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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솔 Bin Sole Nov 24. 2024

지루함이라는 시간

지루하고도 유쾌한 시간의 철학, 자프란스키 지음, 김희상 옮김





지루해할 수 있는 특권에 대하여. 심드렁한 사건이 이어지고, 시간은 간다. 직선처럼 흐르는 시간의 참을 수 없음. 기다림. 고도(Godot). 시간 때우기로서의 문화. 지루함 탓에 엿보이는 시간의 허무함. 형이상학의 이명(耳鳴). 지루함의 낭만주의적 탐색. 지루함의 3막 드라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스스로 찾아 나서자. 자유와 새 출발 시간은 변함없이 흐른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지루해할 줄 아는 존재다. 먹고사는 일에 꼭 필요한 것이 해결되고 나면, 남는 것은 소일거리를 찾는 관심이다. 관심을 쏟을 적절한 사건과 일이 찾아지지 않는다면, 이 관심은 시간 흐름 자체에 겨누어진다. 평소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리던 일과 사건의 촘촘한 양탄자는 듬성듬성 구멍이 드러나고, 이 구멍 사이로 공허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보인다. 아무런 꾸밈이 없는 시간 흐름 자체와의 무기력한 만남, 이것을 우리는 지루함이라 부른다.


지루함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 흐름의 섬뜩한 측면을 경험케 한다. 물론 이 경험은 역설적이다. 지루함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이기 때문이다. 지루한 시간은 견디기 힘들게 늘어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지루함에서 시간을 경험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시간이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한다면, 물리학이 아니라 지루함의 경험을 살피는 것이 최선이다.


"지루함은 언제나 일정 시간 단위가 가지는 상대적 공허함 때문에 시간 흐름 자체를 주목할 때 나타난다"고 윌리엄 제임스는 진단했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란 없다. 항상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시간은 사건의 지속 정도이기 때문에 사건 없는 시간이란 없다. 바로 그래서 시간은 엄밀하게 말해 공허할 수가 없다. 공허하다는 느낌은 지금 일어나는 사건에 생생한 관심을 가질 수 없어서 생겨난다. 지루함의 원인은 주체나 대상에 있으며, 대개는 양쪽 모두에 있다. 지루함을 느끼는 주체는 무감각해서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받아들이는 게 없는 통에 쉽사리 지루해한다. 물론 완전히 무감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완전히 무감각하다면 지루하다는 것조차 모를 테니까. 완전히 무감각한 사람은 졸기만 한다. 최소한의 열린 자세, 호기심, 경험하고 싶다는 자세를 가져야 지루함이 나타난다.


지루함의 대상이 되는, 실제로 현재 마주하는 사건은 별 볼 일 없어 자극을 주지 못한다는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기계적으로 되풀이되는 일의 단조로움이랄까. 처음에는 자극적이었던 것이 판에 박은 되풀이와 습관으로 매력을 잃는다. 한때 숨 가쁘게 만들던 흥미가 긴 호흡의 따분함이 되어버린다. 본래 "외적인 일의 규칙적인 되풀이"는 인생의 “진정한 원동력"이라고 괴테는 썼다. 규칙적인 되풀이는 신뢰감과 "편안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습관의 편안함이 지루함으로 바뀌게 되면,이런 지루함은 고단한 절망까지 상승할 수 있다. "어떤 영국인은 매일 옷을 입고 벗는 일이 귀찮아 아예 자신을 걸어두었다고 하더군." 괴테의 전언이다.


풍부한 상상력을 자랑하는 깨어 있는 사람은 외부의 자극이 둔해지거나 아예 사라지더라도 내면의 현상, 이를테면 기억, 생각, 상상으로 한동안 도움을 받을 수 있기는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시간은 길어만 지고 결국 지루함에 빠진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단계에 따른 지루함을 정리했다. 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의식은 무엇이든 빨아들인다. 대상의 새로움은 항상 신선한 자극이 된다. 세계는 놀라운 일로 가득해 보인다. 그래서 하루는 지루함 없이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길다. 하루하루가 매 주일이 반쯤 영원해진다. 어른은 이런 기분을 특별한 경우에만 겪는다. 신이 나서 몰두하는 일이나 여행에서. 그러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간은 덧없이 날아간다. "하루가 모든 날과 같으면, 모든 날이 하루 같다. 완전한 단조로움 속에서는 아주 긴 인생이라 할지라도 지극히 짧은 순간으로만 체험될 뿐이다." 토마스 만이 《마의 산》에 쓴 구절이다. 물론 그처럼 허망한 인생은 되돌아보는 눈길에만 짧아 보일 뿐이다. 지금 당장에는 그 헛헛함 때문에 지겨울 정도로 지루하다. 공허함만이 남는다.


새로움이 희박해질수록 그만큼 시간은 두드러진다. 마치 숨었던 시간이 고개를 내미는 것만 같다. 시간이 사건 뒤에 숨어 있어서 우리의 일


상적 감각에는 직접 절박하게 체험되지 않기 때문이다. 커튼의 틈새 사이로 시간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다. 시계를 바라보는 눈길은 지루함을 더 강하게 키운다. 초침의 똑딱임이나 시침의 완만한 움직임으로 점점이 찍히는 시간은 일이라고는 없는 곤궁한 것으로 느껴져 참아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독방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고문인 이유가 달리 있을까. 잠 못 이루는 밤에 우리는 공허한 시간의 고문을 몸서리치게 경험한다. 불면증으로 악명을 떨친 현대 철학자 에밀 치오란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새벽 3시다. 나는 매초를 지각(知覺)한다. 그동안 몇 분이 지났는지 헤아린다. 이 모든 게 뭐하자는 건가? 태어났기에 겪는 일이다. 뜬눈으로 지새운 밤들은 왜 태어났냐고 묻게 만든다.”


그러나 내적이든 외적이든 사건이 심드렁해져 빛바랜다고 해서 지루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지루함은 내면의 불안을, 욕구는 있으나 채울 길이 없어 느끼는 헛헛한 불안을 끌어들인다. 무엇에든 빠져들 수 없다는 것, 순간에 몰두할 수 없다는 것이 지루함이기 때문이다. 순간은 그저 순간으로 이어지며 견디기 힘든 시간으로 뻗어나간다. 그러나 이 뻗어나감은 자유와 활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마비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 자신의 인생에 직접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전망은 지독히 무기력한 마비를 부른다. 이런 식으로 지루함에 사로잡힌 사람은 짜증 어린 투로 묻는다. 오늘 또 뭘 해야 할지 스스로 찾아야 해? 초조하게 무엇인가 기다린다. 무얼 기다리는지 전혀 모르면서, 내면의 시간은 공허하게 똑딱거린다. 순간은 순간으로 이어진다. 지루함에 빠진 사람은 동시에 시간의 소용돌이에 말려들며 마비된다.


시간병리학에 따르면 '시간과 관련된 강박관념'이라는 현상이 있다. 어떤 환자는 정신과 의사 빅토르 에밀 폰 게브자텔을 상대로 이 강박관념을 실감나게 정리했다. "저는 시간이 허망하게 흐른다는 생각을 멈출수가 없어요." 이 환자는 일이나 사건 자체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며, 늘시간 단위만 지각한다. 모든 것을 시간 지각으로만 환원하는 이런 태도는 세계 체험을 방해한다. 그리고 뒤이어 이런 말을 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생각을 피할 수가 없어요. '1초가 걸렸구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참을 수가 없어 흥분합니다. 또 1초가 지나갔구나, 다시 1초로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말이죠.”


단조롭게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이어지는 시점들은 일직선의 연속된 시간으로 팽창한다. 미하엘 토이니센은 지루함으로 이뤄지는 이런 종류의 시간 체험을 "다차원적 시간 질서의 붕괴로 빚어지는, 일직선 시간질서에로의 투항"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이게 무슨 말인지 풀어보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3차원의 시간 질서, 곧 서로 투영하고 반영하며 다양하게 중첩되어 있는 시간 질서가 똑딱거리는 일직선의 시간흐름으로 확 졸아든다는 것이 토이니센의 관점이다. 이런 압축은 풍요하기만 한 시간 경험을 지워버리는 강박적인 지각 압축이다. 현재 체험 속에 끼어드는 기억과 기대는 시간에 폭과 너비, 깊이와 연장(延長)을 더해준다. 그러나 일직선의 시간 질서가 압도하면, 시간은 단순히 이어지는 시점으로 졸아든다. 늘 똑같은 것이 되풀이되는 단조로움이 생겨나는 이치다. 지금과 지금과 지금. 이것은 지루함의 악무한이다. 이 악무한 속에서 우리는 지금과 지금과 지금과는 다른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공허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항상 지루한 것은 아니다. 기다림에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둘러싼 기대감으로 긴장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긴장감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의식이 앞으로 벌어질 일을 그려보기 때문이다.

만남을 예로 들어보자. 카페에 앉아 그녀 혹은 그를 기다린다. 숱한 생각, 이를테면 미리 맛보는 즐거움, 기쁨,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앞당겨 맛보는 감정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늦는다. 약속 장소를 제대로 찾은 것인지 의심이 인다. 슬쩍 불쾌한 기분이 고개를 든다. 기다리는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열등해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속상하고 짜증 나고 실망한 나머지 부아가 돋는다. 그러나 지루함은 아니다.


이처럼 기대한 사건이나 일에서 지루함은 좀체 끼어들 자리가 없다. 혹시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사건의 경우에도 이에 앞서 솟아오르는 감정 때문에 지루함이 일반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관청에서 일 처리를 해야 하는 경우는 다르다. 이런 일에서는 시간을 도둑맞는다는 느낌, 시간을 의미 있게 쓰지 못하도록 방해받는다는 느낌이 강해서 지루함은피할 수 없다.


이처럼 기다림이라고 해서 모두 지루함과 맞물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꾸로 모든 지루함은 기다림을 포함한다. 정확히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지 못하는 기다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기다림이 그렇다. 이런 지루한 기다림은, 현상학자의 표현대로 한다면, 공허한 지향성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이 처한 근본 상황으로서의 그런 공허한 기다림을 블랙코미디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연극 무대에서 두 명의 떠돌이는 무엇인가 기다린다. 그러나 두 주인공은 물론이고 관객도 대체 무얼 기다리는 것인지 전혀 모른다.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고도다. 그런데 이 고도라는 인물이 도대체 존재는 하는지, 실제로 나타나기는 할 것인지, 또 나타난다면 그게 언제인지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불분명함으로 고도는 형체를 잃어버린다. 남는 것은 공허함뿐이다. 두 주인공은 자신들이 누구를 기다리는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한다. "어서와라,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 이야기를 해야 죽지 않지." 고트프리트 벤은 이렇게 노래했다. 그래서 두 주인공은 그저 순간순간 떠오르는 대로 주워섬기며 떠들고 행동한다. 그러나 허망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경험을 가리기에 이런 수다와 소통은 너무 부족하다. 오히려 몸부림칠수록 허무함은 커지기만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하룻밤 사이에 현대의 고전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이 작품은 모든 극의 비밀을 고스란히 폭로하기 때문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다채롭고, 잘 짜였으며, 흥미를 자극하는 이 모든 극은 결국 시간을 죽이려는 성공적인 시도가 아니고무엇인가? 아무튼 극이 성공적이라면 촘촘히 짜인 사건들의 양탄자로 허망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지 못하게 막는 가리개로서일 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공허한 삶을 어떻게든 지탱해보려는 이런 바지런함의 패러디다. 사건의 양탄자는 듬성듬성 구멍이 뚫린 누더기로 남는다. 곳곳의 구멍으로 허무함이 속살을 내비친다.


블라디미르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군. 다행히도 우리는 알아. 그래, 이 무시무시한 혼란 속에서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지. 우리는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는 거야.


에스트라공 그래, 맞아.


블라디미르 또는 밤이 오기를 기다리는 거야. (...) 분명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시간이 좀체 가지 않아, 우리가 닥치는 대로 뭐든 해야 한다는 거야.(...) 자네, 우리의 이성을 몰락으로부터 보호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나에게 말해주겠나. (...)


에스트라공지.(...) 우리는 모두 미친 상태로 태어났어. 몇몇은 그대로 미쳐 있지 (...)


블라디미르 우리는 기다려. (・・・) 우리는 죽을 정도로 지루해, 그건 논란의 여지가 없지. 좋아,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릴 일이 있어야 해, 무얼 하지? 그런 기회를 쓰지 않았군.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릴 일"이라는 것은 포조와 럭키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앞에서 펼치는 주인과 노예 연극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연극 속의 연극이 펼쳐진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이 기분 전환의 기회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지속적으로 충분히 활용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두 주인공은 서로 핏대를 올려가며 비난한다. 기분 전환을 위한 소일거리가 있음에도 왜 지루하게만 기다리느냐는 비난이다. 그러나 지루함이 두 사람의 잘못 때문은 아니다. 기분 전환의 기회 자체가 지속성을 가지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주인과 노예 연기는 지루함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갈수록 지루함을 더 키울 뿐이다. 두 주인공이 몸소 경험하는 것은 오락의 기본 법칙이다. 지루함은 그것을 몰아내고자 하는 수단 속에 오히려 더 짙게 숨어 있다. 무대 위의 슬랩스틱을 문화의 상징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이런 문화는 지루함을 상대로 하는 싸움에 방해가 될 뿐이다. 그리고 이처럼 지루함은 높이 오르고자 하는 모든 것의 바탕에 깔려 있다.


이미 키르케고르 역시 못지않은 재치로 지루함을 문화와 역사를 떠받드는 근원적인 힘으로 비슷하게 설명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보면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신들은 지루한 나머지 인간을 창조했다. 아담은 홀로 있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지루해했다. 그래서 이브가 창조되었다. 그때부터 지루함이 세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했으며, 인류가 늘어나는 정확히 그만큼 커져갔다. 아담이 혼자라 지루해하더니, 아담과 이브는 함께 지루해했으며, 그런 다음에는 아담과 이브와 카인과 아벨은 가족으로 지루해했으며, 세계의 인구가 늘어나며 민족들은 집단으로 지루해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민족들은 탑을 지을 생각을 해냈다. 아주 높이 하늘까지 이르는 탑을…그 뒤에 민족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오늘날에 사람들은 외국으로 여행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해서 지루해할 뿐이다."


키르케고르는 지루함이 온갖 악의 뿌리라고 설명한다. 결국 인간은 오락을 해야만 하는 존재다. 추락의 위험에 처한 사람은 오락을 즐겨야만 한다. 어디로 추락할까? '공허한' 시간에로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본래적인 원죄 탓에 벌어지는 일이다.


실제로 중세 기독교는 지루함을 '아케디아"라 부르고 죄악으로 간주했다. '아케디아'는 심장의 게으름, 완고함, 신을 바라보는 닫힌 자세로 이해되었다. 생명을 충족하는 신을 거부하는 자세가 곧 지루함이라는 관점이다. 신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사람은 공허함에 사로잡힌다. 17세기에 블레즈 파스칼도 지루함을 이렇게 해석했다. 신은 고결한 존재이며, 공허함은 신의 그림자로 인식된다. 부정적인 고결함이 공허함이다. 신은 시간을 채워준다. 따라서 신의 충족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공허한 시간만이 남는다. 이 공허한 시간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은 "기분 전환"을 찾는다. 파스칼은 부산함과 동요가 이렇게 해서 생겨난다고 보았다. 모든 불행은 인간이 "자신의 방 안에 홀로 조용히 머무를 수 없어서" 야기된다고 파스칼은 썼다. 인간은 홀로 있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방 안에 조용히 머무를 수 없다. 그리고 홀로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신을 거부하는 태도에 있다고 파스칼은 말한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은 텅 빈 공간 안에 덩그러니 남아, 공간으로부터 집어삼켜진다. 지루함에서 체험되는 것은 내면의 공허함을 바라보는 충격이다. 지루함은 저 바깥의 공허한 우주 공간을 바라보는 충격보다 더 열악하다. 파스칼은 못지않게 절박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공허한 우주 공간을 환기시킨다. "공간의 무한한 광활함에 집어삼켜진다. (…) 소름 돋는 공포에 나는 사로잡힌다."


파스칼은 인간이 한편으로는 도피하려 안간힘을 쓰는 저 내면의 지루함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도피한 바깥의 기분 전환 사이에서 이리저리 쏠리며 소모된다고 보았다. 파스칼에게 지루함은 심리적인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형이상학적 상태, 곧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 보이는 증상이다. 의미를 잃은 공허한 시간에게 받는 고통. 허무함과의 독대.


이런 전통에 충실하게 키르케고르 역시 지루함을 "인간을 허무함 앞에 세우는" 힘으로 생각했으며, 이로써 "신과의 부정적 관계가 드러난 표현으로 이해했다.


1800년을 전후해 나타난 낭만주의자들은 공허한 시간이 가지는 어둡고 위협적인 비밀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들은 바닥 모를 심연과 마찬가지로 지루함에 문학의 마법을 걸었다. 낭만주의자가 지루함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데에는 주관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측면이 함께 작용했다. 낭만주의자는 주관적인 측면에서 인생을 만끽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체험에 목말라했다. 이 갈망이 채워지지 않자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인 변화로 겪는 지루함은 훨씬 더 심했다. 이제 막 시작된, 시민 생활환경의 합리화와 기계화는 낭만의 마법에 취한 일상을 탈마법화했기 때문이다. 예민함으로 무장한 자아 숭배의 학파를 이루었던 낭만주의는 지나치게 자아에 매달리고 현실을 소홀히 다룬 탓에 그만큼 지루함에 빠지기 쉬웠다. 다른 한편으로 외부의 사회 현실에서 일어나는 변화에도 낭만주의는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이헨도르프는 이런 물음을 던졌다. “민족 전체가 모든 악덕의 본래적인 어머니인 내면의 지루함 탓에 저 외부의 먹고사는 일의 바지런함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지루함을 근대의 중요한 주제로 다루기 시작한 쪽은 낭만주의다. 낭만주의는 지루함의 경험을 다룰 적절한 문학 형식을 창조해냈다. 이 형식은 오늘날 여전히 우리가 지루함을 다루는 방식이다. 낭만주의를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지루함의 집중적인 묘사는 루트비히 티크의 청소년 소설 《윌리엄 러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루함은 지옥의 고통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보다 더 큰 고통을 겪어보지 못했다. 몸과 마음의 아픔이 정신을 괴롭힌다. 불행에 사로잡힌 사람은 불평을 일삼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쏟아지는 생각의 혼란 속에서 시간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휙 사라진다. 우두커니 앉아 벽에 박힌 못들을 바라보다가 방 안을 서성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앉는다. 눈두덩을 비비며 무엇에든 생각을 집중해보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좋을지 모른다. 다시금 창밖을 내다보며 분위기 전환 삼아 소파에 몸을 던진다 아……… 이런 걸 두고 고통이라 하는구나. 고통은 마치 가재처럼 시간을 갉아먹는다. 몇 분이, 시간이, 하루가 똑같이 길게 느껴지는데, 한 달이 지나고 놀라 외친다. '맙소사, 시간이 이처럼 빨리 흐르는구나!”


이것이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찰나적인 지루함을 묘사한 글이다. 티크는 후기 작품 《저녁의 대화>에서 집요하고 끈질기게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지루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정말이지 너는 인생에서 단 한번도 지독한 지루함을 느껴보지 않았다고? 지루함이란 너무나 무거워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가라앉아 거기 착 달라붙지. 그저 짧은 한숨이나 자의적인 웃음으로 떨칠 수 있는 게 아니야. 또는 즐거운 소설 한 권 읽고 난 뒤의 여운처럼 허망하기만 해. 바위에 새긴 것만 같은 흐릿한 삶의 게으름은 하품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오로지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불평할 뿐이지. 적막하고 황량하기만 한 상냥함, 저 뤼네부르거하이데처럼 툭 터진 공허함, 영혼을 움직이는 시계추의 정지 상태. 이런 지루함에 비하면 불쾌함, 불안, 초조함, 반감은 차라리 파라다이스의 감정이라 불러 마땅하리라."


지루함의 경험은, 파스칼과 아케디아 전통과 마찬가지로, 의미로부터 멀어진 실존적 상황으로 이해된다. 시간의 지배에 시달리는 지루함


은 창조적이지 않으며, 일체의 것을 비워내는 공허함으로 체험된다. 지루함이 불러오는 정황은 차라리 부차적이다. 이런 정황은 암울함에 사로잡힌 낭만주의가 인간의 조건으로 보는 것을 나타내 보일 기회일 뿐이다. 바닥이라고는 모르는 인간 내면의 공허함. 이 공허함에서 우리는 휙휙 사라지는 시간의 소리를 듣는다. 형이상학의 이명(耳鳴). 웅웅 울리는 시간의 허망한 사라짐. 그래도 지루함이 불러온 정황이 그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19세기 초에 나타난 사회 발달, 낭만주의가 천박한 피상화로 받아들인 평준화다. E. T. A. 호프만과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는 획일적인 도시화에 지역의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프랑스혁명으로 나타난 평준화의 경향을 지루함의 원인으로 보았다.


그런 평준화를 우리는 오늘날에도 체험한다. 심지어 평준화는 취향의 전 지구화라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패션과 비즈니스는 평준화를 더욱 키울 뿐이다. 표준화와 문화 산업의 획일화로 외부에서 강제되는 지루함의 계기는 차고도 넘쳐난다.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오늘날에는 특히 현대 유목민의 거점이자 집합 장소, 이를테면 공항, 기차역, 쇼핑몰, 백화점에 지루함이 범람한다. 이 실질적인 허무주의의 교통 공간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는 만남, 애써 감추는 공간 공포, 욕망의 평면 모니터로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이다. 오늘날에는 정말이지 도심의 번화가가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의 내면을 닮았다는 강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낭만주의는 이미 도시 외관의 지루한 황폐화를 말라비틀어진 공간 감각과 결부했다. 기하학의 창의적 정신이 말라 비틀어져 황폐화가 나왔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티크는 항상 최단 거리만 찾는 직선을 무미건조한 인생의 근본 바탕으로 보았다. 반대로 구불구불 구부러진 곡선, 무궁무진한 유희의 가능성을 품은 곡선의 배열은 뒤로 밀리고 말았다. 오로지 탈선과 방종이 허락될 때에만, 깜짝 이벤트와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가 말하는 자극적 혼란이 필요할 때에만, 전모를 가늠하기 힘든 복잡함, 심지어 음산함이 선호된다. 복잡한 골목의 중세 도시를 미화하거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프랑스식 정원보다 거칠게 가꾼 정원을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단조로운 직선이 야기하는 지루함에 보이는 반감이다. 직선과 정교한 구도는, 겉보기로는 공간이 널찍해 보일 수 있으나,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좁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 원인은 공간의 규칙성이 시간의 무한 반복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에 있다. 피곤한 동시에 압박하는 단조로움은 피할 수가 없다. 똑같은 모양으로 구획된 공간은 늘 같은 것이 되풀이되는 시간 체험과 같다. 두 경우 모두 그 결과는 지루함이다.


1800년을 기준으로 보면 고되게 죽어라 일해야만 했던 사람들, 대다수였던 이런 사람들은 지루함을 몰랐다. 다만 권력자와 부자만이 지루함으로 괴로워했다고 몽테스키외는 썼다. 민중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느라 지루해할 틈이 없었다고 루소도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지루함은 오로지 "부자를 때리는 채찍이었다고 했다. 달리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많았던 평범한 사람들은 부자가 "죽을 지경으로 지루함에 빠지지 않도록 갖은 호사를 부린 유흥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어야만 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다. 오늘날에는 일부 부자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오락을 즐기지 않으면 우울증에 사로잡힌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지루함을 둘러싼 정황은 대중화됐다.


전체 산업은 사람들이 죽을 지경으로 지루함에 빠지지 않도록 앞다투어 상품을 제공한다. 이 상품에는 물질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여행. 이벤트 영화, 방송, 인터넷 등 각종 체험이 소비자를 유혹한다. 이로써 소비자가 실망을 가지게 되는 진원지도 달라졌다. 게르하르트 슐체는 이 변화를 연구서 <체험 사회>에서 적시한다. 예전에는 재화를 충분히 가질 수 없어 실망했다. 가지지 못함의 실망, 가지지 못해 홀대받는 실망이었다. 오늘날의 실망은 "체험하지 못함이다. 지루함을 쫓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제공되는데, 그래도 지루해서 사람들은 실망을 느낀다. 그러나 소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지루함이 생겨나는 원인이 자신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좀체 하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제공되는 상품이 부족해, “다 그게 그거야”라고, 지루하다고 소비자는 생각한다. 체험의 "부족이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하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1초가 멀다 하고 채널이 돌아간다. 이 프로그램에서 저 프로그램으로 숨 가쁘게 건너뛸 뿐이다. 주의력은 갈수록 짧아지고, 체험의 연속성은 토막토막 끊긴다. 그 결과 맥락 없음이라는 구멍 사이로 다시금 지루함이, 공허한 시간의 경험이 비집고 들어온다. 깜짝 놀란 소비자는 서둘러 이 구멍을 막으려 채널을 돌린다. 갈수록 더 쥐어짜지만, 결국 텔레비전 앞에서 보낸 저녁 시간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전혀 없다.


지금까지는 참을 수 없는 공허한 시간을 지우려는 안타까움을 가리고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사건들 혹은 사건들의 양탄자가 우리 이야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럼 시간 지우기 자체가 문제의 중심에 선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이는 지루함 그 자체를 주목하지 않는 고찰에 전혀 만족하지 못한다. 지루함에서 드러나는 없음, 무(無), 하이데거는 눈이 번쩍 뜨인다. 그는 무에서 인간의 심연을 송두리째 발견한다. 1929년에서 1930년에 걸쳐 진행한 위대한 강연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 세계-유한함-고독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근본 경험인 지루함을 집요하게 분석했다. 이전에 어떤 철학자도 시도하지 않은 상세한 분석이다. 이 분석에서 지루함은 철학적 사건이 된다. 그가 행한 분석의 길을 몇 걸음 따라가보자. 마치 주문(呪文)과도 같은 그의 분석을 하이데거는 강의를 듣는 청중을 거대한 공허함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청중더러 실존의 울림을 들으라고 한다. 아무것도 없는, 의지하거나 속을 채울 게 아무것도 없는 순간을 하이데거는 열어 보인다. 오로지 공허한 시간 지우기만 남는다. 지루함이라는 순간은 시간이 집요하게 주목해달라고 하는, 지워지거나 이리저리 흘려대거나 의미 있게 채울 수 없는 순간이다. 흔들리지 않는 집요함으로-강의 원고만 150쪽인데-하이데거는 이 주제를 천착한다. 분석할 수 있으려면 지루함을 불러와야만 하니까. 하이데거의 분석은 형이상학에 입문하는 사건이다. 분석의 핵심 주제는 다름이 아니라 전부와 전무, 존재와 무이기 때문이다. 분석은 어떻게 지루함에서 형이상학 경험의 두 극단, 한편으로는 전체로서의 세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의 실존이 역설적이게도 맞물리는지 보여준다. 역설적인 이유는 우리가 세계 전체에게 사로잡히면서 동시에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세계는 빠져나감에서, 그것이 남겨놓은 공허함에서 존재한다. 존재하되 공허한 세계. 또는 바닥 모를 심연 속의 세계. "결국 우리는 존재의 심연에서 드러나는 뿌리 깊은 지루함이 침묵의 안개처럼 시야를 가로막는 지경까지 나아갈까?"


이 지루함의 심연 앞에서 흔히 우리는 공간 공포, 곧 자신 앞에 바닥을 모르게 펼쳐진 공간을 바라보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충격을 우리는 견뎌내야만 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충격의 감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서부터 라이프니츠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제기된 형이상학의 물음, 즉 '왜 어떤 것은 존재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아닐까?'라는 물음을 다루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본래 우리는 없음. 허무함을 익히 안다. 마음에 드는 그 이상으로 잘 안다. 자주 사로잡히는 공허함의 감정은 일상이 아니던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일상적으로 우리는 공허함을 이내 덮어버린다. 공허한 불편함을 서둘러 덮는 것을 한동안, 지루하더라도 한동안 참아내는 태도를 가질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 이런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지루함에서 흔히 일어나듯, 세계로부터 따돌려지느니 차라리 세계에 자발적으로 사로잡히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따돌림은 철학적 통찰에 꼭 필요하다. 하이데거는 느껴진 허무, 곧 지루함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이 탄생하는 것으로 연출한다. 극적으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탁월한 감각으로 긴장감은 하이데거가 사색을 펼치는 장소가 공허할수록 더 커진다.


어떤 것 때문에 지루함을 느끼는 경우야 다루기 간단하다. 그 어떤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책, 공연, 특정 인물 때문에 지루하다면, 그 대상을 적시하면 그만이다. 이런 경우 지루함은 바깥에서 밀고 들어온 것이며, 외적인 원인을 가진다.


그러나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는 까다롭다. 지루함이 바깥에서 비롯되었고 동시에 내면에서 치솟았다면, 사람은 어떤 것과 더불어 지루해한다. 정각에 도착하지 않은 기차가 지루하게 만든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차의 연착으로 빠져든 상황은 얼마든지 지루할 수 있다. 어떤 특정 사건이 계기가 되어 지루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런 지루함이 혼란스러운 것은 비슷한 상황을 맞으면 지루해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어찌해볼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 결과, 어찌해볼 것이 없다는 황망함, '아무것도 없음', 곧 무(無)가 확인된다. 저녁 시간을 때 우려 찾은 여흥이 지루한 예를 생각해보자. 지루한 저녁 오락은 짜증스러울 뿐만 아니라, 살짝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정황으로 미루어 행사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는데, 자신이 지루한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복잡하다. 지루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바로 지루함을 쫓으려 의도한 기획이기 때문이다. 지루한 게 싫어서 찾은 저녁 행사가 지루하다. 이거 내가 문제인거 아냐? 앞서 이미 오락의 기본 법칙은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지루함을 쫓아내려 한 대책 안에 지루함이 잠복한다는 법칙이다. 바꿔 말하면, 지루함을 막으려 시도한 일이 이미 지루함에 감염되었다. 이런 경우에는 시간을 어찌 보낼 것인가?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존재인 인간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존에는 일종의 블랙홀이 있는가? 가장 심한 지루함은 전적으로 익명이다. 지루함을 불러온다고 특정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그냥 지루하다, 이렇게 우리는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 표현을 면밀히 분석한다. 이 표현에는 이중의 불특정성이 있다. 그냥, 이게 전부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특정할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지루해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이 표현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지루해할 거라며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다. 마치 지루한 사람인 것을 부끄러워할 '나'를 집어삼킨 것만 같은 표현이다. 이 그냥 지루하다라는 표현을 하이데거는 충족된 시간과 충족해주는 시간의 완전한 부재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순간. 이 "공허하게 버려짐"을 하이데거는 그 멋들어진 정리 솜씨를 유감없이 뽐내며 이렇게 나타냈다. "전체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자로 속절없이 내몰림." 이로써 우리는 하이데거 취향에 따른 형이상학의 심장부에 들어섰다. 하이데거가 설정한 형이상학의 목표는 이렇다. "지루함의 본질을 해석해 시간의 본질을 간파하자." 도대체 충족해주는 모든 것의 완전한 부재 속에서 시간은 어떻게 체험될까 하고 하이데거는 묻는다. 시간은 지워지려 하지 않는다. 시간은 멈추어 선다. 시간은 움직이기 싫어하는 관성으로 굳어진다. 시간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어쩔 줄 모르고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초조함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어찌해야 좋을지조차 모른다. 지루함의 자아는 경직되었고, 탈(脫) 인격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지루함에 사로잡힌 사람은 세계로부터 일탈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부터도 멀어진다. 남는 것은 오로지 시간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인간이 시간과 더불어 가면서 그 흐름을 보여줄 수 없는 시간이다. 어쨌거나 시간은 몹시 더디게 꼬무락거린다.


지루함에서 나타나는 이 포괄적 마비는 시간이 우리가 그 안에서 움직이는 매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시간의 공동제작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물론 우리는 시간 안에서 산다. 그러나 시간은 또한 우리 안에 있기도 하다. 우리는 시간을 가게 만든다. 지루함은 시간을 가게 하는 힘을 우리가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멎어버린 시간, 고인 시간의 흐름이라는 경험은 하이데거가 연출한 동시에 분석하는 지루함의 드라마의 극적인 변곡점이다. 최악의 마비 지점에 이르러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자신을 떼어내야만 한다고 깨닫는다. 아무것도 없다면, 스스로 찾아 나서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요점을 상세히 정리한다. "그러나 마법에 걸린 듯 꼼짝도 하지 않는 것, 시간이 (...) 깨닫게 하면서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 다름이 아니라 실존의 자유 그 자체다. (...) 그러나 실존의 해방은 오로지 자신의 결단으로만 일어난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에서 지루함이라는 주제로 연출하는 드라마는 3막이다.


1막에서 인간은 매일 세계로 나아가며, 세계는 인간을 채워준다.


2막에서는 모든 것이 멀어진다. 공허함이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자아와 세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시간은 고여버린다.


마지막으로 3막에서는 멀어졌던 것, 자아와 세계가 다시 되돌아온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 지점으로 집중된다. 죽은 자아와 세계가 재탄생하는 지점으로, 다시금 탄생하는 순간으로, 두 번째 출발, 지루함이라는 사막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사람은 변화의 기회에 자신을 열어야만 한다. 자신의 자아와 주변의 사물을 더욱 강한 밀도로 만나야 한다. 자아와 사물은 이제 실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지루함과 새 출발 사이에 비교격, 더 강한 밀도의 만남이라는 비교격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기적과도 같은 정확성을 자랑한다.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새 출발, 이게 과연 가능할까? 결정주의가 아닐까? 분명하다, 새 출발은 결정주의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새 출발을 일단 새 출발을 감행하고, 지켜볼 노릇이다. 기다림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좋은 기회가 없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좋은 기회로서 포착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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