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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보 샘 Nov 26. 2022

제 장래희망은 책 먹는 여우입니다

프란치스카 비어만의 '책 먹는 여우'를 읽고

제 장래희망은 책 먹는 여우입니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책 속에 사는 여우는 개구리 반찬 따위는 먹지 않는다. 책을 다 읽은 후 그 위에 소금과 후추를 톡톡 뿌려 꿀꺽 먹어치우고는 금세 새로운 책을 달라고, 아직도 배가 고프다며 아우성을 친다. 책을 사려고 모든 가구를 전당포에 맡겨도 그의 허기는 끝나지 않았다. 먹으면 먹을수록 허기가 심해지는 독서의 세계. 그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길모퉁이 서점에서 책을 훔치기로 한다. 하지만 어리바리한 여우는 훔친 책을 한 입 먹어보지도 못하고 감옥으로 끌려간다. 그가 감옥에서 받은 벌은 ‘독서 절대 금지’. 여우는 책을 읽지 않고서는 한순간도 살 수 없기 때문에 미친 듯이 글을 쓴다. 사람들은 그의 글에 흠뻑 빠져들었고, 여우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프란치스카 비어만이 쓴 ‘책 먹는 여우’를 읽으면 기분이 좋다. 한 손은 책을 잡고 있고 나머지 손으로는 후추를 톡톡 뿌리고 있는 여우 한 마리. 두 귀는 쫑긋, 두 눈은 반짝, 주둥이에는 흐뭇한 미소. 책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두근거리는 설렘이 전달된다. 여우 녀석, 맛있는 책을 만났구나!     


  입맛에 맞는 책을 만나는 순간, 일상의 시계가 멈춰버린다. 심장에서 울리는 미세한 떨림, 그 소리를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나는 이미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일상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아침 여섯 시에 씻지 않으면 하루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 빨리 요리하지 않으면 음식물 쓰레기가 될 해동해 둔 고깃덩어리, 다림질을 해두어야 입을 수 있는 남편의 와이셔츠. 평소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구석으로 밀려나고 흐릿해진다. 구수한 종이 냄새, 달콤한 듯하다가도 씁쓸한 맛이 나는 묘한 매력의 문장들. 나는 여우처럼 코를 박고 침을 질질 흘리며 책을 먹는다.      


 마음의 귀를 열고 영혼의 단짝을 맞이하려는 순간, 남편이 다가와 어깨를 흔든다.

 “뭐해? 오늘 학원 안 가?”

 아, 잔인한 현실. 감질이 난다. 하루에 세 끼는 먹어야 하는데 겨우 한 수저 뜨려하니 일상이 나를 부른다.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은 남편, 감지 않은 머리를 대충 하나로 묶은 나.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아침에 한 수저 맛본 에밀졸라의 ‘목로주점’이 혀끝을 시작으로 목구멍으로 넘어간 후 마음 전체를 점령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다.  서점을 어슬렁거리거나 도서관을 탐닉하는 데 하루를 바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책 먹는 여우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서점 강도가 될 수도, 베스트셀러를 쓸 수도 없기에 학원으로 향한다.   

   

 쓰린 속을 붙잡고 허둥지둥 하루를 살아낸다. 문서를 작성하고, 요점을 찾아내고, 두꺼운 문제집을 분석하고. 영혼이 없는 문장을 핥다가 소화불량에 걸려 가끔 캑캑거리기도 한다. 푸석한 머리칼은 손에 쥐면 바스슥 부서질 것만 같다. 모두가 같은 표정으로,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시간을 흘려보낸다. 아무도 책을 꺼내 소금을 톡톡 뿌려 먹지 않는다. 입맛을 잃은 것이다. 입시에 갇혀 잊혀진 미각.      


 원래 내 장래희망은 파이어족이었다. 경제적 독립을 이룬 후 ‘파리는 날마다 축제’처럼 살아보기. 이번 고3을 끝으로 학원과 결별하고, 한동안 제주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보자고 몇 번을 다짐했다. 하지만 삶이란 계획한 대로만 이루어지지 않아 매력이 넘치는 것이다. 작년에 우연히 가르치게 된 초등학생 한 명이 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 입맛에 맞는 책을 만난 ‘여우’처럼 두 귀는 쫑긋, 두 눈은 반짝,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원석을 찾아 보석으로 만드는, 두근거리는 설렘. 나에게는 보석세공사의 기질이 있다. 글을 쓰고,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고치는 아이의 성장을 바라보며 푸석한 머리칼에 윤기가 흐르고, 소화불량이 사라졌다. 신명 난다는 말을 오랜만에 체험할 수 있었다.      


  18년 동안의 입시 경력은 경제적 여유를 선사해 주었지만, 조급증과 공허함을 덤으로 주었다. 숫자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입시생들의 힘겨운 투쟁을 20년 가까이  함께 하다 보니 나 또한 숫자 안에 갇혀 달리기를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조급한 달리기는 공허함을 동반하기 때문에 우선은 멈춰서서 나의 내면과 만나보아야 한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은 ‘책 먹는 여우’로 살며 산책을 즐길 것이다. 일주일 중 이틀은 초등부 아이들을 만나 달고, 쓰고, 맵고, 시고, 부드러운, 입안에 작은 소용돌이를 몰고 와 심장까지 요동치게 하는 뜨끈한 독서의 맛을 전파할 생각이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넘쳐나게 만들고 싶어’라고 말했던 스무 살의 포부를 공상이 아닌 실천으로 바꿔 보려고 한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넘쳐날 수는 없겠지만 마음이 허할 때 책을 펼쳐보는 어른으로 아이들을 성장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     


  책 안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이 모든 것들이 대화를 나누며 우리를 감싸 안는다. 책은 나를 이해한다고, 너그럽게 웃으며 새로운 세계의 다양한 사람을 소개해 준다. 나는 그들의 삶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진정한 나를 찾으려고 애쓴다. 나는 한 권의 책을 맛있게 먹은 후 금세 허기가 다가오는 것을 더 이상 우울해하지 않는다. 내 장래희망이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책 먹는 여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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