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우환, 래퍼 딥플로우 의외의 인맥도
하태임 작가에게 반하게 만든 사진이 두 장 있다.
1995년 서울 종로화랑에서 열린 제1회 개인전 팸플릿에 담긴 작업 모습,
그리고 2021년 11월 강남 노블레스 컬렉션에서 열린 개인전 ‘Wish for Harmony’ 프로필. 26년이라는 간격이 무색하게 사진 속 여성은
여전히 머리를 질끈 묶은 채 붓을 들고 있다.
지난해 12월 초 노블레스 컬렉션 공식 홈페이지에서 진행 중인 전시를 둘러보다가 하태임 작가 사진을 발견했다. 그 순간 ‘이 작가를 꼭 한번 만나봐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그는 연두색 물감이 묻은 붓을 들고 노랑, 초록, 분홍 형형색색 ‘컬러 밴드’가 그려진 작품들 사이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고와서, 전시에 대한 궁금증이 뒤로 밀렸다. 작가 모습에만 계속 눈길이 갔다. 웃고 있는 표정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안정감과 따뜻함. ‘중견작가의 여유란 이런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얼마 후 작가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젊은 시절 사진을 찾았다. 캔버스를 작업실에 눕혀놓고 무릎을 꿇은 채 작업 방향을 고민하는 모습. 멜빵바지를 입은 23세 하태임이 거기 있었다. 당시 그는 현재 미술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핫한 ‘색 띠’ 회화 대신 표현주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다. 두 장의 사진을 비교해보며, 이 멋진 여성이 26년간 어떻게 살아왔을지 알아봐야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봄이 무르익은 5월 13일,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을 찾은 이유다.
다시 찾은 나의 양평
작가는 양평과 인연이 깊다. 우리나라 1세대 추상화의 거장이자 작가의 아버지인 고(故) 하인두 화백 묘소와 기념비가 양평에 있어서다. 어머니인 한국화가 류민자 선생과 동생 하태범 작가도 양평에 산다. 하인두 선생이 직장암으로 투병 중일 때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해 가족들이 종종 양평에 머물곤 했다고.
하인두 선생은 3년간 투병하다 1989년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인 2018년 12월, 하태임 작가는 5년간 몸담았던 삼육대 미술콘텐츠학과 교수직을 그만두고 양평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인적 드문 전원 지역에 넓고 높은 건물을 짓고 그 앞에 한가득 꽃을 심었다. 작업실 마당에 설치한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기념 작품 ‘평화의 탑’은 이곳의 트레이드마크. 백·홍·청색 구성으로 언뜻 장난감처럼 보여 택배 기사들은 그의 작업실을 “레고 있는 집” 또는 “놀이동산” 등으로 부른다고 한다.
‘비하인드 아틀리에’ 코너를 진행하면서 늘 상상하던 작업실 풍경을 바로 여기서 만났네요.
지난해 10월부터 이 옆으로 작업실을 한 개 더 짓고 있어요. 그것까지 완성된 뒤 오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은 캔버스를 펼쳐놓을 공간이 좀 부족하거든요. 작업실에 캔버스가 빽빽하게 놓여 있으면 심리적으로 부담이 돼요. 물감 마르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요. 제가 흙을 좋아하는데, 문득 공간이 좀 더 있으면 작업실에 물레를 두고 모빌·콜라주 작업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민하다 작업실을 하나 더 마련하기로 했죠. 올 7월 완공이에요.
새로 짓는 작업실도 작가님이 다 쓰시는 건가요.
가장 전망 좋고 따뜻한 3층에 엄마 작업실을 만들어드리려고 해요. 바로 옆이 아빠 산소라 엄마가 바라보시기 딱 좋은 위치거든요.
도심과 많이 떨어진 지역인데, 작업하기는 어떠신가요.
좋아요. 양평에 온 지 이제 3년 반 됐거든요. 서울에 있던 아파트를 처분해 이 작업실을 지었어요. 어찌 보면 안정적인 교수직까지 그만두고 모험을 한 셈인데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너무 춥거나 덥지 않은 계절에는 창문을 살짝 열어둔 채 잠자리에 들거든요. 그러면 잠결에 개구리 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려요. 그렇게 살다가 가끔 서울에 있는 대학생 딸 집에 가면 깜짝 놀라죠. 창문 밖으로 오토바이 소리나 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오니까요.
대학교수는 왜 갑자기 그만두셨어요.
작업할 시간이 없어서요. 교수가 하는 일이 많아요. 입시철에는 (미술) 학원도 돌아다녀요. 학원 원장님한테 “우리 학교에 애들 많이 보내주세요” 부탁하러요. (교수가 직접 학원까지 가는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또 거기서 제자들 취업 얘기도 꺼내야 하는데, 미술 전공자를 일하게 하는 게 참 추상적이고 모호한 거예요. 요즘은 순수미술을 하려는 애들이 많지 않아서 학교가 미대 안에 있는 학과를 ‘아트앤디자인학과’로 통폐합했어요. 저는 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고 아이들 미래를 그려주는 것도 좋아하는데 (작업) 시간이 촉박하니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죠. 어린 시절 저를 가르쳐주셨던 교수님들처럼 능력이 많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고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됐어요.
따르던 제자를 비롯해 아쉬워하는 분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사람 욕심이 한도 끝도 없잖아요. 처음 교수 임용됐을 때는 안정적인 월급이 들어오니 참 좋았어요. 제가 젊은 시절 개인 교습부터 미술 기간제 교사, 초등학교 방과 후 교사 등까지 안 한 일이 없거든요. 돈을 모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유학 전문 미술 학원을 차린 적도 있어요. 틈틈이 CF 무대디자인 세팅, 아트 디렉터, 대기업 컨설팅도 했고요. 여러 일을 하면서 작업도 해야 하니 늘 바빴어요. 저는 스스로 멀티플레이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나이가 들면서 효율성이 떨어지고, 여러 길을 다 같이 갈 수 없으니 선택을 한 거죠.
현재 하태임 작가의 작업실은 집과 함께 있는 ‘집업실’ 형태다. 양평에 오기 전에는 가나아트가 운영하는 경기도 ‘장흥아틀리에’에 작업실을 두고 서울 집에서 오가며 출퇴근했다고 한다.
지금은 작업실 공간 뒤쪽에 있는 흰색 문을 열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 나온다. 잠시 올라가 보니 디자인 조명, 가죽 소파에서 작가의 감각이 엿보인다. 곳곳에는 그의 대표작 컬러 밴드 그림이 걸려 있다.
‘집업실’의 장점은 뭔가요.
작품 마르는 시간에 틈틈이 집안일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무섭지가 않아요(웃음). 장흥아틀리에에서 작업할 때는 건물 관리하시는 분이 밤이면 불을 다 끄셔서, 밤늦게 집에 갈 때마다 진짜 무서웠어요. 또 그 건물은 엘리베이터가 어마어마하게 크거든요. 큰 그림을 이동하기 쉽게 하려고 일부러 엘리베이터를 크게 설치한 건데, 밤중에 혼자 승강기를 탈 때는 머리가 막 쭈뼛쭈뼛 섰어요. 지금은 늘 집에 누군가 있는 게 좋죠. 중학교 1학년생 아들을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는 것도요. 다만 아이가 작년까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제 작업실에 들렀다 제 방으로 갔는데 이제는 안 그러네요. 출입문이 따로 있거든요. 계속 작업실에 있으면 이제 제 얼굴을 들여다보지도 않아요(웃음).
엄마가 갑자기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하겠다고 하는 걸 아이들이 싫어하지는 않았나요.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서울 사는 딸은 2주에 한 번씩 놀러 와요. 집에 와야 생활비를 주거든요. 치사하죠(웃음). 아들은 시골 생활에 만족해하면서 학교 잘 다니고 있어요. 65세가 넘으면 다시 서울에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그 전에는 전원생활을 경험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다음 작업실은 어디에 마련하고 싶으세요.
프랑스 파리요. 제가 9년 동안 현지에서 유학하다 타의로 귀국했거든요. IMF 외환위기와 출산 등 여러 이유가 겹쳤어요. 그때 많이 아쉬웠죠. 엄마가 되니 싱글인 작가들에 비해 한계가 참 많더라고요. 작업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져서 2007년 파리 ‘시테 레지던스’ 입주 프로그램을 신청해 떠난 적도 있어요. 아홉 살 된 딸을 데려가 3개월 동안 머물렀죠. 제가 작업하는 동안 혼자 책을 읽거나 TV를 봐야 했던 아이가 떼도 많이 썼지만, 좋은 기억으로 남았어요.
그가 처음 파리로 떠나게 된 건 아버지 하인두 선생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자식의 그림 재능을 굳게 믿었던 아버지는 하태임이 한국에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프랑스에 데려가 서양화를 본격적으로 가르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89년, 딸이 아직 고등학생일 때 갑작스레 타계했고 하태임은 이듬해 홀로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와 여러 어려움이 겹쳐 힘들고 우울했던 시기, 그래도 작가는 1994년 디종 국립 미술학교를 거쳐 1998년 또 다른 국립 미술학교인 파리보자르(D.N.S.A.P)를 졸업한다. 흔히 ‘에콜 데 보자르’라고 부르는 이곳은 마티스, 클로드 모네, 르누아르 등 당대 유명 화가를 배출한 명문 학교다. 하태임은 졸업 1년 후 모나코 국제현대회화전에서 ‘모나코 왕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한창 작업에 몰두하던 시기, 외부적 여건 탓에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하태임 작가는 올해 2007년과 같은 프로그램을 신청해 다시 한번 파리 ‘시테 레지던스에 가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이번엔 다 큰 딸과 중학생 아들은 한국에 두고 혼자 가서 마음껏 작업하고 올 생각”이라며 활짝 웃었다. 자연스레 이야기 주제가 작업으로 넘어갔다.
작업실을 보니 캔버스가 다 누워 있는 게 이색적이네요.
캔버스를 세워놓으면 물감이 흐르거든요. 저는 밴드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여러 번 덧칠해요. 투명한 느낌을 연출하려고 물감이 굉장히 묽은 상태로 작업하고요. 전에 누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원래 동양에서는 서예나 그림 작업을 할 때 다 종이를 바닥에 두었다고요. 서양에서나 이젤을 사용했죠. 저는 제 어깨를 축으로 삼고 캔버스 위에 물감을 올린다는 느낌으로 작업해요. 그러다 보니 눕혀 그리게 됐어요.
크기가 큰 캔버스를 주로 쓰시잖아요. 어깨, 허리 안 아픈 곳이 없으실 것 같아요.
하종현(단색화 대가) 선생님 아들이 세브란스병원 신경외과 과장님이에요. 저를 보고 “왜 그림을 그렇게 그리세요. 세워놓고 서서 그리시죠” 하더라고요.
문득 그의 SNS에서 발견한, 역시 캔버스를 눕혀두고 무릎을 꿇은 채 작업 방향을 고민하던 젊은 시절 하태임 작가 사진이 떠올랐다. 그 사진에 대해 물으니 작가는 “지금보다 10kg이 덜 나가던 시절”이라고 했다. 웃음이 터졌다. “이제는 관절염 때문에 그런 자세로는 절대 작업을 못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 더 웃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작업에 대한 열정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제2의 홈타운 “주 템므, 파리!”
작업실 벽면에 1993년작 ‘구토’ 그림이 걸려 있네요. 최근 하시는 컬러 밴드와 다른 그로테스크 한 느낌이 참 좋아요.
아빠 돌아가시고 혼자 프랑스에 있으면서 작업한 거예요. 돌아보면 저때 제가 참 힘들었어요. 아빠가 3년 정도 편찮으시다 돌아가셔서 처음엔 ‘아빠 이제 고생 안 하시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부재를 실감하게 되면서 아픔이 커지는 거예요. 아빠는 늘 제 곁에 있을 것 같고 부르면 바로 제 옆으로 올 것 같았는데 아무리 불러도 안 오시니까요.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폭발적인 제 마음을 그리는 것뿐이었죠. 당시 좋아했던 작가들은 밈모 팔라디노(이탈리아 아방가르드 화가), 아놀프 레이너(오스트리아 초현실주의 화가)였어요. 우울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좋아했죠.
‘구토’는 뭘 그리신 건가요.
구토하는 저요. 가슴에서 뭔가 쏟아지는 거죠. 그 당시 충분히 아팠기 때문에, 지금도 저 작품을 대하면 상흔이 보여요. 내 안에 있는 작은 아이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저 작업이 있었기에 지금의 작업도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들은 참 예민하잖아요. 작은 거 하나에도 힘들어서 쓰러질 수 있고요. 그때 제가 붙잡을 동아줄은 그림밖에 없었어요. 그걸 딱 붙잡고, 그림 덕분에 (힘든 시기를) 견뎠어요.
알고 보니 하태임은 파리보자르 360년 역사상 처음으로 휴학을 신청한 학생이라고 한다. 어린 딸이 홀로 프랑스에 머물며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걸 알게 된 어머니 류민자 선생이 “1년이라도 돌아왔다 가라”고 종용한 것. 1995년, 하태임이 23세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종로화랑’에 찾아가 하태임의 포트폴리오를 제출하고 약 99m2(30평) 규모 전시 공간까지 대관해뒀다. “전시하고 돌아가라”는 어머니의 말에 하태임도 목표 의식이 생겼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개인전에서 선보일 그림 작업을 시작한다. 당시 종로화랑 관장이 초반 작품을 본 뒤 약 198m2(60평) 규모 지하 전시실까지 추가로 빌려주겠다고 제안해, 전시 규모는 약 297m2(90평) 수준으로 더 커졌다. 그 공간을 꽉 채울 작품을 만들어가며 하태임은 “일그러졌던 마음이 다시 세워졌다”고 돌아봤다.
1995년 전시 팸플릿에 실린 작가님 사진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알고 보니 굉장히 불안하던 시기의 모습이네요.
네. 그때 500호(333.3×248.5cm)짜리 그림을 그리다 저 자신한테 화가 나서 작업실 문을 잠그고 손도끼로 막 찢어버린 적이 있어요. 광기였죠. 다음 날 그 작품을 내다 버렸는데, 엄마가 몰래 화방에 맡겨 복구를 하셨더라고요. 나중에 보니 그 그림을 누가 사 갔어요.
컬렉터가 누군지 아시나요.
가나아트 회장님이라고 하시더군요.
이후 그 작품을 다시 보신 적이 있으세요.
못 봤어요. 소장자에게 전화해 행방을 알아보는 건 꿈도 못 꿨죠. 나중에 “제주도 어느 호텔에 걸려 있더라” 하는 얘기만 전해 들었어요. 바다 풍경 그림이거든요. 물고기와 바다 수면 등을 해체해 표현했는데, 그걸 판 돈으로 중고차를 샀어요. (저한테는) 효자죠. 안 찢었으면 어쩔 뻔했어요(웃음).
이후 하태임은 파리보자르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문자 추상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그의 시그니처가 된 ‘컬러 밴드’가 탄생했다. 평소 작가는 한국어와 프랑스어 2개 언어 사이에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로마자와 라틴어, 알파벳 등을 분해해 그리는 작업을 하다 문득 “진정한 언어는 비가시적인 게 아닌가” “진정한 소통은 언어나 문자, 문화에 있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림과 문자를 거칠게 지우기 시작했다. 이 행위를 여러 번 반복한 끝에 창조한 것이 바로 지금의 컬러 밴드다.
간결한 형태에 강렬한 색을 더하신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제 작업을 설명할 때 동화 이야기를 하곤 해요. 인어 공주가 다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잖아요. 저는 색을 얻기 위해 형태 그리는 즐거움을 포기했어요. 이 ‘색 띠’는 지우는 행위, 저의 거친 붓질과의 싸움에서 이겨 살아남은 존재들이죠. 요즘 이배(서양화가) 선생님, 신문섭(조각가) 선생님, 이강소(전위미술 작가) 선생님 작품을 보면 점점 더 심플해지는 게 느껴져요. 그런 선배님들을 보면서 ‘난 더 심플해지면 안 되는데’ 하다가도 ‘이런 변화에 동시대적인 무엇이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에게 질문도 하는 중이에요.
아까 컬러 밴드 작업을 할 때 여러 차례 물감을 덧칠한다고 하셨는데요. 한 작품에 몇 회쯤 덧칠하시나요.
바탕에 어떤 색을 칠했느냐에 따라 다른데 많을 때는 10회 이상 칠하는 것도 있어요. 요즘에는 물을 좀 덜 섞어 한 5~8회 정도 하고요. 보통 하루에 한 컬러씩 작업하고, 몸이 안 좋으면 이틀까지 넘어가기도 해요. 규정되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밴드 컬러를 계속 순하게 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색 때문에 지도 교수를 바꾼 일화가 있으시잖아요.
블라디미르 벨리코빅(유고슬라비아 화가) 지도 교수가 작품 색을 더 빼라 했죠. 당시 작품에 색을 (다채롭게)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자꾸 빼라는 거예요. 그때 블루·그레이·레드 컬러를 썼어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색이 많았나 봐요. “아틀리에를 옮기겠습니다” 했어요. 당시 선생님 밑에 들어가야 최고가 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무식했던 거죠. 프랜시스 베이컨(영국 현대미술 거장)을 친구로 두고, 프랑스 문화훈장을 받을 정도로 굉장히 유명하신 분이에요. 모든 살롱전(미술 단체의 정기적인 전람회)에서는 최고 위원이셨어요.
작가님에게 흔쾌히 나가라고 하시던가요.
선생님 눈에서 불이 나더라고요. 한번 옮기면 돌아오겠다고 애걸복걸해도 못 돌아올 줄 알라면서요. “괜찮아요. 교수님 저 알아요. 나갈 거예요” 그러고 나왔어요. 그 뒤로 출전한 살롱전마다 떨어졌죠. 그때 친구가 말해주더라고요. 벨리코빅 선생님이 모든 살롱전의 심사위원장이라는 걸요. 하물며 제가 갔었던 파리 시테 데자르(국제예술공동체)의 명예 무슨 회장, 위원이래요.
아틀리에를 나간 이후에 교수님과 마주친 적 있으세요.
한 번도 못 마주쳤는데 일화는 있어요. 저희 학교가 프랑스 문화성에서 관리하는 학교라, 나랏돈으로 해외를 보내줘요. 벨리코빅 교수님 반이 10일 동안 중국 여행을 갔다 왔대요. 그사이 ‘피가로’지에 모나코 왕국상을 받은 제 기사가 나온 거예요. “한국 여자애가 받았는데 너 이거 봤어?” 그랬더니 교수님이 고개를 돌렸대요(웃음). 선생님 밑에 계속 있었어야 잘나갔을 텐데. 심지어 유학생들은 (살롱전) 상금을 받으면 도움이 많이 돼요. 당시 10만 프랑, 몇천만원이라 상금이 컸거든요.
중견 여성 작가로 살아남기
어느덧 하태임은 중견작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1973년생, 한국 나이로 올해 지천명(知天命)이다. 한국 화단에서 이른바 ‘잘나가는 작가’를 꼽으라면 빠지지 않을 만큼 명성을 쌓았고 대중적 인기도 얻었지만, 그는 작가로서의 삶이 여전히 어렵다고 말한다. 스스로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라 하고,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는 5월 27일부터 6월 12일까지 서울옥션에서 개인전 ‘Yellow, 찬란한 기억’을 개최한다. 인간이 태어나고 망막이 형성되면 가장 먼저 보는 색이라는 옐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 따뜻한 빛과 같은 색에 집중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옐로 하면 “어린 시절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나를 돌봐주는 고모가 대청마루에 누워 귀를 파주던 순간이 생각난다”고.
사실 서구에서 옐로는 배신의 색으로 여겨진다. 동양에서는 황금, 황제를 상징하는 색. 작가는 문화·역사·나라·연대기적으로 색에 대한 고정관념과 해석이 달라 옐로가 가진 의미 중에서도 ‘빛’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전 그림에도 옐로 컬러가 굉장히 많아요.
그림을 옐로(컬러 밴드)로 다 지웠거든요. 화이트와 옐로만으로요. 가끔 레드로도 지웠는데 옐로가 가장 많아요. “내가 (옐로를) 왜 쓸까” 스스로에게 물어봤어요. 제 생각에 옐로는 자연에 펼쳐졌을 때 가장 기쁨을 주는 색이에요. 콘트라스트(대비)도 강하고, 경계의 색이지만 눈에 확실하잖아요. 노란색만 갖고 진검승부를 해보자 한 거죠. 어찌 보면 지름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어요. 단색으로 작업하는 게 사실 더 어렵거든요. 사람들이 저를 “색채 마법사”라고 해요. 색을 잘 쓴다고요. 제게 색은 그림 작업의 무기와 같아요. 여러 무기를 사용해서 그림을 완성하면 실수할 가능성이 줄어들죠. 예쁜 색이 (작품을) 보호하니까요.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하태임은 엄마이자 아내, 작가였다. 매번 세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여성 작가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하태임은 젊은 여성 작가들에게 힘을 주는 빛이 아닐까. 그는 “요즘 황지현 작가의 작품을 눈여겨보고 있다. 얼마 전 황 작가가 전시회 여는 걸 알고 가서 ‘마주치다’(2019) 작품을 사 왔다”며 동료 여성 작가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어 더 많은 여성 작가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하태임 작가의 작품 아카이브
이진수 기자의 비하인드 아틀리에
美에 사는 기자.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공간이 좋아서 갤러리에 간다. 참을성이 없지만 근성은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선생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세계 곳곳 아틀리에 탐험을 계속할 참이다.
h2o@donga.com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하태임 사진출처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