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1995)> &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
보스턴에서 잡역부로 일하는 ‘리 챈들러’는 어느 날 형 ‘조 챈들러’의 심부전 소식을 듣고 고향인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향하나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리는 자신의 조카인 ‘패트릭 챈들러’와 함께 유언을 확인하고, 자신이 패트릭의 보호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형의 유언에 따라 패트릭과 함께 맨체스터를 떠나 보스턴에서 살려고 하나, 패트릭은 이를 거절하게 된다. 반복되는 나날이 지속되던 중, 리의 전처인 ‘랜디 챈들러’가 조의 장례식을 계기로 리에게 연락하게 되고, 그들의 비극적인 과거가 드러나게 된다.
어렸을 적 행방불명이 된 할머니의 기억을 안고 사는 ‘유미코’는 오사카에서 함께 자란 ‘유키오’와 결혼하여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자살한 유키오로 인해 유미코는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보기만 한다.
몇 년 후, ‘타미오’에게 재혼하여 조용한 어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유미코. 그러나, 유키오의 기억은 유미코의 삶에 문득 나타나게 되고, 그녀를 버티기 힘들게 만든다.
간극이라는 단어의 뜻은 세 가지가 있다. 사물 사이의 거리, 시간 사이의 틈, 마지막으로 두 가지 사건이나 현상 사이의 틈.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환상의 빛>에 등장하는 ‘리’와 ‘유미코’는 그들이 속해 있는 외부 세계로부터 ‘세 가지 간극’을 메우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그 세 가지 간극이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죽음으로 인한 상실, 상실로 인해서 잃어버린 시간들이다.
공교롭게도 ‘간극’이라는 단어는 두 작품의 내러티브를 담당하는 주요한 시각적 구도의 역할을 맡는다. 이는 등장인물들의 여러 행동 속 시각적 연출로써 관객들에게 여러 ‘간극’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낸다. 리는 등장하는 모든 타인과 떨어져 있으며, 유미코는 문틈이나 창문 등 외부의 구조를 통해 스스로와 세계를 격리시킨다.
이 두 작품에서는 간극이라는 단어의 여러 뜻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공백’이 ‘여백’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린다. 두 단어는 중심 사건의 유무를 통해 ‘공백’과 ‘여백’으로 나뉜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은 ‘공백’이지만, 중심이 되는 존재가 차지하지 못하고 남은 자리는 ‘여백’이 되는 것이다. 위 두 작품은 죽음이라는 상실과 그로 인해 치유되지 못하는 빈 자리에 대해 우선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여백은 이후에 ‘가족’만이 제공할 수 있는 불완전한 치유의 방식으로써 작용한다.
누군가가 우리 곁을 떠나가면, 우리는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려 애쓴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하면서 우리는 ‘망각함으로써 기억하는’ 방식에 익숙해지게 된다. 그들이 떠난 빈 자리가 처음 우리의 눈에 들어왔을 때는 존재감의 온기가 미약하게 감도는 빈 자리가 된다. 냉기만이 감도는 ‘공백’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상흔이 남으며 그 빈자리에는 추억이 스며들게 된다. 상처로부터 살이 아물어 ‘흉터’가 되지 못한 상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새 살이 돋아난 듯하는 척을 배우게 된다. 그 순간, 떠나간 이의 빈자리와 그리움으로 가득찬 우리의 간극 속 수많은 ‘공백’은 역설적으로 죽은 자의 돌아올 수 없음이라는 불가능성을 중심으로 한 ‘여백’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 ‘가족’들만이 그 여백을 불완전하게나마 채워줄 수 있다. 이러한 특수성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는 리 챈들러의 시점으로 그의 일상을 스크린 속에 담아낸다. 그는 패트릭의 보호자가 되는 조의 유언에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패트릭의 일상을 거들어주는 매우 현실적인 대화를 통해 일상을 표현한다. 특히, 패트릭의 일상 속에서 리는 화면 가장자리에 위치하거나 프레임 밖에서 보이스오버를 통해 나타나는 연출로 인해 더욱 현실성을 극대화시킨다.
이렇게 반복되는 현실은 리가 벌인 사고로 인해 죽은 자녀들. 리는 그들의 존재가 남은 맨체스터라는 이 지역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격리하려고 하는 자신의 욕망과 충돌하여 그에게 일종의 ‘권태감’을 선물하게 된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은 리가 느끼는 이러한 권태감을 스크린 속으로 가져오기 위해 생각의 반추를 갑작스러운 플래시백으로 나타내거나, 두 인물의 대사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겹치는 현실적인 연출, 그리고 일상의 다양한 소음을 통해 리얼리즘을 불러온다. 하지만, 리에게 권태감을 주는 일상은 역설적으로 리가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금 고찰하게 되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인트로 장면에서 어린 패트릭과 조, 그리고 리가 배를 타며 보냈던 소소한 일상은, 가족과의 경험에서부터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환상의 빛>은 열차나 파도 소리 등의 반복적 등장을 통해 일상을 표현한다. 또한 반복되는 사운드의 표현은 롱테이크, 정적 프레이밍의 촬영 기법과 맞물려 더욱 현실적인 면모를 가지게 되며,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리 챈들러와 마찬가지로 유미코 또한 ‘권태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는 ‘가족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겪게 되었다는 것도 동일하다. 하지만, 리와 달리 유미코는 그 권태감을 이겨낼 결정적인 단서를 결코 찾을 수 없다. 유키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연유를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에 등장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미코는 그저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킬 뿐이다. 영원한 사랑의 상실감과 갓난아기라는 책임감이자 세상에 남은 마지막 유키오의 흔적을 지켜내기 위해서.
유미코는 타미오와의 결혼 생활을 만끽함과 동시에 다른 이들과 문틈이나 창문 틈으로 구별되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는 그녀가 생과 사의 경계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메라의 촬영 기법은 유미코의 시선을 빌려, ‘유미코가 살아나가야 할 세상’과 ‘유키오가 떠나가버린 세상’을 동시에 비춘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간 외부의 현실 세계와 그녀가 바라보는 삶과 죽음의 경계로써의 세계는 ‘가족’이라는 유대감 하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관객은 깨닫게 된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그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관계이다. 하지만, 이러한 명목으로써의 가족은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기댈 ‘버팀목’이 아니라, 우리의 ‘짐’으로써 작용되기도 한다. 가족이 선사하는 따스함을 견딜 자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무게를 버텨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러한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을 순간이 있다.
<환상의 빛>속 유미코는 재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에게 편입되는 과정을 겪는다. 해안가의 조그마한 마을이 주는 반복과 안락함은 자연스럽게 유미코로 하여금 그녀의 내적 세계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유미코는 목조 주택의 곳곳을 청소하면서 그 공간 속에서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가족’에게 치유받아야 마땅할 그녀는, 도리어 가족을 위해 마치 주택 속 일부분이 되어 가족들을 위해 일방적으로 봉사를 행한다. 그녀에게 가족은 짐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가족의 일원으로써 ‘부재’라는 유미코의 슬픔에 화답하는 타마오와, 유키오와 탔던 자전거를 탄 아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상실감을 숨기지 못한 그녀가 완전히 일상으로부터 ‘일탈’할 때, 유미코에게 가족은 비로소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으로 변모한다. 그녀를 구속하는 가족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상처이자 삶의 원동력이 되어, 유미코로 하여금 반복되는 일상 속으로 스스로 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환상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삶의 끝자락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을 접어둔 채로.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리 챈들러는 유미코와는 반대로, 가족이라는 무게를 결국 이겨내지 못한 채 주저앉은 인물이다. 영화의 오프닝 씬, 패트릭이 어렸을 시절- 리의 자녀들이 사고로 죽지 않았을 때- 과는 달리, 리는 의도하지 않은 그의 실수로 자녀를 떠나보낸 아버지가 되었고, 맨체스터의 주민들은 그의 손에 묻은 피만을 바라본다. 즉, ‘가족’이라는 단어는 이 영화에서 단순히 혈연이 아니라, 맨체스터라는 지역 공동체를 일컫는 개념으로써 작용한다. 술집에서 만난 맨체스터의 이웃들은 단순히 리를 살인자로 취급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달리 그를 진정한 가족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준 조지네 부부는 리를 따스하게 위로해준다.
또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리의 전처인 ‘랜디’는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아들을 출산하였으나 여전히 떠나보낸 자녀들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방화 사건으로 인해 그녀가 리에게 내뱉은 폭언에 대해 사과한다. 그녀는 혈연으로써의 ‘리’의 가족이자, 이웃으로써의 ‘가족’이기도 하다. 그녀와의 재회에도 불구하고 리는 맨체스터를 떠난다. 하지만 완전히 가족이라는 관계의 무게에 주저앉았으나 완전히 짓눌리지는 않았다. 그는 패트릭과의 잦은 마찰에도 불구하고, 조지가 그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원하는 삶을 이룰 수 있게끔 돕는다. 공동체로써 ‘맨체스터’라는 지역은 리에게 커뮤니티 속 외딴 섬으로써 짐으로 작용하나, 그 속에서도 리를 위해 진정으로 마음을 열어 준 이들로 인해 그가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끔 하는 버팀목으로써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리에게 그 상처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잊을 수 있을 망정,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상처가 난 곳을 상흔이라고 하며, 상처에 새 살이 돋아 아물게 된 흔적을 흉터라고 한다. 모든 상처는 흉터로써 귀결되나, 그 상처를 ‘흉터’로써 과거형으로 치부할 수 있는 회복력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상처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이자, 무의식적으로 남은 삶 속에서 그 흔적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고통스러운 과거로 환기시키는 ‘상흔’으로써의 상처는 영원히 흉터로 변모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수 많은 사람들은 ‘상흔’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 위해, 그것을 품고 살거나 영원히 떠나가는 선택을 한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으리라.
유미코와 리는 ‘상흔’ 앞에서 대조적인 선택을 행한다. 유미코는 타마오와 ‘이별’의 경험을 같이 나누며 그 경험을 보편화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타마오의 아버지가 말씀하신 ‘환상의 빛’. 삶의 끝을 바라는 그 열망은 바다 바깥에서, 그리고 유미코가 바라보는 창문 안을 비쳐 왔다. 죽음과 삶,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면서도 연결하는 투명한 경계를 유미코는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타마오는 서스럼없이 그 경계를 넘나든다. 타마오는 유미코와 달리 환상의 빛이 뻗어 나오는 출처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우리의 일상을 비추는 햇빛과도 같이, 그 빛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유미코는 유키오와의 추억이 담긴 녹색 자전거를 가져온다. 그리고 타마오는 그 자전거를 탄 유키오의 아들- 이면서 타마오의 아들로써 완벽하게 변모한 아이-과 자전거 연습을 한다. 유미코의 상흔은 완전히 아물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상처의 존재를 수용하고, 유키오가 머물러야 할 곳에 머물기로 선택한다.
리 챈들러는 끝없는 몰아치는 파도의 반복을 견디지 못했다. 유미코와 달리 본인에게 그 책임이 명확하게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맨체스터에 정착하며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주고자 하는 패트릭의 바램은 리에게 완전히 수용되지는 못했다. 리는 형인 조의 유언을 이행하고 이 공간을 벗어나려 했으나, 추운 날씨에 그의 시신을 운구할 수 없어 의도치 않게 리는 맨체스터에 ‘정체’되게 된다. 공동체이자 가족으로써의 맨체스터 이웃들은 그를 포용해주지 않았다. 반복되는 기억과 죄로부터 스며 나오는 죄책감. 그리고 떠나간 가족이 떠넘긴 책임까지, 그는 가족이라는 명목 하에 끊임없이 고통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 리는 본인이 도망치듯이 떠난 혈연. 즉, ‘진짜’ 가족에게 ‘불완전한 치유’를 받는다. 리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랜디에게 지은 죄를 랜디가 사과하고 용서함으로써, 리는 끝없이 방황하는 그의 발걸음의 원동력이 ‘흉터가 되지 못한 상흔’임을 깨닫는다. 랜디가 유미코처럼 새로운 가정을 꾸리며 상흔과 함께 정착하였기에 그는 비로소 도피라는 그의 방황을 용서할 수 있었다. 간접적인 속죄. 리의 부재는 랜디의 상흔을 메운다. 가족에게 상처받고 가족에게 치유받는 리는, 패트릭의 후견인이 될 수는 없지만 패트릭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환상의 빛>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흉터가 되지 못한 상흔은 삶의 동력이 되는 역설로써 작용한다는 것.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가능한 불완전한 치유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불완전함은 절대 ‘흉터’가 될 수 없다는 것. 악순환이라고 여겼던 리와 유미코 각각의 ‘간극’과 ‘권태감’은, 아이러니하게도 반복되는 일상 사이에서 무뎌저 간다. 이 두 작품은 평생 짊어질 짐이자 절대 아물지 않는 상처에 우리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우리가 또 다시 일어서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끝나지 않는 치유의 과정이 결국 '살아나가는 것'이며, 완전히 내려앉지 못하는 딱지를 끊임없이 보살펴주는 존재는 '가족'이라는 것. 때론 우리는 그들에게 상처입히거나 상처를 주기도 하며 서먹해지곤 한다. 그러나, '가깝고도 먼 그대여', 그대들만이 우리를 살아나가도록 응원하는 가장 은은하면서 따스한 존재라는 것을 가끔 잊어버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