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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영이아빠 May 16. 2023

가족의 빈자리

3대의 고통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의 연세는 47세, 어머니의 연세는 40세 였다. 아버지와 나이차이는 46살, 어머니와 나이차이는 39살이 났고, 내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낼 시기인 80년대 중후반에는 부모님과 나이차이가 상당히 나는 편이었다. 부모님이 학교에 올 상황이면 고학년으로 갈 수록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은 부모님이 학교에 올 일이 거의 없었으므로 '학교에 부모님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은 고등학교 1학년 쯤가서 친한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와서 부모님의 모습을 모두 보면서 없어졌던 것 같다. 지나고 나서지만 어느샌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스스로가 매우 창피했으며, 다시 이런 생각으로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러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들지만 과거로 돌아갔을 때의 정신연령이 지금이 아닌 과거 시점 그 나이 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부모님과 나이차이가 많기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는 그 당시 나의 미래를 매우 걱정하셨다.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의 부모가 자식이 다 자라지 않아서 자식과 이별할 상황이 자명하다고 생각하셨고, '남겨진 자식이 부모없이 잘 클 수 있을까? 부모인 내가 늦게 본 자식을 오랫동안 보살펴야 하는데' 라는 대한민국 격동기를 거친 부모님의 전형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를 걱정하셨다. 마음으로는 훨씬 크게 걱정하셨겠지만, 실제로 나에게 대화상에서도 "내가 니 자식 낳고 키우는거 다 보고 가야할텐데. 우리 아들 엄마 아빠 빨리 가면 불쌍해서 어쩌나?" 라고 매우 빈번하게 걱정을 하셨다. 그 당시에는 나는 정말 내가 30살이 되기도 전에 부모님이 모두 70세가 넘거나 가까이 되니 돌아가실 것으로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대학교, 취직 등등 시간이 흘러갔다.


 아버지는 키도 1930년대 초반생 치고는 크셨다. 174-5cm 정도 되셨고 체중도 적게 나가서 매우 호리호리한 편이셨다. 따라서 매우 건강해 보이셨고 실제로도 큰 질병을 앓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내가 30살 즈음 여자친구를 소개시키고자 고향에 내려갔을 때 엄마는 꼬장꼬장하여 큰 이상은 없으셨지만 아버지는 이야기를 나눌 때 기침을 계속하시고 들숨에서 쌕쌕 소리가 나서 대화를 잘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말씀을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말씀을 하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인사를 시키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이후 엄마에게 상황을 여쭤보니 보훈병원에서 암이 의심되나 생검 결과가 없어서 양성인지 악성인지 모르는 상태니 큰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하셨다. 부랴부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부산에서 가장 큰 대학병원을 방문한 결과 폐암 3-4기이고 연로하셔서 폐암 예후도 좋지 않거니와 수술을 해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들었다. 그 대로 투병생활을 시작하였고 6개월 정도를 사실것이라고 했는데 약 1년 정도를 투병생활 하시고 영면하셨다.


 앞서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나 모르겠으나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나를 무척 사랑하셨으나,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한 아버지는 일을 하시다가 다치셔서 집에 계속 계시고, 주변 지인분들을 만나러 다니시며 변변한 경제활동을 오랜동안 못하셨다. 경제활동을 못하셔서 나와 아버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아니었고, 아버지는 내가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잘 놀며, 대학 때 술을 많이 마시고, 담배를 피는 일련의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 같았다. 어느 부모가 자식 술, 담배와 인생을 허비하는 듯한 생활을 하는 것을 좋아하랴마는 나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기 싫었고, 아버지와 나는 대화다운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는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불쌍한 양반 부인, 자식에게 대접다운 대접한번 받지 못하고 가셨구나. 참 측은하다. 내가 철이 빨리 들었으면 자식에게 호강까지는 아니라도 대접은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선 난 참 나쁜 아들이구나. 아버지에게 죄송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도 입관 후에 다음날 발인을 앞둔 전날 밤에 혼자 빈소를 지키면서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눈물이 났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 자식이 되었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여차저차 장례가 끝나서 아버지를 장지에 모시고 홀로 남으신 어머님이 측은하기도 하고 그래서 2-3일을 어머니와 집에 계속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제사는 기제사 위주로 하여 부산에서 어머니가 간소하게 준비하셨고 나는 서울 회사에서 근무하다 기일마다 조금 일찍 내려가서 제사를 지내고 다시 올라오곤 했었고, 내가 결혼을 한 이후에도 몇년 그렇게 하다가 아내가 아기를 가지고 키우는데 손발이 부족해 질 무렵 나도 아버지 기제사를 건너 뛰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셔서 출장이 있을 때나 현충일 등 1년에 2-3번은 가본 것 같은데 기제사를 그렇게 충실히 지킨 것은 아닌 것 같다. 간소하게 하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와서가 아닌 그냥 해야하니깐 정도로 지낸었다. 지금도 격식이나 준비는 예전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아버지 제사나 명절, 현충일에 묘에 본격적으로 가게 된 건 애들이 조금 크면서 부터였다. 수영이 5-6살, 수예 2-3살 때 현충원에 가면 돗자리 깔고 잠시 앉을 수도 있었고, 주변에 오래전에 사용했던 전투기, 탱크, 헬리콥터 등을 보면서 수영이가 좋아했었다. 그래서 자주는 아니어도 명절 전후, 현충일 전후는 갔었다. 그 때는 가더라도 그냥 '잘 계셨죠. 아들 간만에 인사하러 왔습니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이렇게 와서 인사드립니다. 계신 곳에서 저희 잘 되도록 보살펴 주세요.'라고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잔소리가 듣기 싫었으며,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염치없는 기도를 했었다.


 22년 12월 17일 수영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세상과 이별하였다. 세상은 수영이를 기억하지 못할테니 가족과 이별하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사고가 있은 후 두어달 동안은 제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생각다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아내가 조용히 물었다. "아버님 기일이 그 때쯤 아냐?" 실제로 따져보니 아버지가 2007년 12월 18일에 돌아가셨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이후 앞서 언급했던 아버지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나 스스로 맺지 않은 것, 아버지의 제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것, 아버지를 어른으로서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 어떠한 경우에서든 아버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 등등 매우 다양한 형태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죄책감이 조용하면서도 깊게 밀려들었다. 감히 '나를 봐서 아버지가 잘 보살펴 주셔야 하지 않았냐?', '아버지의 아들의 아들을 어떻게 잘 보살펴 주시지 않을수 있냐?' 등의 원망은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고, 수영이는 1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식이 너무 어린시절에 당신들이 세상을 떠날까봐 걱정한 상황은 자식이 장성까지는 아니라도 부모님들 덕분에 적당한 학교 졸업하고, 적당한데 취직해서 직장생활을 할 때 까지는 보시고 한시름 놓으면서 이별을 하였고, 한 시름 놓게한 당사자인 자식이 34살 태어난 그 아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빠나이 46세, 아들 나이 13살에 서로 이별을 하고야 말았다. 지금 염치로 현실세계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께 아들의 아들, 즉 손자를 현실세계가 아닌 곳에서 잘 좀 보살펴 달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하고 있다. 아버지의 제사, 명절 차례를 지금도 간소하게 지내고 있으며, 그 때마다 내 아들, 아버지의 손자를 잘 챙겨달라고 눈물로, 염치없이 말씀드리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당신이 빨리 떠났을 때 걱정스러운 당신의 아들로 인해 마음의 고통을 받으셨고, 나는 나보다 빨리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단 한 순간도 생각한 적 없는 내 아들의 사고와 내 아들에 대한 측은함 때문에 고통받고 있고, 마지막으로 내 아들은 사고 순간의 고통, 그리고 10여년을 함께한 가족과 이별로 인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무속신앙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지만 막연히 생각해 보면 3대중 내가 조금 더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대하였고 가족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느낄 수 있도록 행동했으면, 아버지는 고통스럽지 않도록 조금 더 오래사셔서 손자를 볼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내 아들도 사고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 어린 자책을 해 본다.


 조금 더 지나면 6월 6일 현충일이다. 그 때 즈음 아버지의 묘에 가서 아버지에게 손자의 안위를 부탁하는 염치없는 부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점은 아버지 또한 진심을 다해 현실세계가 아닌 계신 곳에서의 안녕을 기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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