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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보 샘 Dec 13. 2022

해피라면

해피라면     


 “라면 먹을까?”

  남편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잘못 고른 거라면 다시 선택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이 잠시 뜸을 들인다.

 “괜찮겠어? 열 시가 넘었는데…….”

 고개를 끄덕이자 남편이 냄비를 꺼내 물을 받기 시작한다. 배달앱의 화려한 메뉴를 고를 필요가 없어 마음이 편하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퇴근을 했다고 하자 남편이 야식을 시켜준다고 했다. 씹으면 바사삭 소리를 낼 것 같은 치킨, 베이컨과 치즈가 듬뿍 올라간 피자, 쫀득쫀득 윤기가 자르르한 족발이 배달앱 화면 가득 담겼다. 

 "부담스러워, 기름도 많고, 밀가루 투성이야. "

  이리저리 트집을 잡고 십 분만에 고른 메뉴가 라면이다. 라면이야말로 트집 잡을 게 제일 많은데, 남편은 나의 모순덩어리 주문을 주방에서 끓여내고 있다. 


 라면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어낼 수가 없다. 뜨거운 면발을 쭉 빨아올려 입안을 가득 채운 후 내뿜는 온기가 좋다. 달걀을 탁 깨뜨려 젓가락으로 휘휘 저은 후 보드랍게 뭉쳐진 노른자를 씹는 기분은 더 좋다. 고소하고 부드럽고 담백하고 짭짤하다. 평소에는 먹지 않던 대파도 향긋하게 면발과 조화를 이루면 언제 다 먹었나 싶게 라면이 자취를 감춘다. 국물이 다 식기 전 밥 한 수저를 말아서 입안에 퍽퍽 떠서 먹는다. 소고기 국밥보다 더 맛있게.


 정말 신기한 건 다음 날이다. 밤새 더부룩함으로 뒤척이지도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도 가지 않았다는 사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라면을 간절하게 외치는 날에는 속도 괜찮다. 우유 반 잔만 마셔도, 라면 반 개만 먹어도 배탈이 나는 나에게 놀라운 일이다.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몸이 지치고 우울함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봉투를 열면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올 것 같다. 큰언니가 끓여 준 백 원짜리 해피라면의 기운이 사십 년 가까이 몸속 구석구석 마음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올라온 것이다.     



 “언니, 배고파!”

 우리는 합창하듯 소리를 질렀다. 큰언니는 어쩔 줄 몰라하며 찬장을 뒤지고, 밥솥을 열어보고 바쁘게 움직이며 먹을 것을 찾았다. 금세 온다며 외출한 엄마, 아빠가  밥때가 훌쩍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심술을 부렸고, 남동생은 눈물이 날 것 같은 얼굴로 큰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째 언니는 한 끼 정도 굶어도 죽지 않으니 조용히 좀 하라고 나에게 화를 냈고, 나는 더 큰소리로 배고프다고 소리쳤다. 큰언니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장롱을 열고 이 옷 저 옷 주머니를 뒤졌다.

“괜찮아, 이제 됐어!”


 큰언니가 커다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주먹을 펼쳤다. 백 원짜리 두 개. 언니가 내게 안심하라는 눈짓을 보내며 밖으로 나갔다. 한참이 지나 언니가 라면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조금만 기다려.”


 커다란 냄비에 물을 올리고 성냥이 말을 듣지 않아 곤로가 아닌 연탄불 위에 물을 끓였다. 또다시 한없는 기다림. 배고픔과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잔뜩 골을 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둘째야, 바닥에 뭐 좀 깔아, 다 됐어.”

 후각과 청각이 예민한 동물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으음, 기다려 내가 먼저 먹을 거야.”

 나는 잠에 취해 휘청거리며 라면을 향해 돌진했다.

 “아! 뜨거워, 뜨거워!”



 라면을 향해 돌진한 건 입이 아닌 발이었다. 큰언니가 상 위에 라면을 올리지 않고 바닥에 냄비를 내려놓았는데 잠이 덜 깬 내가 그걸 모르고 달려든 것이다. 너무 뜨거워 잠이 확 달아나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발이 뜨거워서가 아니라 라면을 먹지 못한다는 서러움 때문에 화가 났던 것이다. 큰언니는 너무 놀라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 바닥에 두는 게 아니었는데, 많이 아파?”


 큰언니가 찬물에 발을 담그게 한 후 바셀린을 듬뿍 발라주었다. 아픔이 약간의 쓰라림으로 바뀌자 나는 다시 뻔뻔해졌다.

 “저, 라면 내 발이 빠진 거니까 나는 먹을 수 있어.”

 “그래, 니가 다 먹어라, 먹어. 우웩. 그걸 누가 먹냐.”

 둘째 언니가 라면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고, 남동생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큰언니는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젓가락을 하나씩 우리들 손에 쥐여주었다.


  “감사하게 먹자. 괜찮을 거야.”

  큰언니는 한 사람이라도 먹지 않으면 아무도 라면을 먹을 수 없다는 강수를 두었다. 냄비 앞에 둥글게 모여 퉁퉁 불어 터진 라면을 먹었다. 주기도문으로 감사 기도를 드리고, 아주 맛있게, 후루룩 소리를 내며. 다 식었는데도 따뜻하게. 


  아홉 살 때쯤 먹었던 해피 라면이 지금도 강력한 기운으로 나를 불러낼 때가 있다. 라면 그릇 앞에 앉아 차가운 속을 달래고 쉬엄쉬엄 가라고. 


 겨우 이백 원으로 무얼 사야 할지 가게에서 서성서성, 라면 물이 너무 느리게 끓어 발을 동동동, 동생이 발에 화상을 입었을까 봐 마음이 울렁울렁. 큰언니의 사랑이 양념 스프보다 진하게 우러나왔을 테니 라면은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뽀글 머리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던 모습이 그려진, 해피라면. 그 천사가 큰언니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라면 한 젓가락을 크게 들어 올린다. 큰언니의 감사 기도와 후루룩후루룩 후후 라면 먹는 경쾌한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행복함이 따라 올라와 추운 속을 채운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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