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 히스토리
배터리 전기차가 연일 자동차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요즘이지만, 사실 현실적인 친환경차로 시장에서 가장 많은 선택을 받는 건 배터리 전기차가 아닌 하이브리드 자동차입니다. 2015년 디젤게이트 이후로 하이브리드는 제조사 입장에서 탄소배출량을 가장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모델로, 소비자 입장에서 현실적 불편함 없이 누릴 수 있는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인 차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하이브리드'라는 말은 혼종, 잡종 등을 의미하기에 엄밀히 말하면 2가지 이상의 동력원을 지닌 자동차는 모두 하이브리드라 부를 수 있지만(과거 공압을 이용한 에어 하이브리드 등이 실험된 바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이브리드라 하면 내연기관과 배터리 기반의 전기 구동계가 합쳐진 하이브리드 전기차(Hybrid Electric Vehicle, HEV)를 일컫습니다. 조금 범위를 넓히면 대용량 배터리와 외부 충전 단자를 갖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전기차(Plug-in Hybrid Electric Vehicle, PHEV)까지 하이브리드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하이브리드 역시 전기차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된 건 최근의 일이지만 그 역사는 제법 오래된 편입니다. 일상의 편리함과 친환경성을 두루 갖춘 현실적인 친환경차,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최초의 하이브리드는 포르쉐가 만들었다?
내연기관과 전기모터를 합쳐 만드는지라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각각의 자동차-내연기관차와 전기차-보다 한참 뒤에야 만들어졌을 것 같지만, 의외로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역사도 긴 편입니다. 자동차 태동기에는 내연기관과 전기모터의 장단점이 뚜렷했던 까닭입니다.
내연기관은 연료만 넣으면 장시간 구동할 수 있었지만 기계적 신뢰도가 낮고 시끄러운 데다 출력도 부족했습니다. 반면 전기모터는 초기 내연기관보다 신뢰도가 높고 조용하며 성능도 우수했지만, 무거운 배터리를 잔뜩 싣고도 짧은 거리밖에 달릴 수 없었죠.
때문에 19세기 말, 전기 구동계를 탑재하고 발전기를 내연기관으로 구동해 배터리를 충전하는 직렬형 하이브리드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적잖이 이뤄졌습니다. 1889년 윌리엄 H 패튼(William H. Patton)은 세계 최초로 가솔린 발전기와 전기 모터를 조합한 하이브리드 기관차와 보트의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주로 트램이나 소형 궤도 차량에 사용됐습니다.
궤도를 벗어나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하이브리드 차량을 최초로 만든 건 천재 자동차 엔지니어로 유명한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입니다. 그는 1900년 하이브리드 자동차 로너-포르쉐 믹스테(Lohner-Porsche Mixte)를 제작해 전 유럽을 깜짝 놀래켰는데요.
영국인 E.W. 하트(E.W. Hart)의 주문으로 제작된 로너-포르쉐 믹스테는 4개의 바퀴에 각각 허브 모터를 장착하고 배터리와 가솔린 발전기를 탑재해 1.5톤의 무게에 당시로선 엄청난 56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했습니다. 비록 엄청난 가격 때문에 단 2대만(1대는 2륜구동) 제작됐지만, 명실상부한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특히 이러한 직렬 하이브리드 구동계는 가솔린 엔진 대비 강력한 토크 덕에 트럭이나 버스에 애용됐습니다. 하지만 내연기관의 성능이 향상되는 동안 모터나 배터리 성능의 발전은 더뎠기에, 전간기를 거치며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습니다. 특히 강력한 토크를 지닌 디젤 엔진 자동차가 상용화되면서, 그나마 상용차 분야에서 명맥을 이어오던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직렬 하이브리드의 가능성을 높이 샀고, 이후에도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후원을 받으며 무기를 개발할 때도 그는 줄곧 하이브리드 구동계가 무거운 전차에 적합한 파워트레인이라고 믿었는데요. 당시 포르쉐가 설계한 6호 전차 '티거(Tiger)'의 프로토타입이나 엘레판트 구축전차, 마우스 초중전차에 하이브리드 구동계가 탑재됐지만, 당시 기술력으로는 충분한 성능을 내지 못하고 모터가 타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2차 대전 후에도 내연기관의 비약적인 발전 속도에 비하면 전자·전기 기술의 발전은 더딘 편이었습니다. 더구나 오일 쇼크가 터지고 배출가스 규제가 도입된 1970년대 이전까지 연비나 환경은 자동차 기술 발전에서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하이브리드는 오랫동안 연구용 프로토타입 정도로만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프리우스가 이끈 하이브리드 혁명
전기차와 마찬가지로 긴 암흑기를 지냈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연기관과 전기 동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하이브리드의 잠재력을 연구하는 이들은 꾸준히 있었습니다. 특히 상술한 것처럼 1973년 1차 오일 쇼크 이후 치솟은 유가로 경제적인 차를 찾는 소비자가 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를 시작으로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여러 제조사들은 전기 에너지를 활용한 친환경·고효율 자동차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특히 태동기 하이브리드가 엔진으로 발전기를 돌리고 그 전기로 모터를 구동하는 직렬 구조였던 것과 달리, 이때부터는 작은 엔진과 모터를 조합해 큰 엔진의 성능을 내는 병렬 하이브리드 프로토타입이 여럿 만들어집니다.
미국인 빅터 워크(Victor Wouk)는 1972년형 뷰익 승용차에 21마력 전기 모터를 탑재한 프로토타입을 개발해 후대에 '하이브리드의 대부'라 불렸고, 이탈리아의 피아트는 1979년 소형 엔진과 전기 모터가 힘을 합쳐 구동하는 병렬형 하이브리드 프로토타입 '131 이브리도(131 Ibrido, 이브리도는 이탈리아어로 'hybrid')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는 후일 하이브리드와 전기차의 핵심 기술 중 하나로 자리 잡은 회생 제동 개념이 정립됐고, 이를 바탕으로 알파로메오, 아우디, BMW, 볼보 등 여러 제조사들이 하이브리드 프로토타입을 제작, 실증에 나섭니다.
이처럼 하이브리드가 전기차 이전의 대안적 친환경차로 주목 받는 가운데, 토요타는 1993년 21세기형 친환경차 프로젝트 팀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양산 하이브리드 자동차 만들기에 나섭니다. 이때는 GM의 '임팩트' 콘셉트카를 시작으로 순수 전기차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시기였지만, 토요타는 배터리 성능의 한계와 충전 인프라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으로서 하이브리드의 발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한 것이죠.
몇 년 간의 연구를 거쳐 토요타는 엔진이 상황에 따라 직렬로 배터리를 충전하거나 병렬로 구동력을 보태는 직병렬 혼합형 하이브리드 구동계를 완성했습니다. 이 하이브리드 구동계를 얹고 1997년 출시된 세계 최초의 양산 하이브리드 승용차가 바로 토요타 프리우스입니다.
프리우스는 오랜 연구를 거쳐 만들어진 만큼 여러 면에서 혁신적이었습니다. 양산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배터리 수명을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장 긴 수명을 기대할 수 있는 40~60%의 충전량을 유지했고, 연비가 좋지만 저속 토크가 부족해 자동차용으로 거의 쓰이지 않던 앳킨슨 사이클 엔진을 채택하고 전기 모터의 강력한 저속 토크로 이를 보완해 극도의 효율을 추구했습니다. 또 전용 e-CVT 변속기와 정차 시 엔진 시동을 끄는 아이들 스톱 앤 고(ISG) 같은 당대 최첨단 기술을 아낌없이 투입했습니다.
프리우스의 여러 구성 요소들은 후일 출시되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들의 표준으로 자리잡았고, 마침 GM의 EV1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나면서 하이브리드는 현재 기술로 상용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친환경차로 각광받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제법 많은 회사들이 토요타를 따라 하이브리드 구동계를 양산차에 탑재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토요타의 촘촘한 특허 장벽 탓에 다른 회사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성능과 효율, 신뢰성 등 여러 면에서 경쟁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죠. 때문에 일부 제조사를 제외하면 2000년대 후반 즈음에는 대다수 제조사가 하이브리드를 포기하거나 형식적으로 갖추는 데에 그칩니다.
마일드 하이브리드부터 하이퍼카까지
2000년대 후반부터는 다양한 형태의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등장합니다. 토요타의 하이브리드 특허를 우회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가격을 낮추면서 효율을 최적화하거나, 반대로 전기 모터의 역할을 늘려 배출가스를 줄이기 위한 시도도 있었죠.
전자는 마일드 하이브리드(MHEV)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말 그대로 부드러운 하이브리드에 속하는데, 프리우스 같은 풀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복잡한 전용 설계와 작동 로직, 비싼 배터리 등을 요구하는 반면 마일드 하이브리드는 작은 배터리와 모터로 연료 소모가 많은 가속 순간에 조금씩 힘을 보태는 방식을 말합니다.
마일드 하이브리드 방식은 풀 하이브리드 특유의 주행 이질감은 최소화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효율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초창기에는 기대 만큼 효율이 나오지 않고 되려 잔고장을 유발하는 등 기술적 한계로 이내 자취를 감췄습니다. 하지만 최근 각 제조사의 전동화 노하우가 축적되고 탄소 감축 압박이 커 지면서 48V 전원 시스템을 활용하는 48V MHEV가 다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하이브리드에서 전기 모터의 역할을 늘리는 쪽이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즉 PHEV입니다. 기본적으로 풀 하이브리드 구동계를 갖추고 있지만, 배터리 용량을 키우고 전기 모터의 성능을 높여 외부 전원으로 충전해 전기차처럼 활용할 수 있는 차가 바로 PHEV입니다.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인 로너-포르쉐 믹스테처럼 직렬형 시스템을 채택, 엔진을 충전용 레인지 익스텐더로 사용하는 이른바 EREV(Extended Range Electric Vehicle) 방식의 전기차도 넓은 의미에서 PHEV의 일종으로 봅니다.
이런 PHEV는 대안적 하이브리드이자 대안적 전기차로서 연구됐는데요. 현재는 중국의 메이저 전기차 회사로 꼽히는 BYD가 2008년 세계 최초의 양산 PHEV인 F3DM을 출시하면서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배터리 순수전기차의 주행거리가 턱없이 부족했기에, 미국에서는 레인지 익스텐더를 탑재한 직렬 하이브리드, 즉 EREV 형태의 PHEV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2010년 출시된 쉐보레 볼트(Volt)는 150마력을 내는 전기 모터를 탑재하고 순수 전기만으로 최대 61km를 달릴 수 있었는데요. 여기에 1.4L 레인지 익스텐더를 탑재해 '장거리 운행이 가능한 전기차'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 친환경·고효율을 추구해 온 하이브리드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비교적 출력을 높이기 수월하고 내연기관보다 월등히 뛰어난 초반 가속력을 가진 전기 모터를 고성능 엔진과 조합하고, 모터가 충분히 성능을 낼 수 있도록 대용량 배터리를 탑재한 스포츠카들이 속속 만들어진 것이죠.
이런 고성능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잠재력은 2013년을 기점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한때 '하이퍼카 3인방'으로 불렸던 포르쉐 918 스파이더·라페라리·맥라렌 P1이 사이좋게 2013년 출시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이미 고성능 스포츠카로 유명한 세 회사가 거의 동시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탑재한 초고성능 한정판 모델을 공개한 것이죠.
이들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조금씩 구조가 달랐지만, 셋 모두 강력한 모터의 서포트로 900마력 전후의 강력한 시스템 출력을 발휘한다는 점은 같았습니다. 이듬해 보다 대중적인, 그리고 미래적인 디자인의 PHEV 스포츠카 BMW i8까지 등장하면서 하이브리드는 보다 친환경적이면서 더 짜릿한 퍼포먼스를 위한 대안으로 떠오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여러 제조사들이 하이브리드 또는 PHEV 방식의 고성능 모델과 스포츠카를 시판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하이브리드를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2000년대와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타는 유별난 차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는 하이브리드를 선택하는 것이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 됐죠. 특히 2015년 터진 디젤게이트는 경제성을 중시하는 운전자 상당수가 하이브리드로 갈아타는 계기가 됐습니다.
일각에서는 전기차 시대가 오면 하이브리드 또한 퇴출될 운명이라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전기차가 짧은 시일 내로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차를 모두 대체하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앞으로는 오히려 하이브리드가 현재의 순수 내연기관차를 대체하고, 시장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입니다.
현재 대다수 제조사들은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와 PHEV를 중심으로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늘려가는 추세입니다. 앞으로도 수십 년 간 하이브리드는 꾸준히 영역을 넓히고, 발전해 나갈 것이 확실합니다. 다가올 미래에는 어떤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만나게 될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몰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