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를 거쳐 경성으로 1917년 전후
*이 글은 안톤 마르틴 펠러를 찾아서 (II)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참고하십시오. 그나저나 브런치가 이렇게 불안정할 지 미처 몰라서 당황스럽군요. 흠...
1914년 여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독일제국과 오스만투르크제국, 불가리아왕국이 함께 동맹국이 되어 러시아, 프랑스, 영국과 전면 충돌하는 세계 제1차대전이 발발한다. 이 기간 중 유럽은 두개의 전선이 형성되는데, 하나는 서부전선으로 프랑스, 영국을 상대로 하는 전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부전선으로 러시아를 상대로 하는 전선이었다.
안톤 마르틴 펠러는 1914년 학교를 휴학하고 유럽에서의 기록은 현재 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일화들을 보면 세계1차 대전에 징집되어 군인으로 참전하였다고 전한다. 티롤지방의 오스트리아군은 알려지기로는 우선적으로 남쪽의 이탈리아왕국과의 전선에 투입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1919년 티롤의 남부 지방은 이탈리아에 합병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전해지는 안톤 마르틴 펠러의 행적으로 보며는 그는 이탈리아 전선이 아닌 러시아와의 동부전선에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17년 혹은 1919년 안톤 마르틴 펠러의 이름은 조선에서 자리를 잡으며 다롄으로 진출하려고 시도를 하고 있던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기록에 불쑥 등장하게 된다. 나카무라 요시헤이는 그의 "자전" 自傳 1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これより先、京城の事務所ではドイツ人の技師を雇用した。氏はチューリッヒの高等工業学校建築科を卒業し、欧州戦争で露西亜に捕虜となり、転々として京城に来たのを、キリスト教青年会の丹羽凊次郞先生の御紹介により雇用したのである。" (이보다 전에 경성의 사무소에는 독일인 기사를 고용하였다. 그는 취리히의 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유럽전쟁으로 러시아에 포로가 되었다 여기저기 떠돌다 경성에 오게되었고 기독교청년회의 니와 세이지로 선생의 소개를 받아 고용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 언급한 '이보다 전에'에서 '이 일'에 해당하는 내용은 바로 1920년 조선은행의 다롄지점과 장춘지점의 공사를 위해 1917년부터 다롄에 출장소와 공사부를 설치하고 만주 건축계에 진출을 하기 위해 노력하던 일들을 의미한다. 펠러가 사료에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도 역시 이 일과 관련하여 1920년 5월 5일 만주일일신문 滿洲日々新聞 에 실린 나카무라건축사무소의 광고2에 "構造工學士 アントン、フェレル”(구조공학사 안톤 펠레루)라고 실린 것이 처음이다.
그리고, 그가 경성의 사무소에 고용된 것은 현재 1919년으로 알려져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 西澤泰彦의 또다른 논문 "建築家中村與資平の経歴と建築活動について", 1993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경력과 건축활동에 대하여)3를 보면 1919년에 "雇われるオーストラリア人アントン·フェーラ”(채용한 오스트리아인 안톤 펠러)라고 1919년을 나카무라 사무소 합류시기로 못박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내가 왜 '1917년 혹은 1919년'이라고 언급했는가 하며는, 실은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고향 하마마쓰(浜松)에서 있었던 1989년 나카무라요시헤이전 中村與資平展의 자료집 중에서 실행위원회 実行委員会에서 발간한 나카무라 요시헤이 연표 中村與資平年表4에 보면 1917년 다롄시에 출장소와 공사부를 개설하였으며, 경성중앙학교 설계와 한성은행 대전지점을 맡았다는 부분에 대한 비고란에 所員 アントン·フェーラ(墺) ?~1922 在籍 (직원 안톤 펠러(오스트리아) ?-1922 재직근무)라는 기록이 있다. 실은 이 기록은 약간 상세한 자료가 불충분하기는 하다. 하지만 '여기저기 떠돌다 경성에 오게 되었고'라는 나카무라의 기록을 보면 경성에 오자마자 나카무라 사무소에 척하고 취직을 했을리도 없고 그렇다면 필러가 경성에 도착한 것은 대략 1917년에서 1919년 사이의 어느 때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추정일 것 같다.
나카무라는 "기독교청년회의 니와 세이지로 선생의 소개를 받아" 그를 고용했다고 한다. 당시 경성에는 기독교청년회 즉 YMCA가 두개 있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황성YMCA는 1913년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명칭이 바뀌고 일본 YMCA의 소속이 되어있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 YMCA의 경성지부로 니와 세이지로 丹羽淸次郞 (1865-1957)라는 인물이 1909년부터 이끌다 1938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가 해체된 후 이를 흡수하였던 곳이다. 니와 세이지로는 1907년부터 '조합교회' 계통의 선교사로 조선 전도에 나서 1909년에 서울의 일본인 YMCA 총무를 맡아 식민지 기간 동안 내내 윤치호의 일기에도 종종 등장하여 기독교계의 문제를 상의하는 일본인 개신교계의 리더였던 사람이다. 정황상 망명 유랑 중인 한때 적국군인이 경성에서 의지할 곳은 YMCA같은 곳이었을거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김영재의 논문에 보면 펠러가 나카무라 사무소에 합류한 과정에 대해 다른 이야기 하나를 언급하고 있다: "30) 나시자와 야스히코는 자전에서 언급된 니와 세이지로우와는 별도로 펠러를 소개시켜준 인물로서 조선은행 대련지점장이었던 호시노 키요츠(星野喜代治)을 이야기하고 있다. 西澤泰彦, op. cit., 1996, 미주 46. "5 이 내용은 실은 니시자와의 1996년 책이 아니라 위에서 소개한 1993년의 논문의 미주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바로잡자면 '호시노 기요지'가 바른 표기이다. (마이너한 오류이긴 하지만 덕분에 1996의 책에서 이 이름을 찾느라 모든 미주를 샅샅히 뒤졌는데 책이 아닌 논문에서 발견하니 정말 허탈했다.) 니시자와에 따르면 이 내용은 "フェラーの紹介者について,「自伝」では京城YMCAの丹羽清次郎とされるが,故山崎 河氏の証言によれば星野喜代治朝鮮銀行大連支店長とされ,定かでない。" (펠러의 소개한 사람에 대해서 '자전'에는 경성YMCA의 니와 세이지로라고 되어있지만, 고 야마자키 가와(라고 읽는?)씨의 증언에 따르면 호시노 기요지 조선은행 대련지점장이라는데 불확실하다)라고 되어있다.6 실은 이 호시노 기요지라는 사람은 도쿄제대를 나와 대장성 은행과에서 1938년까지 근무하다 사직 후 조선은행에 입사하여 나중에 부총재로 근무하다 패전 후 조선은행의 청산을 맡아 처리한 사람이다. 일단은 경력 중에서 1917-1919년에는 조선은행 직원이 아니었고 경성에 연고가 딱히 찾아지지도 않는다. 니시자와는 1920년부터 1921년 나카무라사무소에서 견습으로 일한 후 다시 1925년부터 1932년까지 나카무라 공무소 직원으로 일했던 야마자키 가와를 1984년에 인터뷰하면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 자신도 역시 이에 대해 확실치않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에 포로가 되었다는데 1917년 혹은 적어도 1919년 이전에 오스트리아군인 그가 어떻게 지구 반대편의 경성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흥미로운 펠러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정동의 논문 "라이트와 극동 아시아, 그 연관성에 대하여"(한국건축역사학회, 2007)는 출전이 명확하지 않은 전혀 다른 출처의 이야기를 전한다. "안톤 펠러는 ..... 세계 제 1차 대전에 동부전선에 참전한 바 있었다. 러시아 전선에서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의 치타(Chita)시에 억류되었다가 러시아 혁명기간 중 탈주해서 경성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청년회(YMCA)에 간부의 소개에 의해 나카무라 설계사무소에 입고하게 된 것이다. 그는 설계사무소에 입주한 상태에서 일했다."7 우선 "치타에서 억류되었다가 러시아 혁명 기간 중 탈주해서" 부분은 아직 다른 어느 선행 연구에서도 못찾아봤다. 우선 "치타에서 억류되었다가 러시아 혁명 기간 중 탈주해서" 부분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1993년의 논문 "建築家中村與資平の経歴と建築活動について"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논문에 의하면 "第一次世界大戦中にロシア軍の捕虜となってシベリア・チタに抑留されたが,ロシア革命の混乱に乗じて脱走し大連・京城に逃れて来た。"(제1차 세계대전 중에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치타에 억류되었다가 러시아 혁명의 혼란을 틈타 탈주하여 다롄, 경성으로 도망쳐 왔다)라고 전하고 있으며, 이 내용의 출전은 나시자와가 위에서 언급한 과거 나카무라 사무소의 직원이었던 아먀자키 가와 山崎河를 1984년 인터뷰한 내용이다. 공식적인 것이라기 보다 기억에 의존한 개인적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정황상 합리적인 여정으로 보인다. (2022/10/28 일부 내용을 수정하고 보완하였습니다)
러시아와의 동부전선에서 러시아는 240만 명의 전쟁포로를 붙잡았는데, 이중 대부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사들이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제국군 중 동부전선에 배치된 3분의 1이 포로가 되었다고도 한다. 시베리아의 치타는 1918년 미국이 본격적으로 시베리아 상황에 개입하여 부대를 파병한 데에 대해서 발행한 "The POW Problem in Russia: Justification for Allied Intervention, 1918-1920" (러시아에서의 전쟁 포로 문제: 연합국 개입의 정당화, 1918년에서 1920년)이라는 미국 육군의 보고서8에 의하면 1918년 당시 분산된 포로수용소 중에서 치타가 가장 대규모였으며, 치타에 수용된 포로 1만명에서 1만5천명의 대부분이 오스트리아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고 하고 있다. 치타에서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후 경성으로 오려면 시베리아 열차를 따라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원산을 경유하여 경성으로 들어오거나 아니면 치타에서 하얼빈으로 가서 남만주철도를 따라 랴오둥반도의 다롄으로 가서 경성으로 이어져서 들어오는 길이 가능하다. 물론 잡히지 않았을 경우이긴 하다만. 치타는 여러가지 정황을 보면 펠러가 시베리아를 탈출한 곳으로 보는 것이 가장 확률이 높다. 그러면 치타-하얼빈-다롄-조선은행 다롄지점-경성 YMCA-나카무라 사무소로 이어지는 연결도 무리가 없이 보인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김정동의 논문(2007)에는 이 내용의 출전이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상세한 내용이라면 분명 니시자와의 인터뷰보다도 정확할 것 같은데.......(나도 니시자와처럼 '定かでない'라고 밖에는)
참고로 여기서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일본과 러시아는 1차 대전에서 연합국이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일본에게 적국이었다. 일본은 1차 대전이 시작되자 1914년 동아시아의 유일한 독일의 교두보였던 산둥 반도의 칭타오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이때 독일군 포로들은 일본 전국에 분산 수용되었고 칭다오의 점유재산 중에서 도서는 제국대학, 구제 관립고등학교 등에 분배하였다. 서울대 도서관에 이때 몰수한 칭다오 도서관의 책이 있는 것을 이태전에 확인한 적도 있다. 그런데 상황이 1917년 이후에는 조금 달라지게 된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나면서 그때까지 연합군에 가담하였던 러시아는 전쟁을 중지하고 실질적으로는 내전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와 함께 볼셰비키와 내전을 벌이게된 백계 러시아를 지원하였고, 독일과 오스트리아군 포로들은 시베리아의 몇군데에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 독일/오스트리아군 포로들은 상당수 볼셰비키에 경도되어 실제로 적군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치타에서 동쪽으로는 모두 독일/오스트리아군에 적대적인 백계러시아군과 연합군의 영역인데, 1917년이면 불과 25살의 청년이었던 펠러는 이 와중에 어떻게 시베리아를 빠져나와 이름도 아마 들어본 적 없었을 머나먼 경성에 가게된 것일까. 궁금하다. 정말로.
너무 지엽적인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다음에는 본격 건축가로 건축사에 이름을 올리는 1919년 이후부터 미국으로 가기전 1922년까지의 경성-도쿄 시대로 넘어가겠다.
註) 표지사진 '러시아에 억류되었던 독일/오스트리아군 포로들'의 출전: How POWs in Russian WWI camps faced a life or death lottery - Russia Beyond (rbth.com)
1.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자전" 출전: 浜松が生んだ名建築家中村與資平展 (trc.co.jp)
2. '海を渡った日本人建築家-20世紀前半の中国東北地方に おける建築活動', 西澤泰彦 , 彰国社, 1996)
3. "建築家中村與資平の経歴と建築活動について", 西澤泰彦, 1993, 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報告集 第450号
4. 中村與資平年表 출전: 浜松が生んだ名建築家中村與資平展 (trc.co.jp)
5.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서양건축양식의 수용과정과 그 의미', 김영재, 2013, 대한건축학회
6. 西澤泰彦, op. cit. 1993
7. '라이트와 극동 아시아, 그 연관성에 대하여', 김정동, 한국건축역사학회, 2007, 이 논문에 언급된 출생지 '쿠르휘르스타인' Kurfirstein과 '치타'의 두군데 구체적인 지명은 참고도서로 표시된 것은 니시자와의 1996년 책인데도 다른 니시자와 계통의 인적 정보에서는 전혀 보이지않는다. 여기에는 포함되어있지 않으며, '치타'의 경우 원래는 니시자와의 1993년 논문이 출전이다.
8. Briscoe, Charles “The POW Problem in Russia: Justification for Allied Intervention, 1918- 1920”, DTIC AD A 043681, USA CGSC, Fort Leavenworth, SEP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