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기억 속 '나'를 지우고 싶었다

내게 딱 한 가지 초능력이 허락된다면

by 엄마의 왈츠

십수 년 전, 만약 하나님이 위태롭게 버둥대는 내 삶을 보시고 단 하나의 초능력을 허락하셨다면. 나는 순간이동이나 시간을 되돌리는 거창한 능력 따위는 빌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내 아이의 머릿속에서, 방금 전 엄마의 악마 같은 얼굴을 감쪽같이 지워주는 능력. 넋이 나가 버린, 그 서늘한 눈빛과 악다구니를 없던 일로 만드는 능력. 그거 하나면, 정말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이혼 직후의 나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었다. 유치원 교사인 동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이와 나는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부서져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이에게 다정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과 마음은 번번이 나를 배신했다.



아이의 사소한 저지레는 내 안의 괴물을 깨우는 버튼 같았다. 버튼이 눌러지면, 내 안의 지킬 박사는 하이드 씨에게 영혼을 넘겼다. 모든 감정을 잔인하게 쏟아내고 나면, 텅 빈 방 안에는 숨이 넘어가라 꺽꺽대는 아이의 울음소리만 섬처럼 떠다녔다.



그제야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네 잘못 아니야, 절대로….”



작은 몸을 끌어안고 닳아 없어질 것처럼 사과를 반복했다. 아이의 등이 뜨끈한 땀으로 축축해질 때까지 안고, 또 안았다. 잠든 아이의 까만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밤새도록 같은 기도를 올렸다.



“제발, 오늘 저의 모습을
아이의 기억에서 지워주세요.
내일은 꼭, 반드시, 웃어주는 엄마가 될게요. 다른 어떤 능력도 바라지 않으니,
제발 그 ‘미친 엄마’의 모습만
삭제해 주세요.”



화내고, 사과하고, 눈물로 기도하는 나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시지프스의 형벌이었다.



얼마 전, 아이와 나란히 누워 해리포터를 다시 보는데 아이가 불쑥 물었다.



“엄마는 초능력이 생긴다면 어떤 게 제일 갖고 싶어?”



아이의 질문 하나에 나는 0.1초 만에 12년 전, 그 지독했던 밤으로 소환되었다. 내 속도 모르는 아이는 신나서 재잘거렸다.



“난 투명망토랑, 헤르미온느의 뭐든지 들어가는 가방! 아, 무한대로 넓어지는 텐트도!”



그러더니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천장을 보며 외쳤다.




“아, 엄마! 나 배고파. 뭐 먹을 거 없어?”



그 순간, 깨달았다. 이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능력은 따로 있다는 것을.




“엄마!” 하고 부를 때, 열 개의 손으로 각기 다른 일을 하면서도 웃으며 대답해 줄 수 있는 ‘드래곤볼’의 분신술. 덤블도어처럼 손뼉 한 번에 근사한 저녁상이 차려지는 마법. 아니, 그런 거창한 것 말고 잠 좀 안 자도 멀쩡한 무한 체력이 절실할 뿐이다.




한때는 아이의 기억 속 상처를 지우기 위해 내 모든 걸 걸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저 삼시세끼 밥을 해 먹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능력을 갈망하는 내가 되어 있었다. 조금, 웃음이 났다.




어쩌면 시간은 기억을 지우는 대신, 더 절실한 소원으로 덮어쓰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과거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유쾌한 소년으로 자라준 것. 그것이야말로 내 삶에 일어난 가장 눈부신 초능력이자, 가장 따뜻한 기적일 테니.




오늘도 나는 초능력 대신 앞치마를 두른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처럼.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도, 어쩌면 나처럼 아주 절실한 초능력 하나쯤은 품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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