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혜원(제중원)
조선최초 근대 의료기관의 탄생
동양의학에 기반을 두고 환자를 치료하던 조선의 의학체계는 1876년 문호 개방 이후 변화를 맞이한다.
박영선과 지석영 등의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의술을 배워 오며 서양의학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건너온 미국인 알렌은 특히 조선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인 광혜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뀐 이 근대 의료기관은 이후 우리나라 의학계의 방향을 뒤흔들며 역사에 기록됐다.
1885년 2월 조선 정부의 병원설치안 동의
서양문물이 유입될 뿐 아니라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는 주변 나라들의 공세가 득실거렸던 19세기 말 조선은 혼란 그 자체였다. 조선 내에서도 사회정치세력이 여러 파로 나뉘어 극심히 갈등 중이었다. 당시 민씨 일가는 청나라에 의지해 정권을 유지하면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한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조선 의학의 한계를 서양의학 수용으로 극복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갑신정변 이후 현실로 이루어진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의 영향으로 민영익이 부상을 입었을 때 당시 미 공사관 의사로 활동하던 알렌(安連, Horace N. Allen)이 그의 부상 회복을 도운 것이다. 이를 계기로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얻는다. 조선에 온 지 3개월밖에 안 된 상황이었던 알렌은 갑신정변 이래 적절한 치료시설이 없어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상황에 곤란을 겪었고, 이를 개선하고자 1885년 1월 병원건설안을 조선 정부에 제시한다. 병원을 건설하면 치료와 의학교육을 동시에 실시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구체적인 운영 원칙까지 담겨 있었다.
이 안이 접수된 것은 1월 27일이다. 서양의학의 필요성을 느끼던 당시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2월 16일 조선 정부는 병원 설치를 준비할 사람을 임명했는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팀은 한 논문에서 이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이하 외아문)의 독판 김윤식으로 추정했다. 김윤식은 2월 18일 미국 공사관을 방문해 병원설치안에 대한 조선 정부의 답신을 전달한다. 관계자들은 이때 조선 정부가 비로소 병원 설치에 최종동의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광혜원이 제중원이 되기까지
이후 병원 설립은 급속도로 이루어져 4월경 조선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인 광혜원(廣惠院)이 문을 열었다. 광혜(廣惠)는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 병원 명칭은 며칠 후 제중원(濟衆院)으로 바뀐다. 이는 조선정부가 대중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濟衆)’을 통해 좀 더 많은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기관이라는 뜻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국가 또는 지배층이 주체가 돼 대중을 구제한다는 봉건적인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근대화를 추구하면서도 아직 기존의 전통을 완전히 벗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중원은 알렌에 이어 헤론(惠論, John W. Heron)과 에비슨(魚丕信, Oliver R. Avison) 등 서양 의사들이 이어 맡으며 한반도에 근대 의학 기술을 이식했다. 이는 국내 의학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력은 의학교육 측면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 정부와 알렌은 병원 건설 초기부터 이미 의학교육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1886년 3월 29일 제중원에 부속된 의학교가 설립됐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이곳을 통해 서양의학을 배울 수 있었다. 입학시험을 치러 16명을 선발했고, 1908년에는 처음으로 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들에게 의술 개원 허가증을 내주었다. 이 일은 조선에서 서양의학의 새 기원을 열었다 평가받고 있다.
제중원은 병원 설립과 명칭의 기원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며 뿌리 논쟁은 현재까지도 지속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근대 의료기관의 건립과 운영, 의사 양성 등을 통해 한국 의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깊다. 제중원의 후예들은 그 뜻을 이어받아 코로나19를 비롯한 각종 질병 및 사고에 맞서 인류의 건강과 안녕을 지키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인용으로 보는 제중원
어젯밤,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략) 그는 죽어가는 빈사 상태의 사람을 응급 치료하러 자신의 집으로 급히 와달라는 묄렌도르프의 적바림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중략) 민영익은 조선보빙사의 전권대신으로서 (중략) 민영익은 오른쪽 귀 측두골 동맥에서 오른쪽 눈두덩까지 칼자국이 나 있었고 (중략) 만약 그가 몸을 피하지 아니했더라면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1884년 12월 5일」,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출판부, 2017.
병원은 어제 개원했는데, 이날 환자는 스무 명이고 세 명은 절단수술 환자이며 이들은 아직 수술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1885년 4월 10일」,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출판부, 2017.
질병이 있는 자는 누구나 내원하여 치료를 받으라. 약값은 국가에서 지급한다. (중략) 치료가 어려운 질병이 있는 자는 모두 내원하여 치료받아 국가에서 널리 구제하고자 하는 뜻에 부응하라.
1885년 4월 3일자 외아문의 게시문
참고자료 |
주진오, 「서양의학의 수용과 제중원-세브란스」, 『역사비평』 38권 40호, 역사비평사, 1997.
이경록·박윤재·여인석·박형우, 「광혜원의 개원과 제중원으로의 개칭과정」, 『연세의사학』 7권 4호, 연세대학교, 1998.
박형우·박윤재·여인석·김일순, 「제중원에서의 초기 의학교육(1885~1908)」, 『연세의사학』 8권 1호, 연세대학교, 1999.
안수강, 「알렌의 일기를 통해서 본 제중원 의료선교사역」,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00권 100호, 대한기독교서회, 2016.
H.N. 알렌,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출판부,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