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글을 따라 내게로 돌아오는 길

<에에올(2022)> &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23)>

by 더 레터박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시놉시스

미국에서 이민을 온 후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 역)와 세탁소를 운영하는 에블린(양자경 역)은 연을 끊었던 아버지(제임스 홍 역)와 관계가 서먹해진 딸 조이(스테파니 수 역)과 함께 살아간다. 세무 당국의 조사에 시달리던 그녀는 엉겁결에 웨이먼드의 이혼서류를 발견하게 되나, 다른 우주에서 건너온 또 다른 웨이먼드로 인해 버스 점프(멀티버스 속 다른 에블린에게 빙의하는 것)를 통해 수천 개의 멀티버스 속 에블린들의 능력을 깨우치게 된다. 이제 에블린은 그 능력들을 이용해 멀티버스의 조이인 ‘조부 투파키’라는 인물에 맞서 온 세상과 가족을 구해야 한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23) 시놉시스

삼촌을 잃은 시련을 겪고 어엿한 스파이더맨이 된 마일즈 모랄레스(CV. 셔메이크 무어). 그러나 그의 앞에 멀티버스의 또 다른 스파이더우먼인 그웬(CV. 헤일리 스타인펠드)이 다시 나타난다. 이후 멀티버스의 스파이더맨들이 상주하는 ‘스파이더버스’에서 마일즈는 '스파이더맨 2099' 미겔(CV. 오스카 아이작)과 다양한 차원의 스파이더맨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전해 들은 스파이더맨의 ‘숙명’과 자신의 ‘신념’ 앞에서 갈등하던 마일즈는 자신만의 결단을 내리게 된다. 한편, 마일즈의 베이글에 맞은 알케맥스의 한 과학자는 스팟(CV. 제이슨 슈워츠먼)이라는 차원 이동을 하는 빌런으로써 불타는 복수심으로 그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한다.




베이글 너머와의 운명적인 만남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두 편의 멀티버스 영화에서 '베이글'이라는 평범한 음식은 두 작품 속 서사의 핵심적인 순간에 등장한다. 이 원형의 구멍 뚫린 빵은 각각의 작품에서 모든 것을 담고 있으나 중심은 완전한 무(無)인 허무주의적 우주관을 상징하는 매개체이자, 우주적 위협을 상징하는 정체성의 발단, 그리고 공허함을 의미하는 매개체로써 예상치 못한 공통점을 지니게 된다.
<플래시(2023)>이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등 최근 할리우드의 상업영화들은 멀티버스를 주요 소재로 활용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의 대부분은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그저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스펙터클의 도구에 국한시킨다. 하지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멀티버스를 내러티브의 주제이자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골자로 삼으며, 이들의 다중우주들은 ‘베이글’이라는 오브제의 경계로 맞닿아 있다.
베이글이라는 오브제는 이 두 작품의 플롯에서 멀티버스의 무한한 우주들을 연결하는 차원문으로써 ‘’의 역할을 하며, 다중우주 속의 또 다른 ‘나’들과 진짜 ‘나’를 대비 및 대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참된 나다움’에 대해 고찰한다. 이러한 고찰의 과정에서 베이글은 원형으로 이루어진 그것의 형상으로써 무의미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다중우주의 나를 바라보는 것은 마치 ‘거울’ 속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구조적 유사점을 통해 ‘문’ 뿐만 아니라 ‘거울’이라는 메타포를 얻게 되는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베이글이라는 오브제가 주는 문과 거울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나다움’을 이루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그러한 요소가 멀티버스라는 세계관에서 어떻게 스토리텔링의 핵심 메시지로 작용하는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멀티버스’의 윤리학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주인공 에블린은 수많은 우주의 에블린 중 ‘가장 실패한’ 에블린이다. 그녀는 여러 우주에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는 자신에게 빙의되는 경험을 통해,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이라는 가정법적 사고에 매몰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인 ‘모든 곳에서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면(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내가 내린 지금의 이 선택은 유의미한가?’에 대해, 조부 투파키의 사상에 감화된 에블린은 ‘무의미’하다고 답한다. 그녀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현재의 ‘가장 실패한’ 에블린의 삶보다, 다양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여러 에블린의 삶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수많은 멀티버스를 체험하며 현실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의미를 무의미함으로써 해체한다. 그러나 ‘무의미함’이라는 정서는 웨이먼드를 통해 실존주의적인 의미로써 변모하게 된다. 에블린과는 다르게, 그녀의 남편인 웨이먼드는 ‘친절함’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에 맞서 살아간다. 모든 가능성이 실존하는 세계에서 개별적 선택의 의미가 희석되는 경험을 겪은 에블린에게, 웨이먼드는 삶의 빛과 소금이 되는 소중하고 사사로운 경험들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친절을 베푸는 ‘다정함’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에블린은 비로소 ‘모든 것’들이 가지는 필연성을 긍정하면서, ‘모든 곳’에 존재하는 그녀의 딸이 겪은 경험을 같이 겪으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동시에’ 일어난 수많은 외부의 갈등에 맞서 내면의 친절함으로 다정하게 치유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는 ‘캐논 이벤트’라는 사건이 존재한다. 이는 멀티버스의 모든 스파이더맨이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의미한다. 캐논 이벤트는 필연적이며, 만약 이를 막으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 우주뿐만 아니라 멀티버스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미겔(스파이더맨 2099)은 자신이 죽은 차원에서 가족들과 재회하는데 성공하나, 그의 캐논 이벤트에 오류가 생겨 그 차원 자체가 붕괴되고 본인의 가족을 눈앞에서 잃어버리게 되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마일즈는 스팟으로 인해 자신의 아버지가 죽는 미래(=마일즈의 캐논 이벤트)를 보게 되고 ‘한 명을 살리기 위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권리가 있는가?’라는, 마치 트롤리 딜레마와 유사한 공리주의적 질문에 대한 순종적인 대답을 강요받는다. 미겔과 다른 스파이더맨들은 이러한 상실을 이미 겪었으며, 그러한 희생으로 인해 지금의 스파이더맨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대답으로 ‘소수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용인한다.
그러나 마일즈는 미겔의 질문에 ‘아버지도 구하고 모두를 구하겠다’는 자신만의 길을 선택한다. 다른 모든 스파이더맨들이 희생을 숙명처럼 받아들인 것과 달리, 마일즈는 그들이 시도하지 않은 또 다른 방식을 향해 모험을 떠난다. 흔히 ‘영웅은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는 슈퍼히어로 서사의 ‘공식’에 대해 마일즈는 그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이를 감내해야 한다면 그 희생 앞에 순종하지 않으며, 멀티버스의 속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다. 정해진 공식이 존재하는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마일즈는 틀에 갇힌 영웅의 길을 따라가는 운명론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쓰겠다는 자유의지를 택했다. 그것이 개인적인 책임을 해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에서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기적을 이룩하려 한다.



베이글과 공허함과 그 역에 대하여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마일즈가 던진 베이글을 맞고, 차원 이동기에 노출되어 빌런이 된 스팟은 마일즈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그의 ‘숙적’이 되고자 한다. 그의 세계에서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스팟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차원으로써의 이동이라는 능력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나는 너의 숙적이야’라는 말을 마일즈에게 반복하는 스팟. 그의 ‘복수’라는 행위의 기저에 있는 그의 감정은 아마 ‘공허함’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감정은 스팟의 포털은 ‘살아있는 잉크 얼룩’과도 같은 시각적 특징을 지닌다. ‘베이글’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그의 포털은 끊임없이 자신을 다시 그리는 유기체적인 특성을 보인다. 이후 시커먼 몸에 하얀 얼룩을 지닌 형상으로 각성한 모습의 스팟은 마일즈의 ‘숙적’으로써 마치 공허함에 의해 자아가 집어삼켜져 복수만을 바라는 성격이 외면적으로 반영되어 보인다.
내가 널 만들었고, 넌 날 만들었어.” 스팟이 마일즈를 향해 내뱉은 대사이지만, 이는 마일즈가 스팟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스팟은 다른 차원의 거미를 마일즈의 세계로 옮겨 그를 스파이더맨이자 ‘최초의 변종(Anomaly)’으로 만들었고, 그는 마일즈의 베이글에 맞아 탄생한 ‘2차적 변종’이기 때문이다. 스팟의 존재가 마일즈를 진정한 스파이더맨으로 만든 것이다. 마치 ‘숙적’처럼 말이다.
마일즈는 스팟의 ‘숙적’으로써 그와 상반된 행보를 걷는다. 마일즈는 다른 이들의 협력을 통해 화려하고 유채색인 포털을 통해 차원을 넘나들며, 미겔의 팔찌 없이 멀티버스의 수많은 스파이더맨들의 추격을 차원을 이동한다. 스팟과 마일즈는 그들의 세계에서 다수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로 인해 공허함에 매몰되어 스팟은 그의 ‘숙적’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숙명’이라는 운명론적인 길을 걷는다. 하지만 마일즈는 “누군가 너에게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기억하렴.” 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실존적이며 진취적인 행보를 보인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조부 투파키가 만든 ‘에브리씽 베이글’은 새하얀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검은 형상을 하고 있다. 그녀가 세상의 모든 것을 올려 놓은 이 베이글은 결국 무(無)로 돌아갔으며, 조부 투파키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지 못해 스스로를 파괴하기 위해 베이글 모양의 블랙홀을 만들었다. 이 블랙홀은 ‘절대적 무’로써, 삼라만상이 분해되고 해체되는 의미를 윤회적인 원 모양의 형태로써 표현한다. 다니엘스(다니엘 콴, 다니엘 샤이너트) 감독들은 베이글의 구멍을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과 같은 시각적 효과를 줌으로써, 프레임 내에서 베이글 구멍은 절대적인 중심성을 가지게 된다. 또한 이 구멍은 무한한 차원들이 중첩되는 시각적 효과를 위해 다층적인 깊이 구성을 활용하며, 주위의 모든 요소가 대칭 구조와 닫힌 프레임으로 표현되어 운명론적인 필연성우주의 질서와 무질서를 동시에 암시한다.
하지만 레이먼드의 ‘친절함’으로 인해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은 에블린은, 레이먼드가 장난을 치며 붙였던 ‘구글리 아이’를 자신의 이마에 붙이며 친절함과 실존주의를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불교나 힌두교에서 깨달음의 상징을 나타내는 에블린의 이마 위 제 3의 눈(구글리 아이)은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들이 이마에 붙이는 에브리씽 베이글의 그림과 색채적 대조를 통해 상반된 의미를 지닌 오브제라는 것을 나타내며, 에브리씽 베이글이 주는 위압감과 대비되게 유치하거나 때로는 가벼워 보이는 이미지를 가진다. 그러나 에블린의 구글리 아이는 그러한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고, ‘작고 단순하나 모든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실존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이마 위의 구글리 아이는 일상적인 도구를 통해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받는 치유를 시사한다. 이 영화는 이 두 오브제의 대조를 통해 허무주의와 실존주의가 결국 ‘보는 방식의 선택’을 의미하며,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면, 그럼 친절하게 살자’는 따스한 실존주의적 관점을 종용한다.





가장 멀고도 둥근 길은 나에게로 향한다

스팟의 포털과 조부 투파키의 에브리씽 베이글, 그리고 마일스의 존재와 에블린의 구글리 아이까지. 이 두 영화는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내러티브의 주제로 삼는다. ‘나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다중우주를 떠돌던 등장인물들은 ‘획일화된 숙명’과 ‘불확실한 자유의지’ 속에서 갈등하며 다양한 차원들을 방문하는 일종의 ‘로드 무비’와도 같은 형식을 통해 영웅의 여정을 떠난다. ‘또 다른 나’들과의 여러 만남과 사건을 겪으며 마일즈는 ‘스파이더맨’이 아닌 ‘마일즈 모랄레스’로써, 에블린은 ‘이루지 못했던 꿈과 미련’이 아닌 ‘현재의 사소한 소중함과 다정함’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두 인물은 깨닫는다. 자신들이 깨닫게 된 본질로 향하는 길을 이미 걸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이들은 마치 베이글의 형상과도 같이 ‘가장 멀고도 둥근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마일즈와 에블린이 잊고 있었던 ‘나다움’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그들의 내면 속에 존재했었지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베이글의 구멍을 넘나들며 마치 거울과도 같은 다른 ‘나’를 만나야 했었던 것이다.


삶의 수많은 경험과 시간을 겪으며 우리는 나도 모르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아와,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기 위한 자아, 그리고 숨기고 싶은 과거의 자아 등 우리는 ‘또 다른 나’가 나의 자아 속 일부분임을 알게 된다. 이 두 영화는 파편화된 우리의 여러 자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구심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는 영화들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기 위해 떠나는 여정은 꽤나 멀고 둥글 것이다. 이 길의 끝은 우리가 모험을 시작했던 첫 발자국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베이글 모양의 둥글고 먼 길을 통해, 우리도 이들처럼 ‘진정한 나다움’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전 04화가까운 듯 먼 그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