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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륜재 Dec 23. 2021

1. 서재의 구조

나는 무슨 책들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안방의 한쪽 벽에 기대는 모양의 책장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는 나무가 책의 무게를 못이기고 부러졌다.
부러진 책장은 아마 얼마 가지않아 내려앉을 것으로 보였다. 땡스기빙 연휴를 맞아 아예 안방의 책장을 다시 바꾸기로 했다. 좁은 뉴욕 아파트 안에 책장이 모두 15개. 촘촘히 꽂힌 책들을 대충 둘러보며 새 책장을 들이면 책들을 다시 재배치해야겠다 생각을 한참 했다.

책들은 각각 조그만 완결된 우주이다. 거기에는 크리에이터가 있다. 각각의 책마다 그 창세에는 그 세계를 설계하고 채워넣은 창조자가 있다. 어떤 세계는 너무나 허술하고 어떤 세계는 너무나 집약적이다. 허술한 세계는 허술한 대로, 촘촘한 세계는 촘촘한 대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계의 '이야기'가 '역사'와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1508년 가르시 로드리게스 데 몬탈보 Garci Rodríguez de Montalvo 가 아마디스 데 가울라 Amadis de Gaula를 쓰면서 최초로 사실과 허구를 장르로 구분하려 시도하면서 대체로 시작되었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 '아마디스 데 가울라' 책이 나오던 16세기 초반 이전의 스페인에는 역사와 소설의 구분이 그리 명확하지 않았으며, 특히 기사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대부분 책 제목을 무슨 무슨 연대기라고 하였고, 인쇄술의 보급으로 이런 책들이 더욱 활발하게 읽히게 되자 더더욱 일반 독자들은 사실과 허구를 구분할 방법이 아예 없었다고 한다. 몬탈보는 '진실된 이야기',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 그리고, '꾸며낸 이야기'로 각각 장르를 나누고, 실제 역사서, 연대기를 의미하는 진실된 이야기를 가장 가치있는 책으로, 약간의 역사적 사실을 소설로 꾸며낸 그러니까 요즘 표현으로 팩션은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자신이 출판한 아마디스나 이후 후속편들은 그냥 꾸며낸 이야기 즉 요즘의 '소설'로 나눴다고 한다.


그러니 실은 책이 전해주고 있는 이야기들은 사실과 허구로 구분되기 전에는 그저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가장 사실만을 보장하는 과학책들도 허구의 소설이 되어버리는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때로 허구의 이야기가 어느 순간 현실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 사실과 허구를 어떻게 나는 몬탈보처럼 구분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책장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이 책들은 서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지구는 태양계와 이어지고 태양계는 은하계에 속하여 서로 다른 항성계와 거리를 지키며 운동을 하고 있는 그런 것 말이다. 그 세계들의 이어짐이 어떠한지에 따라 그 하나 하나의 구성하는 이야기가 진실된 것인지 아니면 순전한 즐거움을 주는 것인지 혹은 그저 허구인지를 판독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게 내가 본 내 서재의 구조이다. 서재에 꽂힌 읽었거나 읽기를 계획하고 있는 책들의 구조와 관계가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찾으려 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내가 내 서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 이야기는 내 서재라는 내가 창조한 세계의 창세 이야기가 되는 것일 거다.  


나는 동아시아 근세에 형성된 저잣거리의 예능들을 좋아한다. 일본 근세에 시작된 라쿠고 落語라는 예능을 무척 좋아하고 공부하고 있는데 이 라쿠고의 레파토리들은 '하나시 噺'라고 한다. 이 글자는 '이야기'라는 의미의 하나시話와 같은 발음으로 읽는다. 그런데 글자 모양을 들여다 보면 입口에서 나오는 새로운新 것이란 의미였을까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된다.  그래서라고 할지 아무튼이라고 할지 나도 어쩌면 내 입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보려 한다.

 "피카레스크소설의 탄생에 미친 기사소설의 영향", 권미선, 이베로아메리카 제10권 1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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