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 특집기사로 함께 알아보자
제헌절,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의 헌법이 공포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와 함께 역사에 발자취를 남겨온 헌법은 우리나라의 모든 법 중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운영 규칙을 정하고,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헌법은 사실 국가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헌법을 개정하는 절차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국회 재적의원의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가 있어야만 개정안을 낼 수 있고, 발의된 개정안은 대통령이 20일 이상의 기간 동안 공고해야 합니다. 공고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국회에서 의결해야 하는데, 이 때 헌법개정안이 가결되기 위해서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국회에서 헌법개정안이 가결되면 30일 이내에 국민투표를 시행해야 합니다. 헌법의 주인인 국민들 중 국회의원 선거권을 가진 국민들의 과반수가 투표에 참여해야 하고, 투표자 중에서도 과반수의 찬성이 있어야 헌법 개정이 확정됩니다. 상상만으로도 매우 복잡하고, 막대한 인력과 예산이 투입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절차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헌법의 권력화를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헌법이 소수의 정치인 혹은 대통령의 권력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민투표 등 복잡한 절차를 거치도록 한 것이죠. 그렇다면 헌법은 웬만해서는 개정되면 안 되는 불가침의 영역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낡은 법은 낡은 생각을 만들고 낡은 생각은 우리 사회의 진보를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헌법은 1988년 2월부터 적용된 9차 개정 헌법으로, 33년 전의 시간에 멈춰 있습니다. 1988년과 2021년, 강산이 3번이나 바뀌는 시간동안 우리 시대의 흐름과 요구는 정말 변함이 없었을까요? 1988년에 멈춰있는 우리 헌법이 정말 2021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근간이 된다고 볼 수 있을지 조금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제헌절 73주년을 맞아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개헌 요구를 살펴보고, 정말 새로운 헌법이 필요한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개헌은 최후의 대안이다?!
매번 대선을 앞둔 시기면 찾아오는 고정손님이 있습니다. 바로 ‘개헌’과 관련된 화두인데요.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 최근 대선주자들 사이에서도 ‘개헌론’이 이슈입니다. 야권의 인사들은 내각제로의 권력구조 개편을 중점으로 개헌론을 펴고 있고, 여권의 대선후보도 지방분권 강화 및 국가균형발전 추진, 토지공개념 도입 등을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일각에서는 개헌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권력 구조가 바뀔 수 있는 개헌을 너무 성급하게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건데요. 차기 대통령의 임기 중에 개헌할 것인지, 차기 대통령의 임기가 마무리 된 뒤에 개정 헌법의 효력을 인정할 것인지 논란이 뜨겁습니다. 국회의원 유권자의 과반수가 투표를 해야 하는 국민투표 또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유권자 모두가 투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데, 만일 유권자의 과반수가 투표하지 않았을 때 낭비되는 예산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개헌 반대론자들은 헌법 자체를 바꿀 것이 아니라 국회의원 혹은 대통령이 가진 권한의 범위를 축소하거나 하위 법안들을 철저하게 발의하자는 것에 의견을 모읍니다. 이미 우리의 인식은 법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니, 앞으로 만들어질 법안들과 비교적 개정이 쉬운 하위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는 건데요. 사실 이런 주장들도 모두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정말 개헌이 꼭 필요할까요?
33년 동안 잘 쓰던 헌법, 왜 바꿔야 하지?
한국헌법학회와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6월 헌법전문가 95명을 대상으로 ‘헌법개정에 관한 인식 조사’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전문가의 76.9%가 헌법 개정에 찬성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개헌에 찬성한 전문가들은 새로운 기본권 등 인권보장을 강화, 대통령 또는 국회의 권한이나 임기 조정, 공정 등 사회 갈등 해소를 위한 가치 제시 등을 이유로 꼽았습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새로운 기본권”은 어떤 권리일까요. 새로운 기본권은 헌법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헌법재판소의 결정에서 기본권으로 인정된 권리들을 말하는데요, 생명권과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정보공개청구권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누구도 타인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생명권, 개인정보를 스스로 형성·관리·통제할 수 있는 자유를 내용으로 하는 개인정보자기결정권, 공공기관이 보유·관리하는 정보에 대한 국민의 공개청구 및 공공개관의 공개의무를 규정하는 정보공개청구권은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보편적인 권리들입니다. 누군가, 설사 그게 공권력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의 생명을 함부로 해칠 수 없다는 것, 나의 개인정보를 국가권력에 의해 침해받지 않고 내가 주체적으로 관리·통제해야 한다는 것, 공공기관에 정보열람을 요구하는 것은 별다른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너무 당연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 권리들은 사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이 아닙니다.
헌법재판관이 적은 한 줄의 판결문, “생명권은 헌법에 규정된 모든 기본권의 전제다.” 이것이 생명권 보장의 근거입니다.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은 명문 규정이 아닌 주민등록번호 변경, 성범죄자 신상정보 등록 등의 사건에서 헌법재판소가 낸 판결에 의해, 관습헌법 정도로만 인정받고 있습니다. 정보공개청구권은 ‘알 권리의 보장’ 측면에서 헌법 제1조 국민주권주의, 제10조 인간의 존엄과 가치, 제21조의 표현의 자유 등의 조항을 유추 적용한 것입니다. 당연하게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들이 헌법의 조문으로 명시되지 않은 채 헌법의 가치를 넓게 해석해주는 자비로운 헌법재판관에게 맡겨져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직 헌법으로는 아직 당연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가 아니었던 거죠.
개헌은 역사의 전환점이다.
다시 앞선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말 개헌이 필요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분명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과 명문의 법으로 당연하게 보장되는 것들엔 차이가 있었습니다. 헌법에 명문조항이 없는 것들은 ‘관습적’으로 기존의 조항들을 유추 적용해서 권리를 보장한다고 했는데요, 이게 뭐가 문제냐 싶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법 조항이 없으면 원래 있던 법을 조금 넓게 해석해서 보호해도 괜찮은 거 아냐?” 언뜻 보기엔 괜찮아보여도 사실은 괜찮지 않습니다.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것들은 법적인 구속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의 자비로운 조문 해석을 강제할 수 없으니 우리의 권리 보장에 제한을 둬도, 그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죠. 여기서 법과 사람들의 인식 사이엔 모순이 생깁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아직 명문의 법조문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혼란도 생길 겁니다. 흔히들 ‘법은 모든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인 상식을 대변한다.’고 하는데, 일반적인 상식을 법이 쫓아오지 못하는 지체 현상이 발생하는 거죠.
그래서 개헌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상식은 어느 정도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여기는지 시대와 인식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상식’을 반영해야 합니다. 시대와 헌법이 함께 발을 맞춰가는 것은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 사회가 시대와 인식의 변화를 쫓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어느 정도의 상식을 공유하고 있는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개헌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세상에 첫 걸음을 내딛은 뒤로 총 9차례의 개정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그 중 2,5,6,7,8차 총 5차례의 개정은 모두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한 개정이었습니다. 헌법이 누군가의 권력이 되었던 것이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개헌은 소수의 권력과 기득권층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공감하고 있는 변화의 필요성과 우리 시대의 상식이 반영된 개헌입니다.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아직도 1988년 그 때에 멈춰있나요?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8기 정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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