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최초 올림픽 참여였던 1948년 런던올림픽
모두를 단합하게 하고, 그 어떤 익스트림 무비보다 숨죽여 보게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스포츠 경기입니다. 2020년 예정되어있었던 도쿄 올림픽이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심각한 상황이기에 출전에 관해선 여러 문제들이 많지만, 4년간 준비해 온 선수들과 올림픽을 즐기고픈 사람들의 마음이 사라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과거에도 존재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최초 올림픽 참여였던 1948년 런던올림픽을 아시나요? 메달을 따지 못해도 다같이 기도하고 박수치며, 한 마음으로 응원하였습니다. 최초의 금메달,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 등 결과 지향적인 부분들이 아닌 ‘대한민국’ 이라는 이름으로 올림픽에 참여하기 위한 수많은 땀방울들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국적이 아닌 독립된 국가로 올림픽에 참여하기를 갈망하던 전 국민적 바람들은 비로소 광복 이후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체육은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철저히 짓눌려 졌기 때문이었는데요.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체육협회와 그 산하단체를 조직하여 조선의 체육계를 장악하고 체육활동을 탄압했습니다. 일본인 중심의 조선체육협회에 맞섰던 조선체육회는 일본인에 대한 신체활동의 우위를 보여주고 나아가 독립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조선체육회는 조선교육회, 조선어학회, 물산장려회와 같이 우리 민족을 위해 우리 주권을 행사하던 민족의 기관으로서 체육운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1946년 4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가 재건된 조선체육회가 중심이 되어 1948년 개최예정이었던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조선체육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제14회 런던올림픽 참가를 위해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광복된 한국의 올림픽 참가는 독립된 민족으로서 국제무대에 나설 수 있는 중요한 계기이자 국가설립의 과제를 앞두고 민족의 이목을 집중시켜 하나로 단결하게하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올림픽 참가 대책에 초점을 두고 활동하던 올림픽대책위원회가 올림픽위원회, 준비위원회로 새롭게 결성되었고 각종 대외관계, 참가준비, 선수훈련, 재정확립 등에 대한 사항으로 나누어 올림픽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올림픽 출전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올림픽후원회도 결성하였습니다. 1947년 12월 1일 올림픽 후원회에서 런던올림픽에 파견할 대표단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복권 형태로 '올림픽 후원권‘을 발매하기도 하였습니다. 앞면 우측에는 '百圓' 문구와 올림픽 오륜기, '올림픽 後援券'이 인쇄되어있고, 뒷면에는 후원권의 발행목적, 당첨금 출납 방법, 등수별 당첨금액 등에 관한 설명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면 좌측에는 한 남자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조선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던 전경무입니다. 한국의 올림픽 참가는 전경무가 미국으로 건너가 당시 한국의 올림픽참가 가능성을 타진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기대감이 싹트기 시작했는데요. 전경무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올림픽위원회의 회장이자 IOC 부위원장이던 에이버리 브런디지와 만나 한국의 올림픽 참가 가능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브런디지의 조력을 약속받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올림픽 참가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은 대한독립신문을 통해 전해집니다.
“작일 브런디지씨와 회담. 미국올림픽위원회는 조력을 확약(確約). 아직
도 각 방면으로 예비적 활동이 필요하나 조선의 런던대회 참가는 유력하
다고 확신한다”
「대한독립신문」, 1946. 12. 25. 인용
전경무는 올림픽을 위해 국제적으로 활동하며, 헌신과 노력을 해나갔습니다. 그런데 1947년 5월 29일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향하던 미 군용기가 추락하였고, 이 사고로 전경무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올림픽 참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게 된 전경무의 숭고한 정신에 당시 체육계를 비롯한 국내 사회에서는 그를 애도하는 물결이 이어졌습니다. 전경무의 장례는 체육장으로 치러졌으며, 그의 영전에 조선체육공훈장이 추서되었고, 올림픽 후원권에는 위와 같은 전경무의 유영이 삽입되었습니다.
전경무가 참석할 예정이었던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는 미국에 있던 이원순이 대신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원순은 총회를 닷새 앞둔 시점까지 항공편을 발권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비행기 표도 매진되었을뿐더러, 그에겐 여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항공권 발권 등에 소용되는 비용 일체를 스스로 부담하며 조국의 올림픽 참가라는 사명을 안고 스스로 모든 것을 부담하여 총회장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다행히 이원순은 취소표를 구하게 되었고, 여권발급이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스스로 여권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대안이 없을까 궁리하던 끝에 나는 개인 이름으로 여권을 만들기로 했다. 공문서 용지에 이름과 나이ㆍ본적ㆍ주소 등을 기입한 다음 “나는 한국인으로 KOC와 대한체육협회의 요청을 받아 IOC 총회에 참석할 예정이며 영국올림픽위원회(BOC)와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 문제를 협의하려고 한다”라고 썼다. 그래도 모자란 것 같아 나의 인상착의, 부모의 이름, 아내의 경력, 가족사항 까지 적어 넣었다. 그런 다음 공증인을 찾아가 공증을 받았다“
「매일경제」 1988.4.13. 재인용
이원순은 이렇게 만든 여권을 들고 영국 총영사관을 비롯한 덴마크,스웨덴 영사관에서 입국사증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개인이 직접만든 사제 여권은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기 힘듭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올림픽 참가를 위해 어떠한 마음으로 임하였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를 통해 1947년 6월 20일 KOC의 가입승인을 얻게 되어, 1947년 8월 11일 조선체육회 올림픽위원회에 1948년 런던올림픽대회 및 생모리츠 동계올림픽대회의 정식참가 초정장이 도착하였습니다. 비로소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올림픽 참가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IOC의 가입 인준을 얻게된 후, 대한민국은 1948년 1월 30일부터 2월 5일까지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동계올림픽에, 동년 7월 29일부터 8월 14일까지 개최된 제14회 런던하계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활발하고 다양한 국내ㆍ외 활동은 한국의 올림픽 참가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창기 대한민국의 올림픽 참가는 독립된 국가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948년 동ㆍ하계올림픽 최초 참가를 통해,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을 준비하고 출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현재는 올림픽에 참가했던 세대들이 각급 지도자로 활동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체육행정가로 활동하여 한국 체육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올림픽은 한국의 스포츠 발전에 많은 효과를 내고 올림픽 참가의 경험은 성공적인 올림픽 직접 개최로 이어지며, 국가 이미지 제고와 경제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성과주의로 인해 여태까지 메달에만 주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적 순의 메달이 아닌, 기회의 장을 열기위한 시도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성공은 가끔, 실패와 좌절은 매번 맛보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벽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올림픽으로 대한민국을 알리고, 자리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까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걸고 해내야 했던 일들, 어쩌면 가장 힘들고 무거운 발자국이었을 과정들에게 집중해보길 바랍니다.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8기 정민경
참고자료 |
- 대한체육회
- 대한독립신문
- 김영남. "한국의 올림픽경기대회 최초 참가의 체육사적 의미." 국내박사학위논문 忠南大學校 大學院, 2020. 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