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2009)> & <패스트 라이브즈(2023)>
여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까. 무더운 햇빛이 내리쬐면 영화는 사랑을 들고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500일의 썸머>, <패스트 라이브즈>. 이 두 영화에서 ‘여름’이라는 계절은 ‘설렘’을 몰고 온다. 설렘은 마치 감정의 중력과도 같아, 세계에서 반사되어 눈에 들어오는 빛들을 ‘굴절’시킨다. 그렇게 우리는 설렘의 열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로 인해 우리의 세계를 무의식적으로 곡해하게 된다.
<사랑의 단상>에서 롤랑 바르트는 연애를 ‘나 – 너 – 내 생각 속의 너’라는 삼각 관계로 통칭한다. 우리는 환상과의 사랑에 빠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마음이 점차 식어가고 가슴 뛰는 순간들이 사라지면, 그제서야 우리는 가을이 온다는 것을 알아챈다. 설렘은 그 빈자리에 여름의 ‘잔열’만을 남긴 채 사라진다. 하지만 그 미련은 시간이 지나며 우리를 성숙시키고, 남아있는 여름의 마지막 내음은 그 따스함을 또 다른 이에게 건넬 원동력으로 변모한다.
설렘은 ‘끌림’과 ‘떨림’처럼, 우리 주위의 보편적인 동사들을 메타포로 빌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운명화한다. 톰과 썸머는 더 스미스의 노래를 좋아하게 된 계기로, 노라와 해성은 과거의 인연을 바탕으로. 여름은 이들이 사랑을 키워 나가거나 재회하는 순간이자, 이들의 사랑을 상징하는 계절이 된다. 여름은 몽환적이고, 경쾌한 사랑 그 자체의 상징이 되어 그 끌림과 떨림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이야기는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500일의 썸머> 오프닝 시퀀스의 첫 문장이다. ‘설렘’이 선물한 호감은 두 사람을 ‘우리라는 관계’에 종속시킨다. 이것이 ‘오해’가 아니라 ‘곡해’인 이유는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들을 책망할 수 없다. 이들은 설렘의 중력이 굴절시킨 왜곡된 순간들을 진실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바르트가 말한 '내 생각 속의 너'가 바로 이것이다. 즉, 톰이 사랑에 빠진 대상은 실제 썸머가 아니라, 설렘의 중력이 만들어 낸 '이상화된 썸머'였다.
갓 태어난 사랑은 상대방을 숭배하기 마련이다. 마치 톰이 썸머를 바라보았던 시선처럼 말이다. 그러나 곡해에 물들어버린 마음은 자신이 어떤 형태의 사랑을 전달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라는 단어가 선물하는 설렘의 중력은 너무나도 편안하기 때문이다. 톰이 썸머를 지키기 위해 주먹을 날린 것이 아니라, 그를 얕보았을 때 주먹을 날린 것과 같이, 안일한 편안함 속의 연인은 상대방을 나와 동일시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이들은 ‘우리’라는 명칭을 ‘너’와 ‘나’라는 이름 위에 덧칠하고, 서로를 하나로 간주한다. 그러나 설령 이러한 오류를 범해도, 갓 결실을 맺은 사랑은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마치 여름의 열기와도 같이, 설렘은 ‘아지랑이’라는 사랑의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아지랑이’는 ‘신기루’와 달리,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는다. 단지 눈 앞의 상대방의 형상을 아른거리게 만들어 이성적인 판단을 흔들어놓는다. 그러나 아지랑이에는 단 한 톨의 의도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도성이 배제되었기에 설렘의 열기는 다른 모든 심적 열망과 다르게 ‘순수’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 눈앞의 누군가를 일렁이게 하는 이 열기는 다름 아닌 내 마음에서 피어 나오고 있다. 사랑이라는 화학 작용은 이를 금세 잊어버리게끔 종용한다. 즉, 설렘은 항상 아지랑이라는 이름의 환상을 동봉한다.
‘expectations vs reality’ 시퀀스는 <500일의 썸머>의 주제의식을 표현한 이 영화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다. 톰의 유년기와 ‘썸머 효과’를 설명하는 플래시백 시퀀스, 그리고 타임라인을 옮겨다니며 표현된 톰과 썸머의 연애는 스크린의 중심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은 채 대조되는 구도를 사용한다. 관객은 이들의 연애 장면에서 두 사람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인지할 순 있지만 보이지 않는 중앙선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리고 이 이분법적인 구도는 톰이 환상속에 살고 있고, 현실과는 얼마나 다른 괴리가 존재하는지 여실없이 드러낸다. 두 사람이 만남을 이어갔을 땐 적어도 한 프레임 안에 존재하기라도 했지만, 이 시퀀스에서 톰은 ‘expectations’에 살고, 썸머는 ‘reality’에 산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세계는 톰이 ‘예상’을 함으로써 영원히 멀어지게 된다. 톰은 검정색 프레임을 넘어 ‘현실’로 나아가기에는 아직 미숙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내레이션은 이 영화가 로맨스를 표방하지 않는다 했지만, 정작 <500일의 썸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는 ‘진실되게 상대를 바라보았는가’라는 후회를 담은 톰의 오답노트이다. 운명론을 부정하던 썸머가 결혼을 한 것도, 카드 회사를 그만두고 건축가의 삶을 살게 된 것도. 그는 퇴사를 하면서 ‘카드, 노래, 영화 그 모든 것은 거짓이고,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톰이 썸머를 생각하며 만든 ‘I love us’는 진실된 말이었다. 그는 썸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톰과 썸머의 잘잘못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다치며 상처입고, 그 상처를 아무는 과정에서 겪는 진정한 설렘과 사랑의 ‘잔열’에 대해 깨닫는 내용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노라는 뉴욕의 여름과 정체성에 뿌리를 둔 과거. 이 두 가지의 사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의 미혹으로부터 설렘은 피어나고, 아지랑이는 태어난다. 그녀는 아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노라와 아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아서는 노라를 알았지만 그녀를 이루고 있는 24년 전의 ‘울보’ 문나영은 알 지 못한다. 노라가 나영으로써 한국어로 잠꼬대를 하는 순간, 아서는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에 대해 이질감과 기시감이 공존하는 오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 아서에게 해성의 등장은 반가움과 두려움, 그 간극 속의 무언가이다. 노라의 ‘나영’으로써의 정체성. 자신은 모르는 아내의 과거를 잘 아는 해성과의 만남은 단지 어렸던 아내의 잔재를 만나는 것이 아닌, 노라의 자아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이고 내면적인 순간에 다다르는 것이다. 이처럼 노라의 아지랑이는 스스로의 감정과 해성, 그리고 아서에게도 일종의 ‘환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은 진실된 타인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랑의 열기이기도 하나, <500일의 썸머>와 달리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른여섯 살의 해성’이라는 캐릭터의 존재로 아지랑이는 사랑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체성으로부터의 미혹이라는 확장된 의미를 지닌다.
스물네 살의 해성은 화면 속 노라와 연결된다. 하지만, 해성은 노라를 나영으로 인식한다. 해성의 미혹으로부터 뻗어 나온 ‘나영’의 그림자가 노라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해성은 자신의 설렘과 그 아지랑이로 인해 화면 속의 그 여자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서른여섯 살의 해성은 ‘나영’과 ‘노라’를 동시에 인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단정지음으로써, 해성은 스물네 살의 자신 속의 아지랑이를 넘어선다. 그리고 ‘나영’의 아지랑이에 사로잡힌 노라를 본다. 그는 자신의 설렘이 남긴 ‘잔열’을 그녀에게 전해주려 한다. 과거로부터의 일렁임을 겪는 그녀에게, 그는 마지막 작별을 건네러 뉴욕의 여름으로 떠난다.
불은 불씨에서 태어나 잔열로 돌아간다. 그것이 뜨겁게 타오르며 우리에게 주는 열기는 미온한 온기가 되어 잿더미 속에서 가냘프게 자신의 말을 건넨다. 불씨라는 설렘도 이와 유사하다. 설렘은 사랑의 열기가 식어가면서 온정을 품은 잔열이 된다. 그러나 설렘의 잔열은 불씨의 잔열과는 다르다. 설렘은 사랑이 불타오르고 남은 잔여물을 ‘잿더미’로 치부하지 않고, 사랑의 부산물이자 ‘성숙’의 증표로 인지하게 된다. 우리는 끝없이 과거를 반추하며 반성한다. 이러한 반성은 ‘아쉬움’. 곧 ‘미련’으로 변모하게 되나, 설렘의 잔열은 ‘미련’이 아니지만 미련이라는 과정을 거쳐갈 수는 있다.
미련으로부터 태어난 과거의 잘잘못에 대해 판단하는 어리석은 행위. '우리'의 행적에 대한 판단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하는 방식의 차이에 대해 깨닫게 된다. 사랑이라는 불길을 유지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불이 붙은 장작의 껍질이 떼어지듯,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시각으로부터 ‘탈각’한다. 그리고, 그대의 사랑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아닌, ‘너’라는 장작의 본모습을 인지할 때 우리는 사랑의 방식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게 된다.
<500일의 썸머>에서 톰의 반추는 관객이 보는 스크린을 따라 그의 과거들을 훑게 된다. 그는 숱한 일상의 반복 그 자체를 영위했고, 반복 속의 ‘안정’에 취해 많은 것을 잃었다. 이러한 ‘아지랑이’가 만들어 낸 우리라는 허울뿐인 관계로 인해, 톰에게 ‘우리’란 당연한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의 미숙한 사랑의 방식 중에서 유일하게 칭찬할만한 점은, 그는 매 순간 ‘진심’으로 임한 것이다. 그렇기에 톰은 퇴사하면서 일갈한 ‘우리는 거짓을 파는 사람들이다’라는 말에 대해 스스로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I love us’를 말했지만, 썸머에게는 ‘I love you’를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속에 종속된 썸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톰은 반추를 겪으며 성장했다. 이제 그는 꺼져가는 사랑의 불씨 속에서 잔열을 본다. 1년 하고도 조금 더 지난 시간을 겪은 톰. 녹엽이 짙은 나무에 단풍이 드는 듯, 그의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이라는 계절로 넘어간다. 그 여름은 톰과 썸머에게 진정한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할 시간을 남긴다. 톰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써, 썸머와 함께 보낸 여름의 설렘과 그 잔열을 통해 그의 삶 속의 가을을 따뜻하게 사랑할 것이다.
앞선 만남으로 인해 해성은 노라의 삶에서 ‘우리’가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12년, 그리고 또 12년. 세월은 사랑이라는 불길을 잠재우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나영’의 내음이 남은 땅에, 나영이 준 잔열을 품은 채 존재한다.
노라는 아서라는 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이어 갔으나, 그녀는 여전히 자신 속의 ‘나영’을 찾고 있다. 그녀는 “이십년 전 그 어린 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 라고 해성에게 말한다. 즉, 그녀는 ‘나영’을 해성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에, 아서는 영원히 노라 속의 ‘나영’에게 도달할 수 없다.
미처 잊어버리지 못한 과거의 흔적을 우리는 ‘미련’이라고 한다. 팔천 겁의 ‘인연’은 해성에게 ‘미련’이 되고, 노라는 미처 망각하지 못한 ‘나영’의 흔적들을 통해 과거에 대한 ‘설렘’이자 미련으로 변모한다. ‘사랑’은 두 명을 스쳐 지나갔으나, 그로 인해 노라와 해성은 역설적으로 서로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 여름은 노라와 해성에게 ‘전생’으로 치부할 과거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재회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해성은 ‘나영’이가 준 잔열을 노라에게 건넨다. 그 공간과 그 순간은 아서에게는 노라를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징검다리가 되고, 해성에게는 이십사 년을 지나 미처 건네지 못한 작별 인사가 되고, 노라에게는 ‘울보 문나영’이 자신에게 전해주지 못한 ‘사랑의 마지막 잔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