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의 삶이 주는 첫 번째 변화는 그전보다는 많이 한가합니다.
또한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는지 불러주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내가 무얼 하든 말든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선답니다.
겪었을 수도, 이제부터 겪을 수도 있겠지만 이 나이가 되니 마음이 화사해지지 않아서 오히려 편합니다.
색상으로 비교하자면 데이비스 그레이 정도랄까요?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움직이면 하루를 더 의미 있고 치열하게 쓸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아서 여유롭습니다. 자질구레하지만 시시하지 않을 정도 일상사의 반복이며 고민도 때때로 소박합니다.
길 나서기 좋아하는 제가 살고 있는 송도는 바람이 많이 붑니다. 국제도시 송도’라는 명칭답게 외국인들도 많이 거주합니다. 도시 중심도로 한가운데는 전 세계 국기가 펄럭이고 네모반듯한 동네는 야경이 특히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도시를 벗어나 종종 집 떠나는 즐거움을 위해 무의도 특히 소무의도를 자주 찾아갑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야만 닿을 수 있는 낭만이 있었는데,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를 이어갑니다. 인천대교를 건너 공항에서 무의도행 버스로 환승하고 섬과 섬을 잇는 투박한 다리를 지나 종점에 다다르면 해풍을 품은 생선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습니다. 낚시 재료가 더 많은 편의점과 낮은 지붕의 집들, 마을 앞을 채운 바다는 저만큼 밀려가 있고 햇살에 비치는 개펄의 반짝임에 눈이 부셔 게슴츠레해집니다. 개펄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고깃배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 갯내로 코끝이 얼얼합니다.
소무의도를 연결한 다리 못미처에 허름한 단골 식당에 들렀습니다.
우선 국물이 맑고, 시원한 해물이 잔뜩 들어간 칼국수로 요기하고, 다리를 건너갑니다.
마을을 가로질러 갈 수도 있지만,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산길을 선택합니다.
올라가기 그리 힘들지는 않습니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제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고요하기 그지없습니다.
물길을 가르는 작은 배가 지나가기도 하고 배를 띄우는 선착장도 보입니다.
여행자답게 새로운 길을 찾아보면 조용한 골목길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마을은 평화로웠고 인기척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 골목을 돌아 나오면 나타나는 곳 몽여 해변 근처에‘티파니’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나의 아지트입니다.
여행지에서 사 온 기념품들이 놓인 테라스는 볼거리가 즐비합니다.
노란 파라솔로 햇빛을 가리고 앉아 차 한 잔 앞에 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에 빠질 수 있는 곳, 그곳이 소무의도를 찾는 목적입니다.
내 또래 거나 나보다 좀 아래로 보이는 친절한 사장님 집은 영등포라는데 소무의도까지 매일 출퇴근을 한다니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는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 그 맘을 알 것 같습니다.
한참을 바다와 속닥이며 바라보다가 노트를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끄적이고 있는 나를 보는 사장님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습니다.
단순한 그림임에도 진심으로 부러워해 주십니다.
바다와 맞닿은 곳에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송도 건물을 아주 작게 그리고, 바다를 표현하고 카페를 중심으로 단순하게 지은 낡은 집 두 채를 양쪽에 그려주면 끝입니다. 밀도 약한 그림이지만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이토록 관찰하고 살펴보는 일이 나의 삶에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해가 저물고 있는 지금 바람은 포근하고 파도 소리는 싱싱합니다. 물살 포근한 이곳 바다에서의 휴식이 끝나갑니다. 시간을 살피고 서서히 일어서야 합니다. 뚜벅이인 나로선 버스 시간표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손님은 없습니다. 카페 여주인도 오늘 하루가 부족함 없이 건강하게 보냈기를 바랍니다.
저만치 출발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버스가 보이네요. 행복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합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소무의도에서의 편안했던 하루가 내일을 살아가는 힘으로 자리할 테죠. 기억은 여러모로 힘이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