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내 소개부터 하자면 나는 83년생 여자이며 초등학교 교사다. 그리고 우울증을 앓고 있다. 나쁜 부모를 만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힘겨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애쓰며 살았다. 지금도 마음의 불안을 진정시키고자 애쓰며 산다. 이제 내 행복을 찾고 싶다.
나의 부모는 내가 어릴 때부터 자주 싸웠고 싸움이 심해지면 아빠가 엄마를 때렸다. 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자주 울었다. 집은 가난했고 부모의 사랑도 없었다. 학교에서는 친구가 별로 없었고 왕따도 당했다. 나에겐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편히 쉴 수 있는 안전한 공간, 안식처가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 엄마가 나를 버리고 도망갔을 때, 깊은 좌절감에 빠져 멍하게 지내기도 했지만 나는 곧 공부 잘하는 친구를 따라 문제집을 사면서 공부라는 것을 처음 해보게 된다. 중학교 1학년 가을쯤 친구를 따라 과학 문제집 하나를 사면서 공부를 시작하고 이때부터 완전히 공부에 빠지게 된다. 그전까지는 공부라는 걸 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중학교 1학년 초반에는 반에서 27등 정도 했었는데 중2 때는 4등까지 올라갔다. 나는 성적 향상이라는 상승의 기쁨, 성취감에서 큰 만족감을 느꼈고 참 신나는 경험을 했다.
학교에서는 친구의 괴롭힘과 가정에서는 방임, 방치로 힘들고 척박한 환경에서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하는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얻으면서 힘겹게 꽃을 피워나갔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도 얻으면 이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나에게 꿈이 생겼던 것이다. (이 꿈은 이후에 철저히 짓밟힌다.) 그때는 고등학교가 비평준화여서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선 성적도 좋아야 했고 논술시험을 잘 봐야 했다. 그래서 중2 방학 때는 동네 도서관에 매일 가서 책을 하루에 1~2권씩 매일 읽었다.
나는 이렇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내 인생을 잘 만들어 나가기 위해 성실하게 열심히 필요한 무언가를 했다. 중학생이 자기 인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 공부라 생각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실제로 성적 향상도 매우 잘 나타났다. 이 당시 나는 '하면 된다'는 걸 몸소 깨달았고 그것을 믿었다. 자신감도 있었다.
여전히 학교에서는 친구의 괴롭힘을 당하고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아빠에게 문제집 살 돈을 달라고 했다가 딴 데 쓰려고 거짓말한다는 소릴 들으며 거절당하고 중고 책방에서 남이 풀다가 판 문제집을 싸게 사서 지우개로 팔 아프게 답을 지우며 슬펐지만,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 문제를 해결해갔다. 어떻게든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전진해갔다. 방법은 찾으면 어떻게든 있었다.
하지만 중2 겨울방학 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 당시 나는 대구에서 아빠랑 남동생이랑 살고 있었는데 아빠는 그때 막노동일을 하고 있었다. IMF가 터져서 막노동 일자리가 없으니 할아버지 할머니 계시는 시골로 가서 살자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시골집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으로 사람이 살기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그것도 5명이 살기엔 방도 2개밖에 없었고 욕실도 없고 수도도 없어서 물도 안 나오는 집에 가자는 거였다. 보일러도 당연히 없고 아궁이에 불을 때워서 지내야 하며 전기만 들어오는 곳이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에 좋은 대학을 가야 하는데 그런 시골에 가서 시골학교에 가서 어떻게 서울 아이들과 경쟁을 하지? 이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나는 안 가겠다고 버텼다. 여기 도시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고 사정했지만 아빠는 내 교육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빠랑은 말이 안 통해서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엄마는 우릴 버리고 집을 나가서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집을 나간 지 1년이 좀 지나자 우리에게 연락을 해오던 상태였고 가끔 밖에서 동생과 함께 엄마를 만났었다. 하지만 엄마의 연락처는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기에 엄마에게 연락은 할 수 없고 연락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아빠가 대구 집에 보일러도 넣어주지 않고 먼저 시골로 떠났고 나와 내 동생은 한겨울에 추운 방에서 오들오들 떨며 엄마 연락만 기다렸다. 한 달쯤 지났을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기쁘고 다급한 마음에 지금의 상황을 얘기했고 엄마랑 같이 살면 안 되겠냐 나는 시골에 가기 싫다 이런 말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화기 너머로 뚜뚜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하는 와중에 엄마가 전화를 끊은 것이다. 그걸로 끝이었다. 다시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비참하게 그리고 두 번이나 엄마에게 버려졌다.
나는 멍해졌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시골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비참한 생활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 오래된 초가집은 냄새가 고약해서 코를 찔렀고 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행패 부리는 사람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하루에도 12번 넘게 싸웠다. 나는 그들과 좁은 방을 같이 쓰며 욕설을 들으며 공부해야 했다. 공부라는 내 끈은 놓을 수 없었기에.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너무 자존감이 낮고 주눅 들어있고 내성적이어서 친구를 잘 못 사귀었다.
그래도 나는 장학금을 받으며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는 시골에 있던 유일한 여자고등학교로 집에서 거리가 멀어 기숙사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숙사비와 밥값, 학교 등록금을 아빠가 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하고 기숙사 비용은 그냥 기숙사 운영하는 아주머니에게 공짜로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으면 나는 중졸밖에 못했을 거다. 그 최악의 시골집에서 벗어나 기숙사 생활을 하며 쾌적한 곳에서 지낼 수 있게 되어 좋았다. 문제집 살 돈이 부족해 선배들이 버린 문제집을 학교 쓰레기장에서 주워서 쓰기도 했다. 그러던 내게 또 시련이 찾아온다.
고3 때 엄마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마지막 전화가 끓긴 이후로 처음 연락한 엄마는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며 나와 동생에게 같이 살자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엄마를 따라 서울로 갔는데 반지하 창고 같은,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엄마는 폭언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스트레스를 다 나에게 풀었다. 이럴 거면 나에게 왜 같이 살자고 했을까 너무 괴로웠다.
다음 내용은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