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태치먼트(2011)> & <죽은 시인의 사회(1986)>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둔 기간제 교사 헨리 반즈는 문제아들이 모인 학교에 새로 배정받는다. 그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식 밖의 행동들에 무력감(detachment)을 느낀다. 그러다 헨리는 에리카라는 매춘 생활을 하는 여자아이를 우연히 집에 들이게 되며, 타인과 단절(detachment)된 자신의 세계를 넓히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로 인해 헨리는 고군분투하게 된다.
미국의 입시 명문고교 웰튼 아카데미에 새로운 영어 교사 ‘존 키팅’이 부임하게 된다. 아이비리그로의 진학을 목표로 삼으며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이 학교의 졸업생이었던 키팅 선생은 ‘현재를 즐겨라(Carpe diem)’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자유 의지를 북돋아 준다. 그러다 키팅 선생이 속해 있었던 고전 문학 모임인 ‘죽은 시인의 사회’를 알게 된 학생들은 이를 이어 간다.
‘화자가 스토리의 구조 중 어디에 속하느냐’ 라는 쟁점은, 스토리텔링과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표현함에 있어 주요한 쟁점 중 하나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아이들의 시선에서 키팅을 바라보는 구도를 가진다. 이와 반대로, <디태치먼트>는 헨리의 시선에서 학교와 아이들을 바라보는 구도를 유지한다. 학생과 선생이라는 화자의 눈높이 차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부분을 주의 깊게 이야기하는지를 구분하게 한다. 두 작품은 ‘사회의 부조리한 면모에 대한 고발’이라는 공통적인 메세지를 ‘고전 문학의 교육’이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죽은 시인의 사회>는 ‘자유의지의 계몽’이라는 방식으로, <디태치먼트>는 ‘소외된 이들의 재소속’이라는 내러티브를 차용한다.
두 영화의 엔딩 시퀀스를 비교하면 각 작품이 주요한 메시지를 어떤 태도로 전달하는 지 알 수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책상을 딛고 일어서는 영화이며, <디태치먼트>는 책상에서 떨어진 부산물을 한탄하는 영화이다. 이 두 작품은 결국 ‘선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존 키팅’과 ‘헨리 반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만 학생이 바라보는 선생과 스스로가 생각하는 선생이라는 눈높이의 차이는, 존 키팅을 ‘우상’으로써 추앙하기도 하며 헨리 반스를 ‘소시민’으로써 경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선생은 교단에 선다. ‘본보기’로의 선생이 아니라, ‘먼저 태어난 한 명의 인간’이 가진 책임과 의무를 짊어 진 ‘선생’으로. 이정표를 짊어진 그 누구도 성자(聖者)가 될 순 없다. 하지만, 선생들은 기꺼이 오늘도 이정표를 짊어 진 채 눈높이의 사이에서 자신의 책무를 다한다. ‘사명’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되뇌이면서.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작품의 배경과 우리나라의 교육 체계와 유사한 점은 이 영화가 고평가받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존 키팅은 ‘모범적인 선생’의 모습을 지닌다. 그는 아이들이 보수적인 교육 체계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현재’를 살아가는 미래를 ‘환대’한다. 성공만을 고집하는 부모와 이를 정도(定道)로 못박은 세계 속 아이들은 천편일률적일수 밖에 없기에.
존 키팅은 환경으로 인해 억눌린 아이들의 본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는 “야성!” 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배출시켜 주기도 하나, 닐 페리와의 대화를 통해 분출만이 자유의지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알려준다. 규율을 어기는 자유는 규범으로써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을 통해, 학생들은 진정한 자유는 규칙으로써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Seize the Day”. 이 한 문장은 관성으로써 얻은 ‘일탈’을 일삼으며 얻은 자유의지가 아니다. ‘야성’이자 ‘본능’으로써의 자유의지가 아니며, 분출의 형태를 가진 자유의지도 아니다. 존 키팅이라는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형태의 ‘표출’로써,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규칙을 어기면서도 표출해야 하는 자유의지를 실행에 옮긴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키팅이 환대하는 카르페 디엠이 아닐까.
<디태치먼트>는 여러 함의를 가진 제목이다. 이 영화는 미국 공교육의 폐해와 그로 인한 가르침의 사각지대를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헨리 바스라는 사람의 내면은 무서우리만큼 공허하고, 단절되어 있다. ‘냉대’가 짙게 배여 있는 이 작품의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여러 인물의 속마음을 묘사할 때 나타나는 칠판 시퀀스의 과격한 이미지의 연출과 결합된다. 낮은 채도와 우울한 무드는 이 영화가 사회 고발적인 면모를 강화하려는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여러 사람들을 유대감으로 이어주는 영화라면, <디태치먼트>는 타인과의 연결로 인해 부딪히고 깨진 파편들에 상처입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변화하지 않는, 때로는 더욱 심한 비극으로 인해 덧나고 곪게 된다.
헨리 바스는 환경으로부터 아이들을 구분되게끔 한다. 환경은 아이들에게 관성을 선물한다. 관성은 곧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당연시하게 만든다. 헨리 또한 이러한 악순환을 겪고 성장한 인물이다. 환경의 관성 속에 성장한 무심한 어른들은, 은연 중에 자녀에게 저주와도 같은 악순환을 물려준다. 그러나 헨리는 메말라버리고 공허해진 이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 일개 ‘소시민’으로써의 헨리가 비관하며 냉대하는 삶의 태도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용기로써 변모하게 된다. 후대에게 이어지는 비극의 연쇄를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근절하려 하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타인과 거리를 둔(detachment) 헨리는, 그 자신의 냉대를 통해 분리된 이들의 마음 속 공허함과 외로움에 온정과 사랑이라는 가르침을 전하려 한 선생이다.
헨리 바스는 본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무기력함을 스스로의 선에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이들에게는 디태치먼트라는 단어를 계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헨리 바스는 ‘단절의 계승을 근절한다’는 목적을 절반만 성공하게 되었다. 자신의 선택을 번복하며 에리카에게는 구원을 선물했지만, 메레디스에게 선물한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에게는 영원한 단절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환기했을 뿐이다. 헨리는 용기를 담은 희생의 대가로 스스로에게 ‘단절’을 계승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인간성은 아픈 과거의 그늘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헨리의 할아버지라는 과거는 헨리를 속박함으로 인해서 역설적으로 헨리가 지닌 인간성의 마지막 징표라는 상징성과 헨리를 속박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상징성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헨리는 이에 대해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 헨리가 할아버지의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에게 가하는 폭력적인 태도는 그 또한 상처받은 아이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동시에 그는 과거로부터 탈피하고 싶다는 비언어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작중 은근히 시선을 피하는 헨리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은 과할 정도로 빈번히 등장한다. 이는 관객에게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현재 상태를 부정하는 회피와는 다르게, 헨리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수행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 그는 탈피가 아니라 도피를 바라는 것임을.
연결과 단절을 겪은 헨리는 엔딩에서 그의 내면 속 폐허가 된 교실을 프레임 속에 구현한다. 수염을 기르고 초췌해진 헨리가 진술을 하는 오프닝 씬은 작중의 클로즈업과 더불어 엔딩과도 연계되어, 작품의 전체적인 플롯이 ‘회상’이 아닌 ‘참회’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됨을 시사한다. 참회를 위해서는 우선 과거를 환기해야 한다. 플래시백을 주요 내러티브로 사용하는 타 작품들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과거로부터의 수많은 ‘연결’들을 중시한다. 그러나 <디태치먼트> 속 헨리는 이끌어낸 과거로부터 자신을 단절하려고 한다. 과거에서부터 끊어져 나온 지금의 자신을 다르다고 인식하면 이는 도피가 아니라 탈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끊어내지 못한다. 에리카를 구원함으로써 헨리는 과거의 자신과 동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용인하였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소속감’이라는 연결을 건네었기에 헨리는 ‘탈피’라는 자가 구원으로부터 스스로를 영원히 단절하게 된다. 이 영화가 에리카와의 재회가 끝난 후 해피 엔딩으로 변모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존 키팅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과거의 존재를 현재에 도래하게 만드는 ‘연결’을 계승하는 인물로써 변모하게 된다. 키팅은 아이들에게 자유의지를 심어줌으로써, ‘방법론적인 삶’을 지향하는 웰튼 고등학교에서문학과 시와 소설을 통해 ‘의미론적인 삶’을 추구하는 방향을 가르쳐주게 된다. 키팅은 인생의 조언자이자 학교 선배로써, 학생이었던 자신의 과거와 선생이라는 자신의 현재를 동일시한다. 학생이었던 키팅의 잔재를 바탕으로 학생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표방하는 웰튼 고등학교에서 죽은 시인의 부활을 갈망하게 된다. 진정한 삶을 추구하게 되는 사회를 찬미하게 되는 것이다.
키팅은 ‘올바른 자유의지’에 대해 관철하는 인물이다. 규제와 관습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인 언사이다. 자유의지가 커질수록, 이를 막아서는 여러 규칙들은 울타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키팅은 친구들을 데리고 동굴로 숨어들었다. 왜 하필 동굴이라는 장소일까? 이는 마치 우리의 조상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동굴은 선사 시대의 인류를 지켜 주는 보금자리였다. 그들은 벽에 그림을 그리며 노래하고, 그들에게 사냥당한 동물들의 넋을 빌었다. 살아남는 방법만을 추구하는 태초에도 문학과 예술은 삶의 의미를 관장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현재를 인식한 이들은, 그들 스스로의 사회를 새롭게 잉태하게 된다. 그곳에서 소년들은 원초적인 한 명의 인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진정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을 말이다. 닐은 연극이라는 꿈을 꾸게 되고, <한여름 밤의 꿈>의 퍽 역할을 따게 된다. 닐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타인에게 복종함으로써 처음으로 자유의지의 달콤한 과실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자유의지에는 언제나 응당한 대가가 따른다. 앞서 언급한 ‘올바른 자유의지’를 넘어선, 동굴에서 잉태된 ‘진정한 자유의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에 응당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닐은 키팅과는 달리 현실에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추구하는 사회. 키팅은 그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닐과 달리 적응과 타협이라는 두 가지의 가치를 조절하여 웰튼 고등학교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키팅은 신생 ‘죽은 시인의 사회’에게 본인이 이루지 못했던 가치를 이루기를 내심 바라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그것이 한 아이의 죽음으로 귀결되고, 본인도 모교에서 사라지는 결말로써 마무리되었으나, 아이들은 규칙도 막을 수 없는 진정한 자유의지를 깨닫게 되었다. ‘O captain my captain!’ 책상 위로 일어난 아이들의 행보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진정한 자유의지는 계승되었다는 것. 그리고 존 키팅은 ‘죽은 시인의 사회’로부터 잉태된 그 가치를 연결하는 것을 성공했다는 사실 단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존 키팅과 헨리 바스는 그들이 머물던 학교로부터 떠나가며 두 영화가 끝이 난다. 이들은 선생으로써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었다. 이제 이 이정표들은 갈 곳을 잃었다. 그러나 이 글은 그들의 미래와 그 막막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글은 이정표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나아간 이들의 발자국과, 그 이정표를 든 이들의 순교자와 같은 책임을 예찬하는 글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선생이 존재하고, 필자 또한 웰튼 고등학교의 게일 놀란 교장과도 같은 교사들로부터 받았던 여러 상처를 받기도 했다. 이는 헨리와 아수라장이 된 교실 그리고 닐의 죽음처럼 남아있는 자들의 흉터가 되어 앞으로의 삶에 그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가 있으면 빛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받았던 여러 가르침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때론 먼지가 쌓이면서 흉터처럼 보였던 선생의 채찍질이 진정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늦게 알아차리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를 미화라고 명명하며 빛바랜 과거는 손쉽게 입에 담을 수 있다는 주장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살아가지 않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과거는 경험과 가르침으로써 남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누군가의 선생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의 선생 또한 마찬가지이며 우리의 부모도 마찬가지이다. 배움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를 연결시킴과 동시에 타인과 구별되기 하는 경험으로 변모하게 된다. 존 키팅과 헨리 반스. 이들이 환대로써 이어가려고 한 연결의 계승과, 냉대로써 끊어내려고 한 단절의 계승은 그들의 이정표가 된다. 그 이정표는 갈 곳을 잃었음과 동시에 그 사명을 완수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명과 고뇌의 틈 사이로 우리는 선생이라는 명칭의 무게를 짊어 진 우리와 동등한 한 명의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제서야 우리는 비로소 단순한 '선생'이 아닌, ‘이정표를 짊어 진 이들’로의 선생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