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 소설집) 두 번째 이야기
편지라는 게 참 오랜만이다. 이제는 손으로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어색한 나이인데, 이상하게 이 이야기만큼은 꼭 이렇게 써야 할 것 같았어. 자판이 아닌 글씨로 써서 적어 보내야 이 마음이 제대로 닿을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아니, 이런 이야기는 편지라는 형태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며칠 전, 이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도 연락을 받았을 줄 알고 망설이다가 같이 가자 연락은 하지 않았어. 장례식장에서 사모님께서 그러시더라. 다른 친구들은 안 왔다고. 너도 오지 않았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럴 줄 알았어. 고3 시절 이후, 너는 그분을 입에 올리는 일조차 피했잖아. 나는 반장이었으니까,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는 것이 맞겠다 싶어 다녀왔어. 현수와 성일이도 함께 갔고. 우리 셋이 그날 동창 중에 유일했더라.
근데, 너 기억나니? '무림열전’
네가 썼던 멋진 작품! 우리 동창들 모였을 때도 가끔 화제가 되기도 했었잖아. 그 무림열전, 참 기막혔지. 우리 반 전체가 몽땅 등장하고, 각자의 성격이 절묘하게 녹아 있어서 너무 재밌었잖아. 상철이는 퉁퉁한 도사로 나와선 잘난 척하는 것이 너무 웃겼고, 혁재는 취권의 고수라는 설정도 딱 어울리고 말야. 혁재는 진짜 취권의 고수가 됐지? 재밌어. 중국어 선생님은 미모의 악당으로 절묘하게 그려낸 것도 멋졌지.
물론 단점도 있어. 내가 너랑 친했는데도 불구하고 내 비중이 크지 않았던 것은 너무 큰 단점이었어. 내가 다시 언제 등장하나 늘 찾았거든.
수학 선생님, 영어 선생님 두 분 다 네 소설 속에서 정말 황당하게도 너무나 딱 똑같은 그 모습으로 살아있는 악당들이었는데 말야. 진짜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 우리 담임은 세상을 어지럽힐 거대한 악으로 묘사됐지. 글 잘쓰는 너답게, 풍자와 유머가 너무 재밌게 살아 있더라. 진짜 재밌었어. 아니 아직도 재밌어!
지금 여기까지 읽으면서 좀 놀랐니? 내가 너무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응 맞아. 그걸 좀 전까지 읽었거든. 물론 이 편지를 쓰려고 다시 한 번 넘겨본 것이지만. 신기하지? 그 무협 소설을 내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니? 나도 놀라워.
장례식장에서 사모님께서 우리에게 상자를 하나 주셨어. 그 상자가 뭔가하고 뭘 주시나 하고 처음엔 많이 의아했어. 열어보니 상자 안에는 파일 뭉치, 노트 뭉치, 수학여행 사진들, 그리고 우리 때 사건을 다룬 작은 메모들이 들어 있더라. 근데 그 중에 내가 놀란 것은 네가 썼던 이 무협소설이 거기 있었어.
우리 동창들 모였을 때 너도 그랬잖아. 그렇게 유명한 그 무협소설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나 모르겠다고 말야. 영어 선생님께 뺏겼다가 되찾아 온 것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았는데 그 이후의 행방을 모르겠다고 했었던 것이 나도 기억 나거든.
그 작품이 선생님의 상자 속에 보관돼 있었어. 사모님 말씀으로는, 이 상자를 종종 꺼내 보셨다고 해. 그리고 그 소설 뭉치는 특히 재밌어 하셨대. 아이들이 자신을 그렇게 그렸다는 게 이상하게 즐거우셨대.
참, 이 선생님에게 우리가 마지막 제자였다더라. 우리가 너무 관심을 끊고 지냈었나봐. 우리는 그냥 다른 학교 가셨겠거니 했었잖아? 그게 아니었더라고, 전근 가셨던 것은 맞는데, 거의 바로 그만두셨대. 교직이랑 안 맞는 것 같다면서 그만두셨다고. 그러곤 남겨둔 상자가 딱 이거였대. 아마 우리와 보낸 마지막 해가 가장 기억에 남으셨던 모양이야. 다른 일을 하시면서도 이 상자만은 보관하셨다네.
근데 그런 것들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뭔지 아니?
그 무협소설의 뒷장에 너의 시들이 있더라? 10편이라고 했지? 예전에 얘기했던 것 있잖아. 담임 선생님이 네게 너무나 큰 실망을 줬다던 그 사건 말야.
그 시.
그게 무협소설 맨 뒷장에 끼워져 있더라고. 난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데도 놀랐어. 세월이 많이 흘러서 종이가 낡아졌지만, 네 이름은 분명히 써있더라고.
그걸 버리지 않으셨었더라.
아, 그리고 하나 더.
‘내가 틀렸던 건 아닐까.’
내가 이 편지를 쓸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가 바로 이 문장을 발견한 것 때문이야. 나는 이 문장 하나에 딱 멈추게 되었어. 너의 시 작품 마지막 장 아래에 이렇게 쓰여 있었어. 그리고 네 작품에 빨간색 첨삭도 다 되어 있더라고. 마지막 장 끝에 ‘내가 틀렸던 것은 아닐까’라고 적혀있었어. 기분이 너무 묘하더라. 네게 몇 차례나 들었던 이야기라 대략 알고 있던 사건이 이렇게 내 눈앞에 갑자기 펼쳐지니까 내 감정이 다 이상해지는 거야. 생각이 많아지는 느낌이랄까. 네가 신춘문예에 응모한다고 정성스레 썼던 글을 선생님은 버렸다고 무심하게 말했던 그 기억. 나한테는 그저 친한 친구와 냉정한 담임 사이의 사건에 불과했는데 그걸 이렇게 몇십 년 만에 직접 보게 되다니.
너는 너대로 그 시절 상처를 품고 있었던 것을 나도 알고 있잖아.
그런데, 어쩌면 그분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계속 같은 질문을 되뇌고 계셨던 건 아닐까 싶더라. 끝내 말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그 마음은 글로 남기셨던 게 아닐까. 나는 그 메모를 보고 나서야, 그분이 교직을 떠났던 진짜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어. 우리 학교, 아니 그 시대의 학교라는 곳이 '좋은 대학 보내기' 외엔 교사에게 다른 길을 허락하지 않던 시절이었잖아. 어쩌면 그 안에서, 그분도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없다고 느끼셨던 건 아닐까.
그래서 너에게 이 편지를 쓴다. 나라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우리가 버림 받았다고 생각했던 그런 시간들이, 누군가의 마음 속에는 끝까지 남아 있었다는 걸. 그 사람이 틀렸던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은호야, 잘 지내고 있지? 작품들은 종이가 낡아서 우편으론 보낼 수 없을 것 같아. 직접 만나는 날 건네줄게.
조만간 다시 만나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정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