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하늘은 참 높았다. 맑고 푸른 하늘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구름 낀 하늘은 오히려 떠나는 나에게 산뜻한 바람을 불어주었다. 마치 나를 태운 비행기가 순항하길 바란다는 듯이.
"조심히 다녀오겠습니다." 출국장 앞에 서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다.
자기 몸만 한 배낭을 메고 생애 첫 국제선을 타고 세계여행을 떠나는 아들을 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약간의 걱정과 함께 그럼에도 너를 응원한다는 응원의 눈빛이 공존하고 있었다.
공항은 한산했다. 제주 토박이인 나는 제주국제공항에서 출발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로 향하는 말레이시아의 저비용 항공사 '에어 아시아'를 이용하기로 했는데 역시 가장 저렴한 가격이 선택의 요인이었다. 인천에서 네팔 카트만두로 가는 직항이 있었으나 알바를 해서 모은 푼돈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2번의 경유, 1박 3일의 일정
대한민국 제주에서 네팔 카트만두로 나의 향하는 여정은 이러했다.
1) 제주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2)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 방글라데시 '다카'
(다카에서 하루를 머문 뒤)
3) 방글라데시 '다카' -> 네팔 '카트만두'
무려 스탑오버 2개, 총 1박 3일의 조금은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젊음은 가난하다. 그렇지만 이 가난이 젊음에게는 낭만이란 것을. 나는 힘든 여정이 될 것을 알았음에도 무려 나라 두 개를 더 들릴 수 있다는 것에, 누구도 가지 않는 방글라데시를 생애 첫 여행지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속으론 바보같이 실실거리며 혼자 작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비행기 내부는 조용하고 쾌적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봤다. (내 자리는 창가 자리였다)
비행기 창문을 통해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공항의 계류장 뒤로 시내의 큰 호텔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는 역시 한라산이 높이 솟아있었는데 가을의 햇살을 받아 녹음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푸른 하늘이 이 모든 풍경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했다. 잠시 뒤 비행기는 부드럽게 활주로를 따라 떠올랐고 그렇게 나의 모험도 시작되었다.
비행은 순조로웠다. 나는 비행기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을 햇살을 느끼며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차례로 지났고 이내 내 눈에는 까만 땅 위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들어왔다.
"Ladies and gentlemen, our flight... Kuala Lumpur International Airport.."
비행기에서 착륙을 알리는 기내방송이 울린다. 비행 내내 규칙적으로 뛰던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나는 이내 앞으로 다가올 모험에 대한 기대와 그것보다 더 큰 환승에 대한 걱정이 점점 더 커지는 심장 박동과 함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걸 느낀다.
비행기는 반짝이는 말레이시아의 도시 위를 천천히 가로질러 어둠을 뚫고 조심스럽게 활주로를 따라 고도를 낮췄다. 그리고는 이내 요란한 착륙음과 함께 시끄러운 엔진음-아마 엔진의 역추진음이 아닐까-을 내며 거대한 동체의 속도를 천천히 낮췄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항공기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자 나는 벨트를 풀고 6시간여의 비행 동안 뻐근했던 척추에 기지개를 켜며 쭈욱 늘려줬다. (이때 나는 우두득 소리보다 만족스러운 소리가 있을까?)
PM 08:00, 6시간 뒤인 새벽 2시에 나는 방글라데시 다카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간단하게 공항 맥도날드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생애 첫 외국에서 영어로 하는 주문이라 매우 떨리면서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주문이 5초 만에 이루어져 조금 실망했다) 공항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때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알게 되는데 쿠알라룸프르 공항에는 두 개의 터미널이 있고 내가 타야 할 비행기의 탑승구는 터미널 2에 있다는 것!
비행기 탑승까지는 1시간 여가 남은 상황. 나는 서둘러 터미널 2로 가는 방법을 찾으려 했으나 첫 해외여행부터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심리적 공포가 덮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무작정 터미널 2로 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공항을 이리저리 뛰었다.
급한 마음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년의 남성에게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Excuse me sir, do you know..." 실례하지만 터미널 2로 가는 방법을 아시나요? (헉헉 숨을 헐떡인다)
중국계로 보이는 그 중년의 남성은 나와는 반대로 차분하고 의연한 태도로 터미널 사이를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있으며 저기 아래로 내려가면 정류소가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짧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쏜살같이 그가 안내해 준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아 숨이 차오른다. 20kg에 육박하는 배낭을 메고 달리자니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토할 것 같은 느낌을 억누르며 미친 듯이 달려 그가 말해준 장소에 왔으나 정류소는 보이지 않고 나는 패닉에 빠져 곧 터질듯한 울음을 참으며 잠시 쉬고 있던 공항 청소부에게 다가가 셔틀버스 정류소가 어딨는지 아냐고 물었다.
그는 손짓으로 저쪽 건물 끝 출입구를 가리켰다. 나는 짧게 "Thank you, sir"을 외치고는 다시 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그가 가리킨 출입구를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탑승까지 1시간 정도 만이 남은 상황이고 공항까지는 셔틀버스로 20분, 버스는 10-15분 간격으로 오니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심지어 짐도 맡기도 탑승수속까지 해야 했던 상황! (비용감축을 위해 하나의 연결된 항공편이 아닌 개별적인 항공편을 예약했기에 매번 새로 집을 맡기고 탑승수속을 해야 했다)
그가 가르쳐준 출입구의 문을 박차고 나오니 바로 옆에 셔틀버스 안내판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전광판을 보니 다음 버스는 10분 뒤에 온다. "버스 도착까지 10분, 가는 데 20분, 항공사 부스까지 10분, 짐 맡기고 탑승 수속하는데 10분... 아, 이런 나 탈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대략적은 소요 시간과 남은 시간을 계산하고 탈 수 있을지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항상 가능성을 확률적으로 계산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MBTI 'T'의 습관이랄까?)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보다 힘든 일도 없는 것 같다. 나는 무거운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쭈그려 앉아 버스가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가로등 밑에서는 날벌레와 나방들이 한대모여 춤을 춘다. 누구에게는 춤과 연희의 밤이 내게는 초조함과 기다림의 밤이라니..
기다림 속 만고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10여분의 시간이 지나고 셔틀버스가 저 멀리서 천천히 다가와 정류장에 선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을 메고 버스에 오른다. 버스 내부는 조용했는데 텅 빈 좌석들만이 희미한 버스 내부등 아래서 조금은 침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버스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배낭을 옆자리에 두고 숨을 골랐다. 그렇게 나와 기사님만을 태운 버스는 고요한 터미널과 터미널 사이의 어두운 도로를 달렸다. 급한 내 맘과는 다르게 버스 기사님은 느긋했고 버스도 규정 속도에 맞춰 부드럽게 느긋히 도로를 달렸다.
"초조하다 초조해.." 나는 당장이라도 기사님께 달려가 비행기를 놓칠 거 같으니 좀 더 액셀을 밟아 달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자리에 등을 피고 꿋꿋이 앉아 다리를 떨며 -본인은 다리를 떠는 습관이 있다- 빨리 도착하기만을 기도했다. 그렇게 20여분을 달려 드디어 터미널 2가 눈에 들어오고 버스는 역시 아주 천천히 정류장에 정차했다. '뿌시.. 끼이잉 덜컹' 버스의 에어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리고 나는 한 마리의 경주마처럼 버스에서 내려 공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때부터는 특별한 기억이 없다. 그저 정신 없이 뛰어다니며 탑승 수속을 위해 항공사 부스만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을 뿐. 그래서 결말은 어떻게 됐을까? 과연 나는 탑승 수속을 무사히 마치고 방글라데시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