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를 들고 갈 수 있는 사이즈로> 외 5편
사람의 죽음은 단순히 육신과 넋의 사멸로써 마무리되지 않는다. 남은 이들의 몫은 떠난 이들을 마음 속 한 켠에 들여놓은 채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단어의 경계에 대해 질문한다. 기자가 건넨 질문을 반추하며 오빠의 삶이 남긴 것들을 바라보는 리코. 그녀는 오빠의 차를 타고 오빠의 잔여물을 버리며 오빠의 아들과 오빠의 흔적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가족이라는 경계는 ‘사이즈’를 매길 수 없는 것이었다. 리코는 “이제 우리 가족은 나 밖에 남지 않았다” 라며 이야기하지만, 여행이 끝난 뒤 그녀를 찾아온 또 다른 가족’들’은 그 범위를 재확인하는 ‘식사’라는 행위를 같이 수행하며 리코의 여정을 함께 하고, 그녀를 위로해주는 버팀목으로 변모하게 된다.
두 개의 가족. 오빠의 백골 또한 두 개의 가족에게 들고 갈 수 있는 사이즈로 나뉘어진다. 그녀가 몸을 기댔던 오빠의 몸이 그의 전처와 딸에게 건네어지며 고향 땅으로 떠나는 또 다른 여정을 시작했을 때, 그녀들이 가지고 있었던 미련, 분노, 죄책감은 오빠가 남긴 모든 것으로 분해되어 일반화된다.
마치 기억이 풍화되듯, 오빠는 그가 리코에게 주었던 여러 상처와 미련들까지 자신의 잔여물 속에 모조리 우겨 넣었다. 오빠를 내던지고, 태워버리고, 미워하는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한 사람을 완전히 정리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억과 마음 속 한 켠에 살아가는 이들은, 그 육신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졌을 때 비로소 사이즈로부터 탈피해 ‘짐’이 아닌,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세상은 말리카에게 그저 두집살림일 뿐이라며, 아버지와의 새로운 삶을 응원하면서 성장통의 한 과정으로 엄마와의 이별을 단순한 물리적 거리의 증감으로써 치환해버리지만, 말리카에게 어머니는 그녀의 세계와도 같다. 그런 어머니가 누군가를 또 다시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관심 밖의 일이었지만, 절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한 어머니가 그 남자와 자신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일 때, 말리카는 어머니를 ‘배신자’라고 치부한다. 어머니를 힘들게 해 자신에게 돌아오게끔 만들겠다는 알량한 생각은 말리카가 행하는 복수를 더욱 유치하게 보이게끔 만든다.
영화는 말리카의 시선을 따라 어머니를 비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관객이 말리카의 감정에 이입하기 힘들도록 만들기 위해 어머니와 말리카의 감정적인 유대를 보여주는 씬보다 말리카가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과 그것의 표출을 집중적으로 담아낸다. 덕분에 관객은 말리카의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가 속한 또 다른 ‘세계’. 즉, 말리카가 속한 ‘사회’의 부당한 면을 집중해서 관찰하게 된다.
그녀들이 깊게 속한 사회는 코란의 말씀에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말리카의 손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그녀들이 믿는 종교의 저 높은 분들. 말리카와 어머니의 유대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누군가에 의해 그녀들은 결별과 사랑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 두 가지 개념의 거리는 딱 장미꽃 한 다발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프닝 씬은 귀를 클로즈업하면서 시작된다. “너무 많은 말을 들었다”는 점을 이유로 프로포즈를 하는 애인에게 결별을 말하는 여자. 그녀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벤이라는 외국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벤이라는 인물의 말은 자막으로 나타나며 그의 흔적은 스크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벤은 완전한 ‘투명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몇 년에 한 번씩 벤을 기다리는 과정을 겪은 주인공은, 어느 날 아이를 가지게 된다.
영화의 2막에서는 언니를 사랑하는 쌍둥이 남매의 여자 고등학생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녀에게 언니라는 존재는 사랑하는 존재이고, 그녀 또한 투명인간이다. 하지만, 언니와 자신의 혈육이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을 목격한 후, 언니는 살아있는 목소리와 육신을 가진 채 스크린에 재등장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는 모두 투명해진다. 마치 그 존재의 실체를 알 필요가 없다는 듯, 불필요한 미사여구를 생략한 것 과도 같다.
두 에피소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매미 시체’는 맹목적인 사랑을 꿈꾸는 주인공의 처지를 비관적으로 은유한 메타포이다. 결별 후의 회포를 털어놓는 편지가 버려져 있는 담벼락의 틈, 술에 취한 채 꿈에서 매미 시체를 삼키며 잠에서 깬 쌍둥이 여동생. 두 사람의 공통점은 맹목적인 사랑을 완수하지 못한 채 그 사랑을 끝맺은 것이다. 맹목적인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매미의 유충과도 같이 뭍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투명함이라는 역설로써 존재하지 않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세 쌍둥이는 벤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말을 따라 ‘동굴’로 들어간다. 그 동굴 속에서는 매미의 사체가 뿜어내던 영롱한 노랑빛의 무언가가 깜빡거린다. 과연 그들은 맹목적인 사랑으로부터 탈피한 채 매미와도 같은 땅 속 동굴에서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잉태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생명으로써 인정받기 전부터 얻게 되는 꼬리표와 원죄가 되기도 한다. 헝가리 봉기의 실패 후 수용소에 갇힌 아버지. 소년에게 아버지는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이며, 그 자신의 정체성을 위탁할 수 있는 ‘우상’이기도 했다. 그런 소년에게 자신을 임신 중에 어머니를 숨겨 주었던 한 도축업자가 나타나 자신을 아버지로 삼으라 명령한다. 소년의 세계에서 두 명의 아버지는 존재할 수 없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원치 않는 새로운 이름을 강요받는 압박 속, 소년의 마음은 참을 수 없는 분노만이 응어리지기 시작한다.
그런 소년이 태초부터 쥐고 있던 권총 한 자루. 그루터기 옆의 땅에 묻힌 그 분노는 소년으로부터 정치사범으로 몰린 친구의 오빠에게 건네진다. 폭력의 상징물인 권총은 사회가 소년으로부터 빼앗아갔지만, 자신의 이름을 빼앗길 위기에 맞닥뜨린 소년의 억눌린 분노는 권총을 소년의 손에 쥐어준다. 분노와 참회를 모두 가져갈 아파트의 물탱크. 아버지가 갇혀 있을 습하고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 소년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결심한 채 습기와 물방울들로 이루어진 ‘진짜’ 자신의 아버지에게 마지막 안부와 참회를 고한다.
자신에게 원죄를 남긴 채 수용소 속 물탱크의 습기와 물방울로 기억되어지는 아버지를 따를 것인지, 어머니가 빚을 진, 자신에게 은총을 남긴 잠정적 가족 살해범을 아버지로 삼을 것인지. 두 명의 아버지와 두 개의 이름 속 그 무엇도 선택하지 못하고 선택받지 못한 아들은 이름없는 고아(orphan)와도 같이 변모하게 된다.
첫 장면에서 모든 인물들은 태아와도 같은 형상을 한 채 누워 있다. 이는 일종의 착지법과 같다. 착지법이란,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지금 여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착지연습>은 미투 운동의 피해자들 중, 일상으로의 복귀를 위해 회복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하고 진행하는 ‘상-여자 착지술’ 팀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들 피해자와 연대자들은 ‘생존-연대자’라는 명칭 아래 하나가 되어 회복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순탄하기만 하지 않다. 이 영화가 특별한 점은, 이들이 단순히 ‘피해의식’을 가지고 두려워하는 단편적인 시선으로 이들을 비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평범하고 일반적인 모임의 일원들이 겪는 보편적인 문제들을 마주하는 과정을 겪게끔 만든다. 결국 이러한 연출 방식은, 우리 주변의 또 다른 누군가로 이들을 ‘보편화’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흔들리는 한 명을 여러 사람들이 에워싸 그녀의 몸을 지탱해 주는 장면으로 마무리가 된다. 그 흔들리는 사람은 이 모임에서 탈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보이지 않는 연대감으로 이어져 있다. 사회로부터 얻은 상처를 사회로부터 회복하는 이 아이러니. 그 누구에게도 부축받지 않기로 결심한 이는, 어느 새 떠나간 멤버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로부터 부축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돌연변이’와도 같은 어두운 피부를 가진 세오. 그는 자신과 여행을 같이해 줄 누군가에게 명품 캐리어와 그 속에 든 모든 것들을 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캐리어의 값어치만을 원한 채 세오와 동행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세오만큼이나 동행이 간절한, 동성 연인의 흔적을 찾으려는 소라는 세오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고, 그 여정 속에서 ‘돌연변이’의, ‘돌연변이’에 의한, ‘돌연변이’를 위한 세상의 한 귀퉁이를 찾게 된다.
이 작품의 원제인 ‘돌연변이(the mutation)’는, 새로운 형질이 갑자기 출현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세오의 피부색과 소라의 사랑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붙는 여러 접두사의 수많은 종류 또한 돌연변이와도 비슷한 형질을 띤다. 우애, 동료애, 모성애, 효성(孝誠)과 효심 등등. 그들은 수많은 접두사를 가진 사랑 속에 살고 있었고, 그들도 그에 상응하는 다양한 깊이와 범위의 사랑을 나눈다. 세오와 소라는 일종의 로드무비로써 한 사람의 과거와 상처 속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역방향’으로 나아갈 때, 나머지 한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본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향해 ‘정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이 세상 속 유일하게 동일한 것은 다양한 사랑의 탄생이요, 그 외의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겹치는 형질 없이 ‘돌연변이’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보듬어주는 것. 세오와 소라는 이 문장의 뜻 단 한 가지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들의 세계는 ‘돌연변이’만의 섬이 아닌, 태초의 ‘사랑’이 잉태되는 바다와도 같이 변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