세입니다.
"더 큰 그릴"의 유행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대중차는 물론이고 대표적 프리미엄 브랜드인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등 여러 브랜드가 점점 더 큰 그릴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다소 어색할 정도로 커진 그릴은 조화로운 스타일을 선호하는 보수적인 소비자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당분간 그릴은 더 커질 전망입니다. 단, 내연기관에 한해서 말이죠.
전기차와 자율주행 시대, 그릴의 운명은?
201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전기차가 보급되면서 라디에이터 그릴은 존폐의 기로(?)에 섰습니다. 내연기관차처럼 커다란 공기 흡입구가 필요하지 않은 전기차에서 라디에이터 그릴은 '기능적으로 아무 쓸모도 없는 장식품'이 돼 버린 것이죠.
전기차가 아예 냉각의 필요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모터와 배터리를 식히기 위해 냉각 시스템이 탑재됩니다. 하지만 내연기관처럼 커다란 라디에이터가 장착되지는 않기에, 오히려 공기 저항을 유발해 효율을 떨어뜨리는 그릴은 가로막히게 됩니다.
초기의 전기차들이 즉각적으로 그릴을 없애지는 않았습니다. 전기차가 보급되기 전에는 그릴 없는 자동차에 대한 시각적 거부감이 있을 수 있기에, 적잖은 전기차들이 그릴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내연기관차와 설계를 공유하는 모델들은 물론, 전기차 전용 모델이었던 테슬라 모델 S 초기형도 그릴 형태의 장식을 채택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기차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그릴을 과감하게 삭제한 차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선호하는 테슬라는 모델 X 이후 출시된 모든 차에서 더 이상 라디에이터 그릴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최근 출시되는 기성 제조사들의 전기차; 가령 현대 아이오닉 5, 폭스바겐 I.D.3 같은 모델들 역시 이런 기조에 맞춰 그릴을 더 이상 배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디에이터 그릴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돼 완전히 자취를 감출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100년 넘게 여러 자동차 회사의 아이덴티티이자 자동차의 핵심 디자인 요소로 자리잡아 온 만큼, 앞으로도 장식적 요소로서의 그릴은 오랫동안 이어질 전망입니다.
최신 모델들은 그릴을 단순한 장식품이 아닌, 미래차의 센서 인터페이스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자율주행차에는 레이더, 라이다, 카메라, 초음파 센서 등 다양한 센서가 탑재됩니다. 이들 센서류를 차체의 맨 앞쪽 그릴에 통합 배치해 인식률을 높이고 미관도 살리는 것이죠.
나아가 일부 제조사에서는 그릴에 여러 개의 발광 소자를 삽입, 전광판처럼 활용할 수 있는 '라이팅 그릴'의 도입을 검토 중입니다. 라이팅 그릴은 차를 더 멋지게 꾸며주는 조명이자, 상황에 따라 도형이나 문자를 표시해 다른 차량이나 보행자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소통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자율주행 시대가 온다면 무궁무진하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자동차의 여러 구성 요소 중에는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바뀌면서 용도가 바뀌거나 '흔적 기관'이 되어 단순한 장식으로 전락한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라디에이터 그릴도 전동화 시대를 맞이하며 흔적 기관이 될 뻔했지만, 새로운 역할을 찾아 진화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차들도 더 근사한 그릴과 함께 등장할 테니, 민둥산 같은 앞모습을 보게 될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네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