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醜의 미학, 카를 로젠크란츠

by 빈솔 Bin Sole

천박함 (Das Gemeine)에 대하여

추(醜)에 대한 학문적 기술이 논리적 주요논거를 오직 미(美)라는 실제적 이념에서만 빼내올 수 있다는 점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추는 단지 미 자체에서, 그리고 미로부터 이것에 대한 부정으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와 추의 관계는 바로, 그 논리 역시 건강과 선의 본성에 의해 주어져 있는 병 혹은 악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다. 이때 학문이 필요로 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으로 논리적 정확성을 통해서 마련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인식의 분야에서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자는 실러가 말한 바대로 깊숙이 들어가서 날카롭게 구분하고 다양하게 서로 연계시키며 굳건하게 지켜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개념을 예를 통해서도 설명해야 한다. 특히 거의 손이 닿지 않았던 영역에서 말이다. 그는 비로소 예를 통해서 추상적 규정에 계속해서 붙어 있을 수 있는 의혹을 제거한다. 그러나 그는 예로 인해서 새로운 위험속으로 들어간다. 왜냐하면 특별한 경우인 예는 진리의 보편성을 제한하고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을 섞어놓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실러는 정당하게4) 말하기를 학문적 엄격함을 중요시하는 작가는 예를 가급적 사용하지 말고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하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논문을 진행하면서 보편적으로는 올바른 이 규칙을 어기지 않을 수 없다. 그 까닭은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대상이 관찰해야 하는 것이고 그 추상적 개념규정을 위해서는 예를 통해서 그 진실성을 검토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을 조급하게 특수한 것에 적용하려는 인간의 성급함과 대부분의 독자들이 순수하게 개념적인 규정에 오래 머무는 데 미숙하다는 점으로 인해서 오늘날의 작가는 학계보다 더 큰 독자층을 위해서 설명을 하려는 즉시 어쩔 수 없이 많은 것을 예를 통해서 하게 된다. 전통적 교육이 개념의 특별한 의미를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예에 매달려 있는지는 그 개념의 역사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레싱은 분명히 개념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규정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수없이 인용된 다음의 그의 견해를 살펴보라. 즉, 우리는 테르지테스를 호메로스에 의해서 문학적으로 창작된 인물로 머릿속에 표상할 수 있지만, 그림으로 그려진 그를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레싱 자신이 카일루스 백작에 의해 영향을 받고 비로소 갖게 된 생각인데, 백작은 호메로스 작품에 대한 스케치에서 테르지테스를 빼버렸다. 실러는 논문"예술에서 천박함과 비천함의 사용에 관하여"에서 레싱의 모범을 따르면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호메로스에 의해서 거지로 표상된 오디세우스를 그림으로 그리면 우리는 그것을 감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비천한 동반 표상들이 그 관찰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근거 없는 견해이며 다행히도 회화는 결코 단 한 번도 그런 견해를 따른 적이 없다.


진정한 미는 숭고함과 유쾌함 사이의 행복한 중심으로 숭고함의 무한성과 유쾌함의 유한성으로 균등하게 자신을 채우는 행복한 중심이다. 숭고미는 그 자체가 특정한 미의 형태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함의 정의를 완전히 주관적인 것으로 해놓았다. 왜냐하면 그에 따르면 숭고함이란 그 자체를 그저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도 모든 감각적인 것을 초월하는 심성의 힘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이론은 실러가 저 유명한 디스티혼으로 주장한 무한한 공간의 숭고함을 부인할 정도로 확장될 뿐만 아니라 결국 루게 (Ruge)와 피셔(K. Fischer)의 경우처럼5) 자연에는 숭고함이 아예 없다고까지 말하게 된다. 이 점은 틀렸다. 왜냐하면 자연은 무엇보다 그 자체로도 숭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숭고함이 자연의 어느 곳에 현존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 숭고함을 찾는다. 우리는 숭고함을 고된 여행의 목적지로 삼는다. 우리가 연기를 내뿜는 에트나의 눈 덮인 정상에 서서 시칠리아가 칼라브리 해안과 아프리카의 해안 사이에서 바다의 파도에 휩쓸리는 것을 볼 때 이 광경의 숭고함은 우리들의 주관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객관적 작품이다. 우리는 이 광경을 정상에 오르기 전에 이미 기대하고 있었다. 혹은 나이아가라 폭포가 하늘까지 물안개를 내뿜고 거품을 일으키며 진동하는 바위를 지나 수 마일의 폭을 이뤄 아래로 우레 같은 소리를 낼 때 인간은 이러한 장관의 목격자가 될 수 있거나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에 관한 한, 그것이 숭고함에 반하는 대립적 근거는 결코 아니다. 자연과 예술도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칸트 역시 모든 감각적인 것을 초월하는 심성의 힘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뿐이다. 후세 사람들이 비로소 감각적인 것을 전적으로 숭고함에서 배제하고 숭고함을 오직 도덕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에 집어넣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숭고함은 유한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면서 자체에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 무한한 것은 우리가 단지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이 스스로를 현실화하며 이것에 대한 관찰이 우리를 유한한 것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우리의 심성을 반복적으로 승화시킨다. 우리가 얼음으로 뒤덮인 에트나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를 아주 커다란 연관관계로 바라보고 그 결과 보통의 경우에는 지평선과 수평선의 경계를 이루었던 것이 우리 밑 깊숙이 놓여 있게 되면 이런 거시적 전경은 우리를 모든 주관적 협소함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횔덜린이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Tod des Empedokles)에서 아주 훌륭히 묘사했듯이 우주를 주재하는 신들의 위치로 우리를 승화시킨다.



우리가 숭고함의 구분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중 하나의 구분을 보편적 개념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숭고함의 개념에서 수많은 오해를 불식시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숭고함은 관념적으로든 혹은 실재적으로든 자유의 부정을 그 한계의 지양을 통해서 현실화해서 그 무한성을 우리의 대상으로 만드는 그런 미의 현상인 위대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위대함은 창조나 파괴의 힘으로 자유의 무한성을 표현하며, 조용한 자기확신성을 가지고 창조나 파괴의 위대함으로 자신을 지속시키는 그 힘은 결국 위엄이다. 자유는 자신을 이런 위대함으로 승화시켜 자기한계를 넘어선다. 자유는 이런 힘으로 실재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강한 자신의 본질을 전개시켜나간다. 자유는 그런 위엄에서 위대하고 강하게 나타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천박함은 숭고함의 부정으로서 첫째로 실존을 실존에 포함된 한계 밑으로 내려뜨리는 그런 형태, 즉 하찮음이다. 그것은 둘째로 실존의 본질에 상응하여 그 실존에 내재하는 정도의 힘보다 더 못 미치는 힘을 실존에 부여하는 그런 형태, 즉 연약함이다. 그것은 셋째로 제한성과 무기력과 부자유로의 자유의 종속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그런 형태, 즉 비천함이다. 그러므로 서로 상호적인 개념인 숭고함과 천박함으로부터 위대함과 하찮음이, 강함과 연약함이, 위엄과 비천함이 성립한다. 이것들은 구체적으로 자신의 섬세한 음영 (陰影)에 따라 수많은 다른 이름들로 지칭되는 그런 대립들이다.



(1) 하찮음 (Das Kleinliche)

커다란 자체가 숭고한 것은 아니다. 2천만 탈러 7)는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마도 진정 기분 좋은 일인 그런 커다란 재산이다. 그러나 어떤 숭고함이 그 안에 분명히 있지는 않다. 작음 자체 역시 아직은 천박하지 않다. 단지 10탈러뿐인 재산은 아주 작지만 그것은 항상 어떤 경멸의 요소가 없는 재산이다. 버찌씨에 아주 작게 쓰여진 "우리주(主)"는 그렇기 때문에 추하지 않다. 작음은 알맞은 장소와 알맞은 시간에 커다람만큼이나 필연적인 것일 수 있다. 너무 작음 역시 너무 커다람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경우에 있어서 합리화될 수 있다. 그러나 하찮음은 있어서는 안 될 작음이라는 개념인데, 상술하자면 실존을 필연적 한계 밑으로 하락시키는 그런 작음이다. 숭고한 위대함은 자신의 무한성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삶과 의지의 한계, 교육 정도와 신분 차이의 한계를 지양한다. 그런 숭고함은 그 속에서 자유를 현실화시킨다. 반면에 하찮음은 그 한계를 그것에 내재하는 필연성보다 더 심한 정도로 고착시킨다. 하찮음은 자신을 절대화시킴으로써 위대함의 역전이 된다. 실러는 정신에 말을 걸지 않고 감각적 이해관계만을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천박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말로 천박함의 특징이 되는 요소인 부자유를 암시하려고 했다. 하찮음은 실존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아직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은 곳에서 그렇게 제한하는 까닭에 천박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삶에서 비본질적인 것에 고루할 정도로 매달림으로써 본질적인 것의 실현을 방해하는 사람을 하찮은 존재라고 부른다. 그런 사람은 비본질적인 것에서 부자유하고 자신을 그 너머로 승화시킬 수 없다.


자연의 개별적 형상에서 자연의 하찮음은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치에서 자연의 하찮음이라는 개념은 지나치게 빈번히 적용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부자유의 낙인이 찍힌 지역들이 있는 것이다. 그곳의 암석들은 무게감이나 높이를 통해 우리의 경탄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곳의 폭포는 너무 조용한 나머지 물레방아를 돌리는 데도 힘이 부칠 정도이다. 그곳의 나무와 숲은 작고 듬성듬성하게 심어져 있다. 그곳의 계곡들은 본디 단지 자그마한 동산 사이에 있는 팬 구멍 형태에 불과하다. 그곳에 강 하나가 흐르고 있고 섬까지 있지만 이 섬은 단지 작고 녹지가 별로 없는 모래밭일 뿐이다. 이 모두는 얼마나 하찮은가!

예술에서 하찮음은 대상 안에 있거나 혹은 대상을 다루는 방식에 놓여 있다. 내용이 전혀 없음으로써 대상을 표현할 가치가 없을 때 하찮음은 대상 안에 있는 것이고, 대상을 다루는 방법이 부차적 규정들을 광범위하게 관철시키는 데 몰두하여 그로 인해 본질적인 것의 강조를 망각하거나 심지어는 자체로 위대한 것을 그 개념에 반하여 하찮게 처리할 때 하찮음은 대상을 다루는 방식에 있는 것이다. 예술의 대상이 하찮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이 말이 이를테면 많은 상황에서 발생하듯이 단순한 것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풍경화와 문학의 전원시는 예술이 어떻게 가난한 자들의 오두막에서도 미를 발견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조르주 상드(George Sand)는 비교적 최근의 단편소설 <쟌느> Jeanne), <악마의 erinble늪》 (La mare au diable), Sand)는 비교적 <꼬마소녀 파데트> (Petite Fadette)에서 베리 지방의 의 농부들을 묘사했다. 극도로 단순한 단순한 인물성격과 상황, 현실에 대한 극도로 충실한 모방적 묘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인간 심성의 풍요로움 전체를 아주 놀랄 정도로 심오하게 묘사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았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와 같은 단편소설의 결말부에서 자신도 모르게 실제로 그저 소박한 농부들에 대해서만 읽은 것은 아닌지, 부분적으로 심지어는 이들의 단순한 언어로 쓴 것을 읽은 것은 아닌지 자문하기에 이른다. 겉보기에 천박한 소재는 이렇듯 다루는 방식에 의해서 고귀하게 된다. 쟌느 같은 양치기 여자, 마리 같은 여자 농군,파데트 같은 거위치기 소녀는 마을 상황을 억지스럽게 꾸미지 않고도 그녀들 영혼의 순수성과 드높은 정신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진실로 위대해 보인다. 그러나 자체가 아무래도 상관없는 소재를 작가가 축소형으로 만들어 표현대상으로 삼으면 그것은 하찮아지고, 그리고 그것이 계속되면 심지어 역겹기까지 하다. 1836년에 발간된 뤼케르트의 시집, 2권 145쪽, 38번의 시에서 우리는 예컨대 다음의 시구를 발견한다:


어제 나는 사랑하는 이의 집에 밤에 방문했다가 오는 길에

(이 사랑의 기념품은 얼마나 갉아대는 종류인지!)

아, 조그만 벼룩을 함께 집으로 데려왔네, 그것은 이제

처녀에게 있던 시절을 아쉬워하면서

폴짝폴짝 뛰며, 몸속으로 파고들며 나를 괴롭히네, 하루 종일 내내.

저녁 무렵 소파에 누워,

그곳에 가려고, 조그만 벼룩을 그곳에 데려가려고

생각했던 시간에,

바깥에서 빗방울이 튀는 소리를 듣네,

그리고 이제 나는 오늘은 외출할 수 없다고 말하네!

그 작은 벌레는 몸속에서 아주 무시무시하게 미쳐 날뛰네.


이런 것들은 그저 하찮을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이의 조그만 벼룩을 노래하는 남자애인, 비로 인해서 사랑하는 이에게 가지 못하는 남자애인, 정말이지 소파에 편안하게 누워 이제 친애하는 조그만 벼룩의 횡단여행과 종단여행을 관찰하는 흥분상태의 남자애인은 너무 산문적이다. 그러나 하찮음은 대상을 다루는 방식에도 있을 수 있다. 예술이 너무 부차적인 것에 빠져서 그로 인해 본질적인 것에서 멀어질 때 그런 실수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예술은 그 상황에서 주된 것이 아니라 자체가 하위적인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게 된다. 예컨대 서사시가 장소와 의상과 무장 같은 것도 그려주긴 하지만 비교적 최근의 소설처럼 식물을 학문적으로 정확하게 심지어는 라틴어 이름까지 덧붙이면서 묘사할 경우 그것은 문학의 목적을 넘어서는 것이다. 서사시가 의복을 의상잡지처럼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가구와 가재도구를 기술적으로 시시콜콜히 묘사하면 그런 자세함은 하찮음이 되고, 그래서 추해진다. 프랑스인의 발자크나 단편소설 《자연에 따라》 (Nach der Natur)초판본을 쓴 우리 막스 발다우(Max Waldau) 같은 훌륭한 작가들조차 종종 이런 하찮음이란 병을 앓고 있다. 문학이 감정을 너무 광범위하게 분석해서 객관적 정당성 없이 극도로 섬세하게 구분해서 실제의 심리상태를 밝히는 것으로 발전할 때 문학은 마찬가지로 정신의 내면에서 하찮아질 수 있다. 대상을 이렇게 다루는 방식은 아주 세밀한 분해로 인해서 기본성향이 위대한 감정조차도 떠내려가게 만든다. 이것은 리처드슨(Richardson)이 《클라리스와 파멜라》 (Clarisse und Pamela)에서 범한 실수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는 파문당하지 않고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 루소가 그의 《신 엘루와즈》 (Neue Heloise) 에서 범한 실수였다. 그러나 대상을 다루는 방식의 하찮음은 자체가 커다란 주제를 처음부터 너무 하찮게 처리해서 모든 상황에서 원래 개념에 반해 난쟁이처럼 왜소해지는 데서도 생겨날 수 있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작은 것은 알맞은 장소와 알맞은 시간에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커다란 내용이 완성의 개별적 측면에서 축소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너무 작게 시작된다고 생각해볼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추한 현상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런 커다란 내용을 표현하는 형태의 작음은 그 본질의 커다람과 모순이 된다. 예컨대 교회를 건축할 때 그 건축은 이 건물이 바쳐진 커다란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어야 한다. 그 건축은 신앙공동체의 통일성을 표현해야 하고, 따라서 이 건축이 개인적 삶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곧바로 벽과 문과 창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그 대신에 마구간, 정자, 저장창고가 될 수 있는 특성 없는 건물을 보게 되면 그것은 신전의 개념에 있는 숭고함과 비교할 때 하찮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천박하다. 교회는 당연히 작을 수도 있다. 기도실은 정말이지 작은 교회다. 그러나 양식은 고상해야 하며 그 규정의 커다람을 총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공장이나 기차역, 기타의 건물도 될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우리 시대는 폴카 교회라고 부른다.

하찮음이 커다람, 위대함의 패러디로, 특히 잘못된 커다람, 위대함의 패러디로 코믹하게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찮음은 자체의 과장을 통해서 스스로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구츠코는 《블라제도우》 (Blasedow)에서 이런 방식으로 노인을 훌륭하게 묘사했다. 그에게 부족한 10 탈러에 대한 생각이 그의 의식 전부를 이루고 모든 것이 그에게 10 탈러를 상기시키며 마침내 10 탈러가 자신의 환상에 의해서 어떻게 괴물처럼 부풀어오르는지를 묘사함으로써 말이다. 뤼케르트의 시에 나오는 조그만 벼룩은 우리에게 하찮은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작은 벌레가 서사적으로 서술된 시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은 다음같이 시작하는 저 마카로니풍의 벼룩 찬가》(Floia) 처럼 우리를 웃게 만든다:


나는 이 작은 벌레들을 노래하고 싶네

이것들은 잘 뛸 수 있고...


대상을 다루는 방식에서 디킨즈 보즈 같은 같은 유머작가는 아무 거리낌없이 아주 개별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을 강조할 수 있다. 예컨대 <코퍼필드》 (Copperfield)에서 거창한 의전(儀典)에 대한 아주 장황한 한 묘사처럼, 즉 어떤 카이카버 펀치가 준비됐는지 혹은 키가 작은 부인이 가계부를 적는 데 기울이는 노력이 어떤지에 관해서 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다지 장황해 보이지 않는다.

자체가 커다랗고 위대한 대상은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작게 다룰 수 있다. 그러면 커다랗고 위대한 대상은 블루마우어 (Blumauer)의 에네이데 (Aeneide)에서 피우스 에네아스(Pius Aeneas)처럼 트라베스티10)가 되거나 아니면 볼테르의 《오를레앙의 처녀》 (Pucelle D'Orleans) 11)에서 영웅적인 잔 다르크의 열광이 순전히 하찮고 진정 치욕스러운 동기로 환원되듯이 악의적으로 조롱된다.


(2) 연약함 (Das Schwächliche)

연약함이 보통 하찮게 되듯이 하찮음도 연약함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찮음은 지양해야 할 한계에 실존을 예속시킨다. 연약함은 실존이 지닌 힘을, 본질에 따라 자기 안에 내재해야 하는 정도보다 못 미치게 만든다. 역동적 숭고함으로서의 숭고함은 창조와 파괴에서 자신의 무한성을 드러낸다. 그 무한성은 힘, 폭력으로 나타나고 또 무시무시하고 추악할 수 있다. 반면에 연약함은 창조의 무기력에서 인내와 고통의 수동성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드러낸다.

약함 자체는 작음 자체가 추하지 않듯이 아직 추한 것이 아니다. 약함이 추하게 되는 경우는 힘이 기대될 때 약함이 나타나는 경우이다. 모든 진실한 미의 영혼인 자유는 자기의 힘을 창조와 파괴 혹은 힘에 대한 대항에서 공표한다. 약함은 자신의 무기력을 자기 행위의 무생산성으로, 폭력에 대한 복종으로, 절대적인 수동적 규정으로 보여준다. 연약한 상상, 연약한 유머, 연약한 색, 연약한 소리, 힘 빠진 어법은 부드러운 상상, 섬세한 유머, 안정된 색, 부드러운 소리, 간결한 어법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역동적 숭고함은 자신의 힘을, 자기 행위를 스스로 시작하는 절대적 힘으로 드러낸다. 자기결정은 실재성에 있어서는 가상일 수 있지만 미적으로는 자신을 자기결정으로서 표현해야 한다. 기중기가 어떻게 배에서 커다란 짐을 들어올리는지 볼 때 우리는 그곳에서 어떤 숭고함도 발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계의 모습은 모든 그 어떤 자유로운 운동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화산이 용암과 돌과 화산재를 내부에서 위로 던져버릴 때 이것은 숭고한 드라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서는 자유로운 근원적 진행과정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 내부에서 가스의 탄력적 압력은 기계적으로도 작용하지만 자발적 힘으로 가지고 그렇게 하는것이다. 이제 기계가 숭고함의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연약함의 인상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식으로 결론 내리는 것은 아주 서투른 짓이다. 이는 맞지 않다. 기계는 가장 커다란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오직 다른 힘, 즉 인간의 지성과 의지에 예속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따라서 숭고함의 개념이 요구하는 바대로 행위의 시작을 자기자신에서 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숭고하게 나타나지 못한다. 반면에 엄청난 자연의 힘을 지배해서 그 힘의 필연성을 그런 정도로 자신의 자유 안에 예속시킬 수 있는 정신은 우리에게 숭고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신은 기계에 독자성의 가상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럴 때 이것이 숭고함과 유사한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의 여부는 보다 자세한 상황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기계적인 것의 정확성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은, 철로의 커다란 기차가 우리 옆을 쏜살같이 스쳐 지날 때 우리가 느끼듯이, 미적 작용을 부분적으로 다시 지양하기 때문이다. -유기적 생명체는 자신의 힘을 압도적 힘으로 현실화할 때 숭고하게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동물도 직접적으로는 숭고하다고 부를 수 없다. 그러나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이제 숲과 산 위로 구름 위로 안정된 날갯짓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볼 때, 육중한 코끼리가 석주 같은 발로 호랑이를 짓밟는 것을 볼 때, 사자가 안정되게 엄청난 도약을 해서 영양을 덮치는 것을 볼 때 이 동물들은 우리에게 숭고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이 동물들은 자신들에 내재해 있는 힘을 겉으로 드러내어 무한한 압도적 힘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독수리에게는 비상(飛上)의 한계가, 코끼리와 사자에게는 다른 동물의 저항에 의한 한계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이 자연의 필연성이나 다른 정신들의 자유에 대립해서 자신의 자유를 자신의 독자적 필연성으로 견지하고 있을 때 숭고하게 작용하며 폭력에 예속되어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은 자신의 가장 무시무시한 공포로도 자유의 절대적 힘에 미치지 못한다. 인간은 자연에 의해서 압도될 수 있지만 파멸 속에서 자신의 품위를 보존할 경우 자연에 패배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에 반해서 자기 안에서 자유를 보전한다. 붕괴하는 우주의 잔해에 매장돼도 공포를 느끼지 않을 스토아 학파의 현자가 지닌 숭고성은 이 점에 놓여 있다. 자유를 추상적 무감정의 상태로 표상할 필요는 없다. 생명의 한계, 고통의 가혹함을 느끼면서도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 운명의 희생자는 자신이 자유를 통해 극복해야 할 그 필연성의 폭력이 가혹한 것일수록, 그리고 이 대립이 깊숙이 작용하면 작용할수록 보다 더 숭고하게 된다. 밝은 대낮에 완전무장을 하고 동료시민들에게 둘러싸여 땅의 갈라진 틈으로 뛰어내렸던 쿠르티우스12) 같은 사람은 생명의 모든 가치를 가장 내적으로 느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연을 물리치기 위해서 자유의 용기를 지니고 칠흑의 심연으로 뛰어내렸다. 신념의 숭고성은 또한 자유와 자유의 갈등에서 주로 불가피한 마음의 고통 너머로 자신을 승화시킴으로써 나타난다. 이때 우리는 조그만 동물, 여성, 병자, 어린아이, 무경험자, 미숙한 사람의 상대적 약함에서 어떤 추도 발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약함은 자연적 약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움이 중단되고 실존이 힘을 요구하는데 그 힘이 충분치 못하면 약함은 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에 추한 연약함으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여기서 분명히 관찰되는 경계선이 드러난다. 숭고함이 절대적 힘을 가지고 등장하면, 자체가 힘인 그외의 모든 것들은 이 절대적 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때 그와 같은 약함은 아직은 부정적 의미의 연약함이 아니다. 예컨대 생명의 모든 힘과 자유의 모든 에너지들은 그것들이 제아무리 크더라도 근원적 자연의 우위에 무력하다. 지진이 일어나는 대지, 밀려드는 홍수, 퍼져가는 불길이 그런 가차없는 힘들이다. 진동하며 입을 벌리고 짐승과 인간 도시들을 집어삼키는 대지는 숭고하지만, 대지 자신의 품에서 태어나고 그 등에 업힌채 존재하고 있음에 기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가차없음에서 추악하게 숭고하다. 두려움에 빠져 도망치고 미칠 듯한 절망감 속에서 그 어떤 구원의 그림자라도 찾는 생명체는 그런 대지에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 관계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을 연약함으로 비난할 수 없다. 바다의 파도가 아주 커다란 배들을 가지고 놀아 돛대를 파괴하고 배들을 바위로 내던질 때 그 파도들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숭고하며 헛되이 목숨을 구하고자 파도와 싸우는 인간들은 무력하다. 그들이 이루 측량할 길 없는 절망에 몸을 내맡기는 한에서만 그들은 연약하다. 대홍수 같은 물의 범람은 개인의 노력이 아무 쓸모없음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물의 범람은 또 죽어가면서도 그 폭력에 우월함을 보여주는 그의 자유를 표현할 수 있다.


지로데(Girodet) 는 루브르에 있는 그의 유명한 그림에서 대홍수의 한 장면을 그렇게 그렸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한 가족이 죽어가면서도 여전히 신앙심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자는 머리가 희고 이미 가사상태에 빠진 아버지를 어깨에 걸치고 있다. 그는 왼손으로는 말라비틀어지고 부러지기 시작한 나무 그루터기를 끼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아내를 파도에서 끌어내려 한다. 그러나 아내는 어머니로서 아이들을 내버려두려 하지 않는다. 한 아이, 젖먹이는 어머니의 가슴을 끌어안고 있고 다른 아이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다. 어머니는 발로 바위 가장자리를 디디고 있다. 그러나 짐이 너무 무거워서 나무는 완전히 부러질 것이다. 그래서 모두 함께 죽을 것이다. 죽음속에서도 가족은 한 가족으로 있게 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동물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고려 없이 자기보존 본능만을 따를 수 있을 뿐이다. 비교적 최근의 독일 화가가 우리에게 예컨대 산불을 그려주었듯이 말이다. 불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복수심을 가지고 관목숲과 나무를 먹어치우고 동물을 보금자리에서 쫓아낸다. 동물은 촘촘하게 무리지어 털이 올올이 선 채 공포에 질린 눈을 하고 보금자리에서 뛰쳐나오고, 곰과 황소와 표범과 노루와 늑대와 양이 서로 옆에서 뒤엉킨 실타래처럼 커다란 무리를 지어 모두의 위험에 의해 강요된 평화를 숨쉼으로써 예전의 자연을 망각한 듯 보인다. 지옥의 요소인 분노는 이렇게 도망치는 짐승들의 공포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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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데 작, <대홍수>


서로 싸우는 동물은 덩치가 클 때에만 숭고할 수 있다. 조그만 동물은 강하고 용감할 수 있지만 그 힘은 스스로를 생산하고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무한성의 가상을 획득할 수 없다. 닭싸움은 결코 숭고하지 않다. 조그맣고 약한 짐승과 더 크고 강한 짐승의 싸움도 마찬가지로 숭고하지 않다. 고양이의 발밑에 있는 쥐와 독수리의 발톱에 잡혀 있는 토끼, 담비의 이빨에 끼여 있는 비둘기는 자신들의 분명한 죽음을 기다리며 몸을 떤다. 이 짐승들을 추하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싸움이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의 힘에 대립해서 자신의 자유를 보존해야 하고, 자연의 힘에 자신의 의식과 의지의 힘을 대립시켜야 한다. 인간이 자연의 힘 앞에서 두려워함으로써 그 힘에 복속될 때 그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 약함이 이미 추로서 명명될 수 있는지는 보다 자세한 상황에 달려 있는데, 즉 그의 두려움의 정도와 그 두려움의 정도를 표현하는 형태에 달려 있다. 몽둥이로 맹수를 공격하고 구멍 팬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불친절한 파도의 직경을 재는 용기를 가진 인간은 그 정반대되는 상황이 우리를 낙담시키는 정도만큼 우리를 승화시킨다. 그러나 근원적 자연의 적대적 힘에 대항하는 모든 싸움은 그것이 가장 영웅적인 것이라 해도 헛된 짓이다. 이때에는 자신을 보존하는 자유를 위해서 표면적 항복을 통해서 굽히지 않는 불후의 용기를 내적으로 간직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렇지만 가장 심한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은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와 칼데론의 의지 견정한 왕자》(Standhafter Prinz)의 그것처럼 숭고하다. 스스로 굴복하는 약함은 그것이 우스꽝스럽게 되지 않는 한 추하다. 이 점은 이렇듯 보편적 관점에서 보면 사실이다. 그러나 개별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무한히 다양한 상황들을 만들어내는데, 그 안에서 강제는 종종 신성한 의무로의 소명이라는 가장 달콤하고 유혹적인 형태를 띤다. 여기 정신적충돌의 영역에서는 약함이 인격적인 사랑스러움을 통해서 자유의 가상을 획득하고 궤변을 통해서 힘의 형태조차 찬탈할 수 있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이는 수많은 장편소설의 잘 알려진 주제이다. 예술가는 그런 감상적 주인공들의 사랑스러움에서 추의 현상을 완화시키는, 즉 추를 흥미롭게 만드는 수단을 획득한다. 물론 경솔함, 동요, 일관성 없음, 주저함, 망각, 시기적절하지 않은 굴복, 성급한 행동이 그 자체로 정당하거나 사랑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스러움은 반드시 정신과 환상과 개인적 처신에 놓여 있어야 하고, 의지의 연약함은 기질의 속성과 곤란한 상황에 의해, 다른 방향으로 단호하게 행동함으로써 부당한 짓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 용서는 되지만 합리화되어서는 안 된다. 정신적 약함에 대한 미적 만족감은 어느 때라도 실제적 범죄가 되는 비천함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크세니엔> (Xenien) 15)이 말해주듯이 오직 상황에 달려 있다. 정신적 약함에 대한 미적 만족감은 자기 앞에서 자신을 우아한 존재로 내세우는 궤변이 되며 그런 궤변 짓거리에서 가장 추악한 것이 나타나게 한다. 정신적 약함에 대한 미적 만족감은 안락함, 나태함, 용기 부족, 허영심에서 사안에 따라 천박함으로 타락하며, 아마도 그 자신은 혐오할지 모르지만 다른 이기적 관점에서 인정하는 타자의 의지에 종속되는 것을 참고 견딘다. 정신적 약함에 대한 미적 만족감은 이런 굴복을 정신적 사색과 허구적 병으로 감추며, 그리고 그 필연성을 개개인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운명으로 가정 (假) 함으로써 감춘다. 그러나 우리는 표현의 대상인 약함과 미적 작업의 실수인 연약함을 구분해야 한다. 약함을 표현하는 것은 허용되어야 한다. 괴테가 묘사한 베르테르, 바이스링엔, 브라켄부르크, 페르난도, 에두아르도의 약함과 야코비가 묘사한 볼데마의 약함, 장 파울이 묘사한 로크바이롤의 약함, 그리고 조르주 상드가 흡사 사진으로 찍어낸 듯한 앙드레와 스테니오의 약함 역시 표현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표현 자체가 연약해질 경우, 즉 힘이 기대되는 곳에서 힘없고 약하며 힘 빠진 형태가 나타날 경우 그것은 다른 것이다. 이것은 결정적 실수로, 우리가 앞에서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으로 설명한 미적 조형의 해체라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이 미적 조형의 해체는 개별적 예술에 의해서 그 구성요소의 고유성에 따라 특화된다.

부정적 의미의 연약함과 강함은 서로 대립하기 때문에 그것은 예술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의 전이를 표현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이를 심리적 진실성과 연계시키는 것은 보통 위대한 예술가만이 진실로 성공을 거두는 아주 어려운 과업이다. 연극을 통해 약함을 예찬한 이플란트와 코체부는 우리에게 거짓된 전이를 많이 제공했다. 바이런은 기이하게도 괴테에게 약함을 대상으로 한두 개의 희곡을 헌정했는데, 《사르다나팔》 (Sardanapal)과 《이르너》 (Irner)였다. 《사르다나팔》에서 자체로 고귀하나 너무 부드럽고, 인간적이나 너무 심사숙고하는 본성이 몸을 일으켜서 삶의 향락에 아무 근심 없이 몰두하다가 점차 진실한 제왕의 품위와 영웅적 용기와 용감함으로, 자기희생이라는 숭고함으로 발전해간다. 이 작품은 영혼의 그림이며 비할 수 없이 심오하고 아름답기에 왜 이런 것이 무대에 상연이 안 되는지는 완전히 수수께끼 같다. 반면에 《이르너》에서 작가는 자체가 마찬가지로 고귀한 본성이 어떻게 약함으로 인해서 천박함으로까지 휩쓸려가고, 남은 여생 동안 자신의 실수에 대한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인해 질식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르너는 심한 곤경에 빠져서 잠재적인 불구대천의 원수에게서 100카트를 훔친다. 그는 자신과 아내와 아들 앞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를 죽일 수 있는데도 돈만 훔쳤을 뿐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실러는 이미 살인이 더 큰 힘을 요구하기 때문에 절도보다 미적으로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르너가 슈트랄렌하임을 죽였더라면 그의 행동은 죄가 더 컸을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박함은 덜 했을 것이다. 그의 약함은 그로 하여금 단지 도둑질하게 만들었을 뿐이고 그 돈이 원래는 자기 소유리는 궤변은 양심 앞에서 버티지 못한다. 그의 아들 울브리히가 아버지가 모르는 사이에 살인을 완수한다. 이르너가 이 경악스러운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자신이 아들에게 가르쳐주었던 약함의 원칙을 변론으로 듣게 된다.


누가 제게 말해주었던가요, 상황이 수많은 범죄를 용서해주고, 열정이 우리들의 천성이며 하늘의 재화는 행운의 재화의 뒤를 따른다는 점을요? 누가 제게 인간성은 오직 신경의 굵기에 좌우된다고 알려주었나요? 제 자신을 호래자식으로 낙인찍을지 모르고 그 자신은 죄인이란 소인을 찍을 그 자신이 저지른 치욕으로, 제 자신을 방어하고 공개적으로 싸우는 제 모습을 보여줄 힘을 제게서 모두 빼앗아간 사람은 누군가요? 그가, 특히 마음은 따뜻하지만 약한 그가 스스로 하려 했지만 감히 하지 못한 행동을 하도록 자극했습니다. 당신이 생각했던 것을 제가 완수한 것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약함과 연약함이 아무 생각 없이, 아니 진실로 선하다는 광증에 빠져서 어떻게 악으로 전이하는지를 조르주 상드는 《파데트》에서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실벵은 파데트에게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감상적이며 주변사람에게는 얼마나 독재적이고 궤변적이며 이기적인지 알려준다. “약함은 그릇됨을 낳으니 이기적으로 배은망덕하게 처신하시오."실벵은 마침내 자기 자신을 깨닫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응석꾸러기같은 이 남자는 이제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어 나폴레옹 전쟁의 전투소음 속에서 파데트를 향한 사랑을 잊고자 노력한다.


연약함은 분명히 힘과 연계되어 있을 경우에 가장 추하게 나타난다. 힘은 연약함으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힘은 더 약화된다. 이것은 자연의 경우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자연에는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거대한 코끼리가 조그만 쥐 근처에서 두려움으로 인해 땀을 흘릴 때 그것은 코끼리의 연약함이 아니라 완전히 정상적인 본능이다. 왜냐하면 쥐가 코끼리의 코로 들어갈 경우 코를 갉아댐으로써 코끼리를 미쳐 날뛰도록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후나 영웅이나 고위 성직자가 자신의 기분과 약함에 좌우되면 그는 자신의 본질과 아주 강한 대조를 이루는 천박함으로 떨어진다. 예컨대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거리낌없이 즐길 수 있기 위해 그를 배신하여 없앤 점은 특히 왕의 성향에서 연유하는 것인데, 이것은 약함이며 그는 이로 인해 천박함과 범죄로까지 몰락한다. 마이스너의 《우리아의 아내> (Weib des Urias)가 실패한 연극이라면 그 책임의 반은 소재의 선택에 있다.


연약함이 자신을 오인하여 강함처럼 처신하면 그것은 코믹으로 전도된다. 그러나 이 모순은 약함의 내용이 덕성의 요구를 너무 심하게 어기지 않을 경우에만 우스꽝스럽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적합한 것은, 본성이나 주변상황에 보다 더 예속된 무해한 종류의 연약함인지적 연약함인데, 우리는 이를 무엇보다 소극에서 보고 있다. 약함의 전개가 허구적 운명과 연계되고 그럼으로써 그 전개가 필연성의 가상으로 둘러싸이면 그로 인해서 코믹한 효과는 더 강화된다. 이런 코믹의 훌륭한 걸작은 영원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끄와 그의 주인》(Jacques le fataliste et son maitre) 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인이 하인없이 살 수 없다는 점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약함이다. 주인이 무엇보다도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는 점은 다른 사람들에게그들이 지닌 만담능력을 전개할 계기를 부여하는 약함이다. 주인이 공공연히 자신을 통제하는 하인에게 그의 운명론의 잘못된 점을 설득하려는 점은 사랑스러운 약함이다. 디드로는 비할 수 없는 유머로 자끄의 운명론을 작품 속에 끌어들인다. 모든 일은 '이미 위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커다란 종이 꾸러미에 적힌 대로 일어난다. 그러나 디드로가 하인과 여주인의 수다, 하인의 운명론, 주인의 비판에 인간 실존의 가장 심오한 문제를 연결시킬 수 없었더라면 디드로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나라에서 어느 정도 상투적인 묘사에 따라 자끄가 단지 오만방자한성향을 지녔다16)고 생각한다면 아주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의 근본텍스트는 오히려 운명의 이념이며 디드로 자신이 이것을 운명적이라는 수식어로 암시하려고 했다.


(3) 비천함 (Das Niedrige)

숭고함은 자신의 무한계성에서 위대하며 자신의 힘을 무저항적으로 드러내는 데 있어 위압적이고 자신의 무한성에 대한 무조건적 자기결정에 있어서는 위엄 있다. 위엄은 절대적 위대함과 절대적 힘을 하나로 합친다. 숭고한 위대함의 반대는 하찮음이며 하찮음은 자기본질에 필연적인 한계에 예속된다. 숭고한 강력함의 반대는 연약함이며 연약함은 자신에게 가능한 정도의 힘에 못 미친다. 위엄의 반대는 비천함이며 비천함은 자기결정에 있어서 우연적이고 제한적이며 하찮고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좌우된다. 비천하다는 것은 물론 상대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 표현이 비교법으로 사용되지 않고 그 자체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 사소한 것, 천박한 것 전반을 나타낸다. 독일어에는 관용적 용법이 생겨나서 '비천한'과 '낮은'을 구분하였는데, 첫 번째는 천박함으로, 두 번째는 단순한 것, 소박한 것, 밑의 것으로 이해되었다. 비천한 사고방식, 비천한 조처, 비천한 행동 등이 있는 반면 낮은 천장, 높이가 낮은 오두막, 낮은 신분 등이 있다. 예전에는 전반적으로 비천하다고 했었다. 위엄 있는 것은 그 조용한 위대함에 있어서 유일무이하고, 행동에서는 외부에 의해서, 우연에 의해서 좌우될 수 없는 것으로 절대적으로 안정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특별한 현존으로서 현상계에 속해 있는 한, 외부의 공격에 희생되는 측면을 가질 수 있다. 즉, 그것은 괴로워할 수 있고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적으로는 자신과의 동일성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나갈 수 있고, 자기실존의 헛된 부분들이 사라질 때에는 자신의 무한성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로부터 위엄이 왜 바로 고통 속에서 자신의 위대함과 힘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낼 수 있는지에 대한 피상적 모순이 설명된다. 반면에 비천함은 ① 곧바로 일상적인 것, 일반적인 것, 범속한 것이 되며, ② 상대적으로는 변화하는 것, 불안정한 것, 우연적인 것, 자의적인 것이 되고, ③ 자유를 이질적 필연성에 굴복시키는 혹은 심지어는 그런 굴복을 야기하는 조야함이 된다. 이 모든 개념들은, 우리가 마찬가지로 위엄 있는 것을 정도의 차별성에 따라 우아한, 고귀한, 고상한, 존귀한, 존엄한 등으로 부르듯이 또한 수많은 다른 동의어로 지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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