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아들이 장편동화를 권했다
책과 만나는 법
첫째와 둘째는 일곱 살 차이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유아기가 끝났을 때 둘째가 태어났다.
한 번 해본 뒤에 또 맞닥뜨린 육아, 나는 자신 있었다. 섣불리 아이를 안아 올리지 않았고, 식사와 잠자리를 규칙적으로 제공했으며, 아이가 피곤해지지 않게 스케줄을 조절했다. 첫째 때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겨우 깨달은 내용을 둘째에게는 바로 적용하니 수월했다.
그러나 먹고 자는 게 전부인 시절이 지나자, 둘째는 우리에게 변형 문제를 출제하기 시작했다.
취향, 그래 취향이 적절한 단어 같다. 아들의 취향은 또래와 약간 달랐다.
시작은 자동차였다.
네 살, 아들은 명품차를 좋아했다. 자동차 사진이 잔뜩 실린 책을 끼고 살았다. 그리고 미래 자동차에 관심이 있었다. 만화 캐릭터도 좋아하긴 했지만 주 관심사는 실제 차다. 참고로 아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캐릭터가 그려진 옷이나 물건을 고른 적이 없다. 도로 위에서 비싼 차를 만나면 드림카를 가슴에 품은 청년처럼 눈이 빛났다. "엄마 저거 ***잖아!" 하고 큰소리로 외치기라도 하면 뒤따르는 민망함은 엄마 몫이었다.
다섯 살, RC카에 빠졌다.
또래 친구들은 변신 로봇과 공룡에 심취해 있었다. 아들도 변신 로봇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공룡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시기에 아들은 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선물을 모두 RC카로 골랐다. 당연히 실제 차를 모델로 하는 RC카다.
여섯 살, 매일 같이 책 읽고 자전거만 탔다.
날이면 날마다 비 오면 책 읽고, 비 그치면 자전거를 탔다. 책을 읽으면 4시간씩 읽었고, 자전거를 타면 3시간씩 탔다. 한글을 일찍 깨쳐서 이전에도 책을 읽었지만, 이제 제법 잘 읽게 되자 두꺼운 책을 앉은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읽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이가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일도 하고, 꿀 같은 휴식도 취했다. 하지만 공원에 나가 자전거를 탈 때면 허벅지가 터질 듯한 고통을 견뎌야 했다.
일곱 살, 여덟 살 때는 큐브와 피아노에 빠졌다.
아들의 승부욕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다. 이 때도 아들은 한 나절 동안 큐브하고, 두 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했다. 원하는 수준에 이르렀는지 요새는 시들하다.
작년부터 열 살이 된 지금까지 아들은 집 밖으로 나가 노는 데 빠져 있다. 주말에도 약속을 잡는다. 친구들과 아파트 단지 안을 휩쓸고 다니는 재미에 빠져 하루 두 시간 반씩 놀고 있다.
원래 아들은 집에서 잘 놀았다. 전기회로 실험, 마이크로비트 코딩, 암호 코드 시리즈물 읽기, 온갖 장르의 학습만화와 과학 서적에 빠져 지냈다. 하지만 이것들은 이제 모두 경도(놀이터에서 하는 경찰과 도둑 놀이)에 밀렸다.
다만 책 읽기를 아예 포기할 수는 없는지 아침저녁이나 틈날 때마다 읽는다. 예능 프로를 보다 좀 지루해지면 책을 보고, 다시 티브이를 보고 그런다. 둘 중 하나만 하라고 혼내도 소용없다.
"엄마 책을 읽으면 약간의 도파민이 분비된다는데, 나는 도파민이 너무 많이 분비되는 거 아닐까? 이걸 놓으면 재미가 없어져."
아들은 주로 과학 분야의 책 읽기를 좋아한다. 동화도 많이 읽지만 주로 내가 추천하거나 선생님이 추천하면 읽는 식이었다.
며칠 전 갑자기 아들이 말했다.
"엄마 이런 장편동화를 세트로 사줄 수 있어?"
<우주로 가는 계단>을 읽었는데 너무 재밌었다고.
'도대체 얼마나 잘 썼길래?'
아들이 내게 동화를 추천한 적은 거의 없었기에 당장 읽어봤다. 물리학을 사랑하는 15살 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이웃 할머니가 실종된 이유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과연 재밌다. 동화를 시큰둥해하던 아들이, 개인 취향이 확실하던 아들이 혹할 만했다.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 성향의 사람이라도 애인과는 즐겁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책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아들은 자기 취향에 딱 맞는 책들을 쏙쏙 골라 읽었다.
나는 보통 독서라고 하면 막연히 문학작품을 떠올렸다. 그것이 편향된 생각이라는 걸 눈치 채지도 못했다. 아들은 왜 읽기 어려운 과학 책을 좋아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지성보다는 감성이 중요한 시기니까 동화나 그림책을 권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자라면서는 오히려 내 관심 영역이 그쪽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세상의 책은 놀라울 만큼 다양하다. 아들은 취향의 공백을 책으로 채웠다. 자동차 브랜드와 마크를 책으로 익혔고, 도로에서 실물을 보면 책에서 배운 걸 확인했다. 피아노 배울 때는 악보를 한참 들여다봤고, 거기서 모르는 기호를 알고 싶어 했다. 덕분에 이론 배우는 게 빨랐다. 큐브 역시 동영상 보다 책을 보는 게 수월했다. 설명서 보는 걸 좋아하는 덕에 RC카 작동법은 따로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관심사가 늘 책과 연결이 됐다. 그러다 보니 이제 동화에까지 닿게 된 것이다.
독서 습관이 그렇게 중요하다는데... 아들이 책과 만나는 법은 간단하다. 핸드폰 집어 들어 검색하듯 그냥 내키는 걸 보고 읽는다. 또 더 재밌는 일이 있으면 책은 안 읽는다. 나는 그냥 둔다. 재밌는 책을 만나면 당연히 또 읽을 테니까.