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쇼(1998)> & <타인의 삶(2006)> 에세이
우리는 각자의 시선으로 서로를 관조한다. 눈동자에서 잉태된 시선은 눈빛으로서 반사되어 피사체의 그림자를 남긴다.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거울에 맺힌 상처럼 표면적으로 구성된 이미지가 아니다. 우리는 타인의 평판이자 시선으로부터 뻗어져 나온 자아의 그림자를 통해 스스로의 윤곽을 마주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에서 빚어진 그들의 그림자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이해한다고 자부한다.
<타인의 삶>과 <트루먼 쇼>는 타인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을 통해 우리의 윤곽을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들이다. 타인의 시선은 씨헤이븐의 달과 같이 우리 머리 위에 있을 수도, 아니면 라즐로 작전처럼 우리의 발 밑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크리스토프와 비즐러, 드라이만과 트루먼처럼 그들의 위치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시선이 어떻게 우리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들 또한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이 두 작품에서는 바라보는 시선과 지켜보는 시선이라는 맞닿을 수 없는 두 개의 눈빛이 교차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두 사람의 동공이 마주친 그 순간, 우리는 자아의 그림자뿐만 아니라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잔상으로도 우리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진실된’ 윤곽을 접하게 되는 그 순간, 우리는 시선으로부터 해방된 삶보다 아름다운 가치인 ‘시선과 어울려 살아가는 아이러니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 글에서 필자는 <타인의 삶>과 <트루먼 쇼>에서 시선의 교차가 만드는 아이러니한 공존의 가치를 탐구한다.
<트루먼 쇼>의 미장센은 시각적 효과를 통해 내러티브의 극중극 구조를 부각시킨다. 높은 심도와 피쉬아이 등의 과장되고 왜곡된 카메라의 구도, 클로즈업이나 핸드헬트 등의 역동적인 카메라 무빙은 작품 내내 지속되는 파스텔톤의 색조와 높은 명도로부터 기인한 ‘인공적임’이라는 느낌과 결부되어 TV 드라마와 같은 느낌을 연출한다. 이는 씨헤이븐의 숨겨진 여러 카메라를 통해 TV로 송출된다는 플롯의 서사적 구조를 보강한다. 노이즈가 끼는 브라운관의 3:4 프레임과 1.85:1의 와이드스크린 프레임들이 전환되며 비춰지는 여러 화면들의 대비는 <트루먼 쇼>를 1인칭 관찰자가 진행하는 작품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는 전시회에 온 것과 같은 효과를 내며, 관객들은 트루먼의 시야에서 세상을 관찰할 뿐, 그와의 감정적 유대를 쌓을 수 없게 된다.
작품의 1/3이 지난 후, 카메라는 드디어 ‘진짜 트루먼의 가짜 일상’에서 ‘가짜를 만드는 진짜 사람들’의 모습을 비춘다. 외부 세계라는 존재로 인해 트루먼의 진짜 세상은 가짜로 기정사실화되며,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트루먼은 관찰자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피사체’로써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시청자와 트루먼 쇼의 관계자들은 트루먼을 그들의 시선으로써 바라보지만, 영화는 트루먼의 시선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시선의 이분법적 분단을 가시화한다. 외부 세계의 사람들은 간접적이면서 적극적으로 말을 건네는 시선으로써, ‘인간 트루먼’이 아닌 ‘트루먼 쇼’로써 작품의 일방적이고 관조적인 시점을 유지시킨다.
이와 반대로 <타인의 삶>의 미장센과 무드는 정적이다. 이는 시대적 배경이자 비즐러의 소속인 동독의 슈타지(STASI)라는 소재가 결부되면서 차분한 분위기는 서스펜스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따뜻한 색조의 드라이만과 무채색과 차가운 색조인 감시실의 장면은 서로 교차되며 대비를 이룬다. 두 공간이 이어지는 드라이만의 집 앞 공간은 낮과 밤에 맞춰 흰색과 검정색의 톤에 장악당한다. 드라이만과 낮, 비즐러와 밤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적 구도는 위의 서스펜스와 결부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체제의 감시를 비판적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비즐러의 시선으로 바라본 드라이만의 삶을 비춘 후, 비즐러는 처음으로 ‘세수’를 하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이는 간접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가며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획득하는 경위가 된다. 비즐러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을 기점으로, 그는 냉혈한의 ‘감시자’에서 사람의 마음을 가진 한 명의 ‘관조자’로 변모한다. 타인의 삶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가진 채 관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내면의 ‘의구심’과 임무에 대한 ‘회의감’은 비즐러의 얼굴 속에서 점층적으로 비춰지다가, 크리스타와 장관의 억압적·부도덕적인 관계를 목격하는 장면과 드라이만이 예스카의 죽음을 기리며 영혼을 울리는 소나타를 연주하는 두 장면을 거치며 외부적으로 드러난다. 도청기 너머로 들려오는 삶의 소음들을 넘어선 진정한 인간다움과 사랑을 갈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비즐러가 바랬던 삶이었으며, 체제 따위로 막을 수 없는 드라이만의 진정한 인류애로부터 전달받은 인간성이자 삶인 것이다.
<트루먼 쇼>는 메타적인 시선을 의도적으로 가시화한다. ‘스크린’이라는 매체를 통해, 외부 세계와 위의 시선을 극에 개입시킨다. 반면 <타인의 삶>은 은밀한 내부의 시선을 타자기의 ‘보고서’로 남긴다. 이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은 외부 세계에 사로잡힌 타인과 민중들은 ‘질문을 건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반복되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방관’하는 태도를 지닌다. ‘침묵하는 시선’으로, 이들은 우리가 자아를 망각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두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스크린’과 ‘보고서’에 반대되는 오브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거울’이다. 거울을 통해 트루먼과 비즐러는 침묵하는 타인의 시선과 반발하는 자신만의 시선을 발견한다. 두 시선이 맞닿은 순간의 정반합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윤곽을 인식하고, ‘무의미’하며 반복되는 가짜 일상 속 ‘유의미’하고 ‘진짜’인 의구심을 품는다. 즉, 그들에게 말을 건네는 시선- 고발하는 시선-은 다름 아닌 ‘그들 스스로의 시선’이자 ‘자아의 자각’인 것이다.
스크린과 보고서는 무언가를 기록하나 그 기록에는 ‘비고의적 고의성’이 존재한다. 기록을 작성할 당시의 개입은 존재할 수 있을지언정, 기록 그 자체의 이야기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울은 다르다. 거울은 빛이 반사되는 상을 비추나, 거울에는 한 점의 고의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트루먼 쇼>에서 작품 내내 등장하는 ‘가짜 속의 진짜를 찾는 행위’는, <타인의 삶>에서 비즐러가 “이건 나를 위한 책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엔딩 씬으로부터 직접적인 메시지를 갖는다.
거울에 반사된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반대되는 단 한 줄기의 시선. 나의 시선만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이야기에는 항상 끝이 존재한다. 허나 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말’은 생명력을 잃지 않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두 시선이 교차된 후 우리는 자아를 인식한다. 메타인지를 얻게 된 후, 우리의 자아는 ‘변화’를 갈망한다. 말을 건네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을 바꾸는 시선’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트루먼 쇼>와 <타인의 삶>은 중반부 이후, 권력 체제의 숨겨진 목적이 드러나며 숨겨진 동기를 나타내는 플롯 구성을 지닌다. 이처럼 권력 체제의 주체성의 변화는 피감시자에서부터 기인하나,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가 변화함에 따라 피감시자의 주체성 또한 그 영향으로 인해 변화한다.
<트루먼 쇼>의 크리스토프는 단순히 ‘트루먼의 감금’이 목적이 아니다. 그는 거대한 쇼 비즈니스의 운영자이다. 쇼는 여러 자본들의 광고와 스폰서쉽으로 이루어지기에, 그는 트루먼을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기 보다는 ‘트루먼 쇼’의 주인공으로써 치부한다. 실비아를 그리워하거나, 아버지가 재등장하고, 비바람을 견디는 트루먼의 모습을 크리스토프는 감동스럽게 연출한다. 이러한 씬들을 통해 크리스토프라는 권력 체제의 주체성은 ‘트루먼 쇼의 유지’에서 ‘시청률’로 변화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시청률’이라는 단어가 등장함에 따라 <트루먼 쇼>에서 외부 세계는 플롯에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피사계 심도는 더욱 옅어지고, 스크린에 등장하는 배경은 세트장과 외부 세계 사이의 경계를 방황하며, 내러티브는 코미디에서 드라마 장르로 변모한다. 카메라는 자신의 존재와 심지어는 프레임의 외곽 부분을 직접적으로 화면에 등장시키는 금기시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노골적으로 시사한다. 씨 헤이븐이, 트루먼의 세계가 지각 변동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의 시선에 피지 섬으로 향하는 수평선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타인의 삶>의 비즐러는 <트루먼 쇼>의 크리스토프와 달리,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감시자에서 피감시자의 입장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는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자신의 직무가 도리어 공과 사의 경계가 무너짐에 따라 사명에 어긋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진실을 깨달은 비즐러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더 높은 권력으로 인해 권력 체제의 주체성에서 멀어지게 된다. 라즐로 작전은 드라이만의 연인인 크리스타를 장관의 노리개로 만들기 위한 부도덕적인 연유로부터 촉발되었다. 스승의 죽음 등 여럿 악재가 겹쳐오며 드라이만은 한 명의 인간으로써 고통을 노래하게 된다. 그 연주를 듣게 된 순간의 비즐러는, 권력 체제의 주체성을 완전히 내려놓은 채 한 명의 인간으로, 일종의 드라이만의 ‘팬’으로써 변모하게 된다. 그는 ‘심문’이라는 자신의 직무에 가장 부적합한 인간성을 일깨우게 된 것이다.
비즐러는 피감시자와 감시자라는 연쇄적인 권력 관계에 중첩되어 있으면서도 그 간극을 제한적으로나마 왕래한다. 하지만 그는 팬심으로부터 연유된 보고서에 ‘의도성’을 본격적으로 기입하기 시작하면서 또 한명의 피감시자로써 완전히 변모한다. 이때부터 드라마의 내러티브는 조용한 서스펜스의 면모로 접어들게 된다. 장르가 스릴러로 바뀌는 순간이다. 심문실을 비추는 오프닝 장면은 비즐러의 시선에서 전개되나, 후반부 크리스타와 비즐러의 심문 장면은 제 3의 시선인 매직 미러 뒤 안톤 중령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타인의 ‘삶’을 자신의 시선에 담던 비즐러는 어느새 ‘타인’으로써 심문실에 등장한다. 그는 편지를 보내는 작은 책상 앞의 피감시자로 완벽히 변모하면서 역전된 인과관계의 시선 속의 피사체로 녹아들게 된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트루먼. 그를 지켜보는 실비아. 비록 눈이 맞닿지는 않았지만 스크린을 넘어 두 시선은 서로 교차하듯 연출된다. 다른 이들은 화면 속 어둠으로 사라진 트루먼을 금세 망각한다. 그러나 실비아는 화면 속 프레임의 경계를 뛰어넘고, 진짜 피지 섬을 향하는 배를 탈 트루먼을 맞이하러 나선다. 둘의 시선은 완전히 단절됨에 따라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트루먼은 기억 속 ‘가짜’ 이름인 로랜 갈랜드가 아닌, ‘진짜’ 인간인 실비아를 만나러 그의 진정한 모험을 떠난다.
크리스티가 떠난 지 4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4년. 보고서 마지막 장의 붉은 잉크 자국을 건너, 택시의 창문 너머. 도합 8년이라는 시간은 HGW XX/7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기까지 걸린 시간과도 같다. 서점에 걸린 커다란 드라이만의 포스터를 본 비즐러. 두 남자는 ‘보고서’와 ‘소설’이라는 종이 위의 잉크 자국을 통해 서로의 시선을 느낀다.
<트루먼 쇼>는 ‘주체적인 삶’의 태도라는 주제이자 ‘메타포’를 작품의 주요 원동력으로 사용한다. 관객들은 ‘트루먼 쇼’의 주연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써 트루먼은 과연 미디어의 후광을 넘어설 수 있을지에 대해 의아해하곤 한다. 만들어진 삶을 영위해 온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만들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은 주체적인 삶을 회복해야 할 가치이자 이상으로써 제시한다. 드라이만과 비즐러는 서로에게 타인이었고, 방식은 다르나 그들은 타인의 삶을 관조하게 되었다. 그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톱니처럼 맞물려 서로에게 ‘진실되게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두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을 작품의 마지막에 배치시킨다. 그리고 그 시선이 교차하는 윤곽을 통해 진정한 우리를 마주하게 된다. ‘바라보는 시선’과 ‘지켜보는 시선’은 연쇄적이며, 거시적으로는 동등한 위치를 지니기도 한다. 이러한 시선들이 가지각색으로 다르게 우리를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내 자아의 평판이라는 그림자를 비추는 ‘나의 사회적 위신’과 나의 세계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타인은 피관찰자의 특징만으로 우리를 유사한 종의 아류로써 ‘치부’한다. 마치 <트루먼 쇼>의 카메라를 비추는 스크린과, <타인의 삶>의 도청 장치가 일으키는 소리의 디지털 ‘열화 현상’과도 일맥상통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아의 해상도를 높이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는가? 씨헤이븐의 출구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크리스타를 잃게 만든 원흉임에도 불구하고 비즐러의 영혼을 위한 소나타를 집필한 드라이만과 같이,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의 시선을 발견해야 한다. 즉, 우리는 나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 속 그 간극에서 공존해야 한다. 마치 두 눈에 비친 물체의 상이 한 군데로 모여 시선 속 물체를 이루듯이 말이다.
결국 두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선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은 불가능하며 불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타자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만나는 그 교차점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그 아이러니한 공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트루먼 쇼>가 주체적 시선의 각성을 통해 탈출을 모색했다면, <타인의 삶>은 지배적 시선의 내적 전환을 통해 은밀한 구원을 실현한다. 하지만, 이때까지 꺼낸 모든 시선에 관한 말들은 사실 위 두 작품이 영화라서 가능한 이야기다. 우리는 아이러니와 공존할 수 없다.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이며, 주관적인 시선은 다른 시선과의 공존이라는 아이러니를 용인할 수 없다. 진실과 가짜는 상대적이며, 우리는 여전히 미디어가 재현하는 과정에서 야기하는 스크린의 ‘열화 현상’ 속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을 통해 스스로를 판단한다. 두 영화가 제시한 '시선의 교차'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에서 관객과 스크린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우리는 트루먼과 비즐러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가 된다. 스크린 속에 투영된 인물들만이 오로지 이러한 모순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스크린 속에서 현실의 아이러니를 외친다. 예술로서의 영화라는 거창한 말은 ‘아이러니’를 잉태한 채 태어난 새로운 매체를 별칭한다. 영화는 우리에게 ‘스크린 속 세계로의 전이’라는 영화적 체험을 약속한다. 나의 집단과 소속에서는 절대로 경험하거나 느낄 수 없던 사건과 감정을 전달받는 것이다. 그것이 관람이라는 행위다. 영화관의 다른 타인들도 스크린을 응시하는 순간만큼은, 마치 정신이 연결되듯이 주인공과 카메라의 시점에 공감하고 이입한다. 서로 다른 시선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공통된 화면을 눈 속에 투영한다. 서로 다른 감정의 차이와 여러 이견에도 불구하고, 비대칭적이고 간접적인 경험의 공유는 점점 파편화되는 사람들 사이에 미묘한 연대의 기류를 형성한다. 절대 맞물리지 않는 퍼즐 조각들이 손을 잡는 순간.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는 ‘자신과 상이한 시선으로의 감정이입’을 일으키며 스크린 속 아이러니를 현실로 끌어들인다. 즉,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타자의 시선을 경험하는 연습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일상에서도 더 넓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이때만큼은 우리도 파편화된 시선들의 아이러니를 초월하여 서로에게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문명이 발달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멀어져 간다. 물리적인 접촉은 자연스럽게 줄어들며 감정적 교류는 꺼려지는 행위가 되고, 혐오라는 간편하고 익숙한 행위에 편해져버린 사람들은 ‘개인화’라는 ‘인간의 섬’에서 점차 고립된다. ‘공감’이라는 마음의 가장 약한 부분을 감추는 데 익숙해지는 사람들. 우리들은 그 감정의 반대급부인 혐오의 열기로 인해 인류애를 메말라버리게 만들었지 않았을까. 잃어버렸던 ‘공감’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눈이 멀도록 쉴새없이 퍼붓는 타인의 시선과 지켜보는 시선들에 비춰지는 순간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우리의 ‘지켜보는 시선’을 지켜내야 하는 경험에 다시금 익숙해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트루먼 쇼>의 '바라보는 시선'과 <타인의 삶>의 '지켜보는 시선'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시선의 권력학을 드러내지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관객과 만나는 순간 새로운 차원의 '교차하는 시선'을 창출한다. 즉,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시선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다양한 시선들과의 창조적 공존이다. 멀어져 가는 마음 사이의 다리를 놓기 위해서 우리는 ‘바라보는 시선’과 ‘지켜보는 시선’ 속에서 서로 타협하고 양보하면서 시선의 간극이라는 아이러니를 포용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트루먼 쇼>처럼 위도 아니고, <타인의 삶>처럼 아래도 아니다. 그저 영화가 끝난 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우리를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완전한 해방이 아닌 공존의 길을 택하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진정한 공감과 그 의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