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톡을 보냈었나 보다.
카톡이 왔는데 몰랐다.
전화가 온다
“엄마, 봄 냄새가 난다”
“뭐라고?”
대뜸 뭐라 하는데 못 알아 들었다.
“봄냄새 봄! 봄! 봄! 봄냄새난다고”
“아하! 그래 오늘 무지 포근하더라”
사실 난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그 짧은 시간 긴장이 된다.
나는 왜 긴장을 하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감성적인 말을 하는 아이에게 잘 받아 주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경험까지 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나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 가 신경이 이만 저만 쓰이는 게 아니다.
“이제 봄이 오는 거야?
“그럼, 이제 안 추워지는 거지? “
“아니, 아직 겨울이야, 요 며칠 포근한데 추운 날이 아직 남아 있지”
포근하다고 느껴지는 날이지만 아직 추운 겨울날씨 같은 내 마음은 아직 겨울에 멈춰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은 봄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보다.
통화가 끝나고 핸드폰을 보니 이미 나에게 봄내음이 난다고 톡을 보내왔었다.
계절의 변화를 시각으로 느끼는 나와 달리 후각으로 느끼는 그녀!
나의 껌딱지였던 딸, 그녀! 진짜 엄마를 마르고 닿도록 불러댔었다.
나와 그녀의 사이 엄마와 딸이지만 이 둘은 진짜로 더럽게 안 맞는다.
성격도 반대, 성향도 반대, 입맛도 반대, 취향도 반대, 같은 건 둘 다 여자라는 거 하나이다. 남들은 딸과 쿵작이 잘 맞아서 함께 하는 것도 많고 친구 같이 지낸다고들 하는데... 나는 친구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서로 각자 엄마와 딸이라는 있는 자리에서 주어진 삶을 잘 살아야 한다고 매번 세뇌를 시킨다. 나도 짐 안 되고 그녀도 짐이 되지 말라고 말한다.
지독한 사춘기의 시절을 혹독하게 치른 나와 그녀
아니 왜 본인의 사춘기에 나까지 끌어들인 거야? 아닌가 내가 발을 담근 건가?
나도 그녀의 어릴 땐 딸이 있어 좋았다.
엄마들의 바람처럼 예쁜 옷으로 예쁜 액세서리로 예쁘게 꾸미는 재미로 또 그 모습을 좋아하던 딸이었다.
어느 순간 그녀와 나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
밝은 빛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을 지나면서 지독한 어둠으로 우리의 사이는 볼장 다 본 사이가 된다.
그래서 지금의 우린 그 경계 어디 매쯤 경계선을 안다.
어쩌면 그 경계선을 알게 되었기에 서로 조심한다. 그 끝을 경험한 우리의 선택이다.
그녀의 고등 3년 시절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내를 배우게 하고 매일 평범하게 학교에 등교하는 딸의 일상에 감사기도를 하는 3년의 노력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녀와 살아온 이전의 날들의 수만 배의 마음의 수양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했다.
부모 자식 사이라도 서로의 상처에 대해 사과받지 못한 마음은 시간이 흘러도 깊이 있게 자리를 잡고 만다.
나는 그런 상처와 아픔이 어떤 것인지 나의 아빠를 통해 알기에 적어도 나의 자녀들과는 그런 감정의 골을 가지고 살고 싶지는 않았다.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부모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도 부모의 역할을 연습하고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어보진 않는다.
나는 나의 부모로서 부족한 모습을 너무도 늦게 깨달았다.
나의 잣대와 나의 기준에 아이들을 대했던 모습이 얼마나 숨 막히고 힘들었을지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그 잘못된 행동과 패턴들로 상처를 주고받았던 그녀와 내가 좋은 관계를 회복하고
살아가는 과정은 정말이지 삶이 지옥 같았던 곳에서 천국으로 바뀐 상황이 된 것도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